여러분 석 달 전에 5월 말에 뭐 하셨어요? 무슨 걱정하셨고 무슨 기도를 드리셨나요? 돌아보면 딱 엊그제 같은데 그냥 여름 한번 다시 지나갔을 뿐인데요. 근데 오늘 본문에서는 딱 그만큼의 시간에 몇 백 년 내려온 한 나라의 운명이 뒤집힙니다. 전무후무한 개혁왕 요시야를 장사하고 딱 석 달이에요. 그 아들은 남의 나라 땅에 묶이고 나라는 애굽의 손에 넘어갑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한 계절 만에 세상의 종이 된 거예요. 그래서 오늘 우린 이 질문 앞에 섭니다. 하나님의 백성인데도 우리는 어떻게 세상의 종처럼 살아갑니까? 성경은 그 모습을 한마디로 이렇게 부릅니다. <애굽으로 잡아갔더니> 오늘 제목이에요. 애굽이 어떤 곳입니까? 우리가 종 되었던 집이잖아요. 하나님의 백성이 그 종의 집으로 도로 잡혀간다는 거예요. 딱 석 달이면 되더라고요. 오늘 잡혀가는 본문이 세 가지 모습을 보여줍니다.
첫째, 세상의 손에 붙들려 삽니다
31절, 32절입니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삼 세라 예루살렘에서 석 달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하무달이라 립나 예레미야의 딸이더라
예레미야 선지자와 동명이인이에요. 3개월간 아주 짧은 기간 동안 통치했던 여호아하스에 대한 평가는 32절을 보면 "여호아하스가 그의 조상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니"입니다. 성군 요시야 왕이 하루아침에 전쟁터에서 죽었어요. 나라가 비상이에요. 백성들이 급히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웠어요. 그러니까 여호아하스는 아버지 요시야가 전쟁터에서 죽게 되자 곧바로 왕이 된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자리에 단 석 달이 있었어요. 그 석 달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뭡니까? 악을 행했다고 해요. 그런데 이상하죠. 그의 아버지의 행위대로가 아니라 그의 조상들의 모든 행위대로 악을 행했다고 해요. 아니 아버지가 요시야잖아요. 아버지에게서 보고 들은 대로만 살아도 중간은 갔을 텐데 그 전무후무한 아버지를 딱 건너뛰고 할아버지 아몬, 증조할아버지 므낫세의 길로 돌아갔다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이 왕이 된 지 석 달 만에 갑자기 악해집니까? 아니에요. 석 달의 악은 석 달 만에 생긴 게 아니죠. 왕이 될 때 나이가 몇 살이라고요? 스물세 살이에요. 석 달이 그 스물세 해를 지금 폭로하고 있는 거예요. 여호아하스는 둘째 아들이에요. 형을 제치고 백성의 선택을 받았어요. 그러니 사람들의 눈에 뭔가 있어 보였겠죠. 위기의 나라를 맡길 준비된 대안처럼 보였을 거예요. 그래서 무엇이 준비된 대안이었을까? 이걸 좀 묵상을 해봐야 돼요. 성경은 나의 죄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의 이야기이다. 어디서나 나타난 현상만 보고 옳고 그르고를 생각하면 안 되는 거예요. 거기서 내 죄를 보려니까 상대방이 왜 그랬을지를 늘 생각해보는 것이 구속사라고 했잖아요. 구원을 위해서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뭘 봐야 할까?
그는 아버지 요시야를 날마다 보았어요. 성전을 수리하고 우상을 부수고 산당을 제거하고 유월절을 지키는 아버지를 봤어요. 그런데 그의 눈에는 그런 아버지가 어떻게 보였을까요? "나라가 이렇게 위태로운데 지금 성전 수리할 때야? 우상 하나 더 부순다고 나라가 살아? 예배가 밥 먹여줘? 군대가 있어야 살지." 어쩌면 이렇게 아버지를 답답하게 여겼을지도 몰라요. 왜요? 여호아하스는 부자 왕자잖아요. 더구나 그렇게 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아버지가 평생 하나님 편에 섰다고 했던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전쟁터에서 죽었잖아요. 저도 평생 변소 청소하던 엄마가 교회 앞에서 교통사고로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잖아요. 그때 저는 엄마를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어요. 사실 그런데. 반면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던 므낫세는 몇 년을 왕으로 살았습니까? 무려 55년이에요. 세상 눈으로 보면 누가 성공했습니까? 물어볼 것도 없어요. 그동안도 아버지가 답답했지만 '내 생각이 맞아. 아버지처럼 살면 뭐야, 일찍 죽네. 므낫세 할아버지처럼 살아야 오래 살지. 내가 살고 나라가 사는 길은 요시야 아버지 길이 아니라 므낫세 할아버지 길이야.'
여러분, 사회 구원은 개인 구원 없이 이루어질 수가 없어요. 요하스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 같았지만 그는 아버지도 나라도 사랑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어요. 완전히 세속사적인 사람이었죠. 그는 23년간 바로 옆에서 아버지를 보았지만, 아버지의 하나님 사랑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어요. 성군 아버지가 유대 편협주의의 영적 교만의 판단 미스로 느고의 애굽에 맞서다가 죽었잖아요. 느고가 요시야에게 기회를 준 것을 백성들은 알고 싶어하지도 않아요. 오직 요시야가 죽은 것만 분해요. 요시야가 죽고 나니 요시야만 숭배의 대상이 되어서 백성들은 반애굽의 민족주의자들이 되어서 "타도하자 애굽" 하면서 일어났어요. 그러니 백성들이 그렇게 요시야의 개혁을 보고 듣고 했음에도 그냥 세속사로 돌아오는 데는 시간이 안 걸려요. 워낙 그렇게 길들여져 있었잖아요. 그래서 이 반애굽을 하기 위해서 아들들 중에 가장 강성이고 반골기질이 있는 애국자 같은 둘째 아들을 택한 거예요. 사람 앞에서 왕이 될 준비와 하나님 앞에서 왕이 될 준비는 전혀 다른 거예요. 백성들이 보기에는 나라를 맡길 대안이었어요. 그런데 여호와 보시기에는 악했어요. 사람의 눈을 통과했다고 하나님의 눈까지 통과한 것은 아니에요.
이번 대구 목회자 세미나 보셨잖아요. 그런데 대구 채플에서 예전에 직분자셨던 한 장로님이 3일 동안 전체 참석을 하셨어요. 남자분이 그러기가 너무 힘들잖아요. 그래서 제가 끝나고 나서 너무 기뻐서 물었어요. "구속사가 들리세요?" "아니요." "요셉이 아니고 유다인 것이 이해되세요?" "전 요셉이 좋죠." "그러면 이해가 안 되셨겠네요." "그렇죠. 목사님 말씀은 첫째 큐티 운동을 하고자 하며, 둘째 지역교회가 동참하면 좋겠고,.. 첫째 둘째 셋째 이렇게 저처럼 설명을 해주셔야죠. 큐티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요? 첫째 둘째 셋째. 구속사도 뭔지 첫째 둘째 셋째. 이렇게 강의를 해주셔야 하는데, 목사님 너무 논리적이 아니고 성경 가지고 스토리로 풀어주시니 저는 알아듣기가 너무 어려워요." 이러시는 거예요. 그걸 해맑으신 얼굴로 너무 웃으시면서... 그건 너무 좋았어요. 그러니까 아내 권사님이 옆에서 "목사님, 목사님 이런 말 들으시면 안 돼요. 목사님 때문에 살아났으니까요. 목사님 그대로 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부부가 짝이 되어서 서로 다른 말을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이번 주 나눔에 또 어떤 나눔이 올라왔냐면,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도 정치적인 얘기를 할 땐 걸러듣는다. 중립이 아닌 말씀에서 봐야 한다고 하시는데 저는 가끔 한쪽 편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은연중 목사님은 정치적으로 잘 모르실 수도 있어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제가 늘 이러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지금 유다도 반애굽 친애굽으로 극명하게 갈렸어요. 그 말씀에서 정치를 보는 게 뭔가요? 유다에게 수없이 경고하시다가 지금 하나님의 징벌로 애굽에게 망하게 됐잖아요. 애굽이 지금 하나님께 쓰임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애굽도 구원의 시선으로 이제는 좀 때를 기다려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요시야 죽인 애굽만 나쁜 놈인 거예요. 그리고 그 백성들에게 먹혀들어가서 그냥 애굽 타도를 외치는 것이 여호아하스의 현상이라는 거죠. 나쁜 놈 좋은 놈이 없고 예수 믿게 하는 환경이 최고의 환경인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우리도 여호아하스처럼 20년을 와서 들어도 보아도 들리지 않는 분들이 있죠. 그래서 예수가 안 믿어진다 이러시잖아요. 여전히 옳고 그름으로 분노해서 여호아하스 같은 결정을 할 수 있고 백성들은 열광을 하는 거죠.
그 길을 선택한 그에게 주어진 것은 55년이 아니라 석 달이었어요. 그리고 그를 선택한 백성도 이제 멸망 기차에 같이 올라탔어요. 요시야가 죽은 지 딱 23년 만에 이 나라가 없어지잖아요. 여러분, 그러기에 항상 다수가 옳은 게 아니에요. 여러분, 하나님이 상급이 아니라 세상 성공이 상급이 되면 내가 성공을 붙드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그 성공이 내 손목을 딱 붙드는 거예요. 여호아하스는 왕좌에 앉았지만 자유인이 아니었어요. 이미 세상의 성공에 붙들린 종이었어요. 그는 아버지를 위하는 것 같지만 아버지가 그 일생에 외쳤던 개혁의 말씀은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이렇게 계속 구속사를 모르는 사람은 사랑도 효도도 할 수 없는 거예요. 이 땅의 논리로 맨날 옳고 그름을 생각하니까요. 그리고 석 달 뒤에 그의 마음을 붙들고 있던 세상이 이제 그의 몸까지 붙듭니다. 33절이에요.
바로 느고가 그를 하맛 땅 립나에 가두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지 못하게 하고 또 그 나라로 은 백 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벌금으로 내게 하고
그러니까 느고가 여호아하스를 왜 그렇게 미워했을까요. 지지난주에도 얘기했지만 앗수르를 돕기 위하여 올라가던 바로 느고는 요시야의 저항에 부딪혀가지고 결국 늦게 가게 되어서 졌어요. 결국 앗수르는 몰락하고 바벨론이 패권을 잡게 되니까 애굽, 바벨론, 앗수르 3파전에서 애굽이 진 거예요. 그 결정적인 역할을 요시야가 한 거예요. 이 역사를 읽어야 되잖아요. 그리고 느고가 요시야에게 기회를 주었잖아요. 근데 그걸 저버렸잖아요. 그러니까 전 세계 역사를 읽고 이걸 인정하고 지금은 애굽에게 숨을 죽여야 하는 때인 거예요. 지금 이해가 되세요? 그래서 이 구속사를 모르면 역사도 읽지를 못해요. 근데 그걸 인정 안 하고 아버지 사랑 혼자 하는 것처럼 3개월간에 그렇게 악을 행하니까 느고가 그걸 왜 몰라요. 폐위를 시킨 거죠.
여러분, 일주일만 있어도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딱 알아요. 그러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게 한 원인이 느고가 아니고 32절에 바로 여호아하스의 악행 때문이라고 분명히 성경에 기록이 돼 있잖아요. 여호아하스는 그냥 애굽을 타도해야 되기 때문에 그토록 몸부림치며 나라를 거룩하게 개혁하려고 했던 자기 아버지 요시야의 길을 따르지 않고 그냥 이전에 악한 왕들이 했던 것처럼 악행을 저질렀다는 거예요. 구속사를 모르니까요. 그래서 요시야의 종교개혁으로 정화된 예루살렘을 그냥 하루아침에 다시 다 더럽혔어요. 여러분, 나라가 아무리 망해가도 믿는 사람은 회개를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할 일이 보여요. 근데 아무도 회개를 안 해요. 회개는 안 하고 그냥 애굽 타도에 온 힘을 다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이 악이라고 하잖아요. 여러분, 역사를 읽을 수 있어야 돼요. 믿는 사람들끼리 하나가 안 되고 자중지란이 일어나고. 그런데 이렇게 구속사를 아는 지도자가 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어요? 그러니까 날마다 전쟁이고 서로 원수고. 한번 전쟁에 지면 그냥 상대방을 죽을 때까지 욕을 하고 원인을 생각 안 하잖아요.
백성의 손이 여호아하스와 맞아서 기름을 부었잖아요. 근데 석 달 뒤에는 바로의 손이 그를 결박하는 거예요. 믿는 백성의 손이 세운 왕을 세상의 손, 애굽의 손이 끌어내린 거예요. 여호아하스의 석 달 천하는 끝났어요. 느고는 그를 왕좌에서 끌어내려 립나에 가둬요. 다윗 왕조에서 왕을 이방 왕이 끌어내린 것이 이번이 처음이에요. 이제 유다의 왕을 유다가 정하지 못해요. 기름 부음 받은 왕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남의 나라 군사기지에 묶여 있습니다. 그게 끝이 아니에요. 애굽 왕에게 벌금을 냅니다. 조공이 아니고요. 벌금은 잘못한 사람에게 물리는 돈이잖아요. 이제는 무엇이 잘못인지도 얼마를 내야 하는지도 바로가 정합니다. 세상이 정합니다. 예수 믿는 나라의 왕의 몸도 나라의 돈도 다 바로의 손에 붙들린 거예요.
문자적으로도 여호아하스가 구속사를 모르니 당연히 역사 인식도 없지요. 그러니 눈앞에 느고가 나쁜 놈이니까 무조건 나쁜 놈이니까 그것이 느고에게 전해지지요. 그러나 느고가 요시야는 돕는 것 같더니 아들은 지금 잡아가잖아요. 여러분, 그러므로 안 믿는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에요. 잘해주든 아니든 마음을 뺏겨도 안 되고 미워해도 안 돼. 안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로, 징계의 도구로 그냥 쓰일 뿐이에요. 바사의 고레스 대왕처럼 포로 해방을 시켜준 왕도 있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처럼 잡아간 왕도 있어요. 모두 믿는 우리의 훈련을 위해 이 세상은 존재할 뿐이에요. 그런데 애굽을 의지하다 미워하다 한평생, 앗수르 의지하다 미워하다 한평생, 이 사는 것이 역사서이고 성경의 스토리잖아요. 그러니까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이 성경의 주제에요. 근데 이 쉬운 것을 우리는 성경을 보고 우리 인생 한평생을 통하여 아무리 듣고 보고 알아도 안 돼요. 하나님만 의지하는 게 안 돼요. 여전히 내 옆에 그냥 애굽 의지하다 미워하다 의지하다 미워하다. 이게 여호아하스만의 이야기입니까? 아니죠. 세상의 손은 지금도 있어요.
구체적으로 우리 통장 잔액이 나를 붙들어요. 인사권자의 눈치가 나를 붙들어요. 진단서에 적힌 병명이 내 마음을 붙들고 끊었다고 생각한 술과 게임과 그 사람이 나를 다시 붙들어요. 붙들려 있으니까 못 가는 데가 생기고 못하는 말이 생기고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이 생기는 거예요. 내가 불들려 있으면 그게 종살이에요. 목장에 너무 들어오기 싫은 사람은 이렇게 붙들린 게 많아서 못 들어와요. 거기 가면 뭔가 얘기해야 될 것 같아서.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예배드린다고 하면서 내 손목은 다 딴 데 잡혀 있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 손목은 어디에 잡혀 있어요?
그런데 이 캄캄한 본문에서 꼭 봐야 할 게 하나 있어요. 이 모든 일들은 누구의 말씀 아래에서 일어납니까? 지난주 27절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그러니까 바로 느고가 왕을 가두고 벌금을 매기는 이 일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말씀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거예요. 바로가 마음대로 하는 것 같죠? 세상 손이 제일 센 것 같죠? 아니에요. 세상 손이 내 손목을 붙들어도 그 손까지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어요.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나가는 법이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거예요.
우리는 마지막까지 회개를 해야 되는데 맨날 애굽 편에 붙어가지고 이러면 안 되는 거예요. 어떤 세계의 지도자가 이 구속사적인 가치관을 가졌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냥 그 기득권을 위해서 항우는요 20만 명을 생매장을 시켜도 자기 권세를 위해서 사잖아요. 이 권세가 무서운 거예요.
적용 질문이에요.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열심히 하는 동안 하나님 앞에 쌓여가는 악은 없습니까?
내가 붙들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여러분 손목은 어디에 잡혀 있습니까?
여호아하스와 백성들이 얼마나 공감되세요?
구속사가 들리세요?
이렇게 설득을 해가야 되는 거예요. 그렇죠. 무조건 여기 틀렸다 맞았다 하는 게 아니고 성경에 이런 얘기가 이렇게 써져 있는데도 여러분들이 안 들리는 것, 그것이 이상해요. 어쩌면 그렇게 3일 동안 해맑게 들으면서 그렇게 모르실 수가 있어요. 그러시지 않죠? 그러니까 우리도 교회에 있다고 또 잘 들리는 것도 아니에요. 여호아하스가 안 들리잖아요.
둘째, 세상이 붙인 이름으로 삽니다
34절입니다.
바로 느고가 요시야의 아들 엘리아김을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고 그의 이름을 고쳐 여호야김이라 하고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잡아갔더니 그가 거기서 죽으니라
사실 첫째 아들인 엘리야김은 친애굽이에요. 근데 이 친애굽 엘리야김은 육신의 영달을 위한 친일파 같은 친애굽이기 때문에 깜이 안 되는 아들이에요. 엘리야김은 사실 백성이 택할 아들도 없었어요. 그나마 엘리야김이 낫다고 해야 할 지경이에요. 왜 여호아하스가 폐위됐는지 이해가 되시죠. 자기 말을 안 들으니까 패한 거예요. 엘리야김이 조금 지혜가 있었으면 후위를 도모했을 테지만 그런 것이 안 보일 정도로 강성으로 교만하게 굴다가 애굽으로 잡혀갔어요. 참으로 삶의 결론이라는 것이 이해되지 않으세요? 여호아하스는 석 달은 짧지만 긴 시간이에요. 얼마든 자기를 보일 수 있는 시간이에요.
끌어내리는 것과 세우는 것은 달라요. 끌어내리는 건 힘만 있으면 돼요. 근데 세우는 건 주인이 하는 거예요. 그 바로가 이제 다윗의 보좌에 왕을 세웁니다. 다윗의 보좌가 애굽의 인사 발령을 받는 자리가 된 거예요. 다윗의 왕을 애굽 왕이 세워요. 지금 이게 끝이 아니에요. 더 이상한 게 나와요. 이름을 고칩니다. 엘리야김을 여호야김이라고 바꿔요. 엘리야김은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뜻이에요. 여호야김은 "여호와께서 세우신다"는 뜻이고요. 사실 똑같잖아요. 바꿔서 얻는 게 없는 개명이에요. 근데 왜 바로가 이름을 바꿀까요? 이름의 뜻이 마음에 안 들어서가 아니죠. 내가 이름을 바꿀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이름은 주인이 짓는 거잖아요. 부모가 자식의 이름을 짓지, 자식이 부모 이름을 지을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이름을 짓는 자가 자기 주인이에요. 훗날 바벨론 왕도 똑같이 새 왕의 이름을 고칩니다. 애굽이든 바벨론이든 세상은 자기 종에게 자기가 지은 이름을 붙여요.
우리도 그냥 세상에 종노릇하라고 복을 기대하면서 아이들 이름을 그렇게 짓기도 해요. 이름 때문에 일이 안 되나 싶어서 또 막 개명을 해요. 그러나 사명의 이름은 다른 거예요. 우리 손녀딸이 육이오에 태어났잖아요. 그래서 육이오을 기념하여 상기로 지었어요. 서로 상, 기억할 기, 기록할 기. 뭘 기억하고 기록하느냐. 육이오의 이 나라의 고난을 서로서로 다 기억해야 된다. 믿음의 6대 손인 것을 서로서로 다 기억해야 돼. 이 외할머니의 믿음을 기억해야 되고 그리고 기록하자.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이기 때문에 큐티와 맥이 같지요. 그리고 여자 이름이니까 그렇게 지었어요. 그러니까 여자니까 다 물어봐. "네 이름은 왜 상기니?" 이럴 때 전도하는 것이죠. 그래서 구속사적으로 우리는 전도하는 이름으로 지어야 돼요.
그런데 엘리야김은 이름을 바꾸고. 그러면 끌려간 여호아하스는 어떻게 됩니까? 엘리야김도 여호아하스도 요시야 아들이 되어가지고 아무도 기도하고 회개했다는 말이 하나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결론이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잡아갔더니 그가 거기서 죽으니라." 오늘 제목이 여기 있어요. 아버지 요시야는 자기 무덤에 들어갔어요. 온 유다가 울었어요. 그런데 이 아들은요 무덤 기사조차 없어요. 조상들 곁이 아니라 애굽 땅 남의 나라에서 끝나요. 그러니 예레미야가 바로 이 왕을 두고 22장 10절에서 이렇게 말해요.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잡혀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 그는 다시 돌아와 그 고국을 보지 못할 것임이니라
여기서 죽은 자는 요시야고 잡혀간 자는 이 여호아하스예요. 슬퍼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에요. 울음을 거기서 멈추지 말라는 말씀이에요. 죽은 요시야는 자기 무덤에 들어갔지만, 천국에 입성했지만, 살아서 잡혀간 아들은 다시 고국을 보지 못한다고 하잖아요. 약속의 땅을 영원히 떠났다는 거예요. 요시야 아들로 지옥을 갔다면 이게 말이 됩니까? 우린 누구 때문에 울고 웃어야 하는지, 거꾸로 할 때가 많아요. 여러분, 여호아하스는 우리의 슬픔이에요. 자식 잘 되게 성공하려고 난리를 쳤는데 결국은 지옥 갔다. 이게 얼마나 슬퍼요. 그렇죠. 왕자가 되면 뭐해요? 왕자 교육 받고 젊은 사자가 되어서 사람을 삼켰다고 그러잖아요. 그게 바로 여호아하스를 얘기하는 거예요.
우리도 세상에 붙여진 이름표를 달고 살아요. 학벌의 이름표, 연봉의 이름표, 직급과 지위의 이름표, 사는 지역의 이름표를 붙이고 살아요. 뿐만 아니라 실패와 병명과 사연이 이름표가 되기도 해요. 세상은 부지런히 이름표를 붙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표대로 내 값이 정해지고 나는 그 이름값을 치르느라고 살아요. 등급 하나 떨어질까 봐 밤을 새우고 평판 하나 무너질까 봐 아닌 척하고 삽니다. 그런데 그 이름 누가 지었습니까? 세상이 지은 이름을 내 정체로 받아들이고 사는 것, 그게 종의 방식이에요. 종은 주인이 부르는 대로 불리는 거예요.
아까 목사님은 정치적으로 뭘 모르신다는 분의 계속된 나눔이에요. 지난주 전체 계열사 컨설팅을 했어요. 제가 같이 가는 워크숍을 갔다. 컨설팅 회사가 일을 너무 못해 씩씩하고 있었는데 컨설팅 사람이 인사하러 왔다. 약간 막무가내로 별 생각 없이 요구를 했다. 좀 있다가 직함을 보니 이사였다. 그걸 보고 움찔했다. 그리고 움찔한 게 또 수치스러웠다. 이사다 아니다 마음대로 판단한 것도 수치스러웠는데 움찔한 게 더 부끄러웠다. 뭐 그렇게 잘났다고 사람을 보자마자 무시하고 골라가면서 내 위아래 분류하고 있나 생각이 들어 수치스러웠다. 이분은 목사인 저도, 자기 자신도 참 판단을 잘하시네요. 이런 남자분들이 많지요. 여호아하스가 의리가 많았어요. 이걸 "여호아하스 증후군"이라고 이름을 좀 붙여드릴까요? 그런데 이런 얘기를 사실 이렇게 솔직하게 나누시는 것이 증후군에서 자유를 받는 비결이죠. 그럼 죄가 힘을 잃게 돼요. 그런데 말 안 하고 죄를 자꾸 쌓아놓으면 독이 되고 중독이 되는 거예요. 나중에는 치료할 길이 없어요. 목장에서 이렇게 나누는 것이 최고 치료예요.
그런데 오늘 큐티 본문에서 뭐라고 해요? 신명기 14장 1-2절에서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이 있어요. 자녀, 성민, 자기 기업의 백성. 그런데 하나님이 부르시는 이름은 성경 안에만 두고 실제 우리의 하루는 세상이 붙인 이름에 그냥 계속 끌려가는 거예요.
여기서 잘 보세요. 바로는 자기 권세를 보여주려고 이름까지 고쳤어요. 그런데 그가 새로 붙인 여호야김의 뜻은 "여호와께서 세우신다"라고 했어요. 바로는 "내가 이 왕을 세웠다"고 과시했는데 그가 붙인 이름은 오히려 "여호와께서 세우신다"고 지금 말하잖아요. 그러니까 일제도 창씨개명을 하게 했죠. 일제도, 바로도 아무리 이름을 고쳐도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이름은 고치지 못하는 줄 믿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믿고 가면 하나님이 다 해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짜 이게 감사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적용 질문이에요.
세상이 내게 붙인 이름표 가운데 어느새 내 정체가 되어버린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그 이름값을 치르느라 무엇을 하며, 무엇을 잃고 있습니까?
우리는 똑같은 거예요. 우리 값 주고 사신 모든 지체인 거예요. 목장에서 그걸 연습하셔야 돼요. 사장님도 있고 사원도 있고 같이 나누고. 아, 지금 이게 교회도 다 끼리끼리 로터리 클럽처럼 그러시면 안 되는 거예요. 지금 나라가 망해가는데 회개를 해야지 내가 끼리끼리 모이는 데 가고 싶다 이러시면 안 되는 거예요.
셋째, 나도 감독자로 삽니다
35절입니다.
여호야김이 은과 금을 바로에게 주니라 그가 바로 느고의 명령대로 그에게 그 돈을 주기 위하여 나라에 부과하되 백성들 각 사람의 힘대로 액수를 정하고 은금을 징수하였더라
33절과 34절의 주어는 바로예요. 바로가 가두고, 바로가 벌금을 매기고, 바로가 왕을 세우고, 바로가 이름을 고칩니다. 근데 35절은요 여호야김이에요. 다윗의 자손이 다시 무대에 등장합니다. 근데 무엇으로 등장하나요? 바로에게 바칠 돈을 걷는 징수원으로 등장합니다. 이 "징수하였더라"는 그냥 세금을 걷는 말이 아니에요. 몰아붙여서 짜내는 말이에요. 성경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몰아붙여서 짜내던 자들을 똑같은 말로 "감독자"(נֹגְשִׂים, nōgəśîm)라고 부릅니다. 출애굽기 3장 7절에 "여호와가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이게 똑같은 말이에요. 하나님이 감독자 밑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건져내신 백성이에요. 근데 지금 어떻게 됐습니까? 유월절을 지킨 지 불과 13년 만에 다윗의 자손이 자기 백성에게 애굽 감독자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각 사람의 힘대로, 그러니까 전 국민을 짜낸 거예요. 바로는 저 멀리 애굽에 있어요. 백성이 날마다 마주친 것은 바로가 아니라 액수를 정하고 독촉하는 자기 왕이었어요.
여러분, 이게 종살이의 끝이에요. 종은 당하는 데서 끝나지 않아요. 꼭 당한 대로 갚아줍니다. 회사에서 짜내주면 집에 와서 짜냅니다. 위에서 눌리면 아래를 누릅니다. 세상이 나에게 내민 고지서를 나는 가족에게 내밀어요. 밖에서는 종처럼 살고 집에 와서는 바로처럼 살아요. 이걸 이해를 해야 되는 거예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기대할 곳이 없어요. 그래서 믿는 사람은 기도를 하고 회개를 해야 돼요. 제일 사랑한다는 사람들에게 제일 애굽처럼 굽니다. 제가 하늘이 열려서 저의 추함을 보지 못했다면 저도 당한 만큼 한 시집살이를 시켰을 사람이에요. 아는 게 그거밖에 없으니까. 13년을 시집살이를 했는데 정말 은혜가 많아요. 지금 동의서에서 먼 것처럼 생각도 나지 않아요.
금요일 큐티 본문에서 하나님이 정확히 이것을 경고하셨어요. 신명기 12장 30절에 "나도 그와 같이 하겠다 하지 말라." 우리는 세상 방식이 이기는 것 같으니까 그런 걸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돼요. 버릇을 고쳐야 돼요. 나도 그와 같이 살 때가 많아요. 이기고 싶어요. 이것이 뭐예요? 아주 단순한 방식대로 다 따라가는 거예요. 성공적이 뭐하면 다 따라가요. 짜내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나도 남을 짜냅니다. 애굽을 이기는 길은 애굽처럼 되는 것이라고 아주 믿어버려요. 그게 종처럼 사는 방식이에요.
그럼 이 종살이를 누가 끊습니까? 유다는 은과 금을 거둬 바로에게 주었어요. 돈을 냈으니 자유로워졌습니까? 아니죠. 돈을 내고도 여전히 바로의 종이잖아요. 그렇죠. 제가 그냥 시댁의 아주머니에게 돈을 주었죠. 돈을 주니 자유로워졌나요? 시댁이 이르겠다고 하니까 더욱 아주머니의 종이 되었죠. 종이 주인에게 바치는 돈은 몸값이 아니죠. 종살이의 증거예요. 매인 자는 자기 몸값을 낼 수가 없어요.
그런데 누가복음 9장 30절에 보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이 별세하실 것을 말하잖아요. 그런데 이 별세(ἔξοδος, éxodos)가 그냥 돌아가신다는 말이 아니고 엑소더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떠난 그 일, 출애굽됐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그 출애굽을 이루셨죠. 그런데 그 출애굽으로 나온 백성이 오늘 본문에서 거꾸로 다시 돌아가잖아요. 그렇죠. 왕이 애굽으로 끌려가고 나라가 애굽 밑에 조아리고 열왕기하 끝에 가면 남은 자들마저 다 애굽으로 내려가고 나라. 그런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이루신 엑소더스는 절대로 거꾸로 감기지 않아요. 왜 거꾸로 감기지 않아요? 값이 다르기 때문이에요. 바로는 백성에게 각 사람의 힘대로 값을 내게 했어요.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요. 우리를 짜내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자기 몸을 우리 죄값으로 내어주셨어요. 요한복음 8장 34절부터입니다.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아멘.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어. 그래서 우리가 참으로 자유로운 줄 믿습니다.
적용 질문이에요.
세상에서 눌린 것을 나는 누구에게 풀고 있습니까?
나는 가족과 지체에게 어떤 액수를 정해놓고 내놓으라고 독촉합니까? 성적입니까, 돈입니까, 인정입니까, 순종입니까?
이번 주 내가 짜내온 그 사람에게 무엇을 돌려주겠습니까? 사과입니까, 시간입니까, 회복입니까?
저는 항상 구체적으로 이렇게 좀 해보셔야 돼요. 부목자의 나눔인데요. 이 재혼 과정에 이제 유어 베이비 아워 베이비 때문에 너무 힘들어가지고 아워 베이비를 놓고 이제 엄마가 자살 시도를 했어요. 그리고 이제 그 딸에게 그냥 엄청 욕을 듣는 거예요. 학교도 안 가고 가출하고 자기도 죽는다고. 맨날 새벽 4, 5시에 들어오고. 저는 그걸 딸한테 당한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이 죄값을 치르는 거라고 말을 해줘서 이제 올소에다가 되었어요. 제가 정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딸에게 준 거잖아요. 그러면 딸이 때려도 맞고 그 시간을 보내는 게 맞았어요. 지금도 엄마를 보면 아이들이 불안할 수 있어요. 그냥 부목자에서 다른 분에게 이렇게. 그렇게 조언을 하시더라고요. 집사님도 말씀을 들으면서 묵상하시고 아내가 힘들어하는 거 보면서 다 받아내셔야 돼요. 죄값을 치르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셔야 해요. 그게 언제까지가 될지 몰라요. 그 시기는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하나님만이 아세요. 요즘엔 딸이 좀 좋아진 것 같은데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요. 언제 또다시 방황할지 그것도 불안해요. 그것도 제가 감수하고 가야 해요. 제가 죄인이기 때문이에요. 집사님도 그 죄값을 잘 치르고 가셔야 해요.
이 가정은 외적으로 완벽한 가정이에요. 그런데 이 재혼 후에 아이들 때문에 바람잘날이 없어요. 유어 베이비와 아워 베이비가 같이 사는데 친엄마가 있으니까 유어 베이비는 야단을 치면 그냥 믿지 않는 엄마에게 싹 가버리는 거예요. 그동안 양육한 거 다. 그걸 보는 아워 베이비도 따라서 힘들죠. 오죽하면 엄마가 자기 딸 때문에 자살 시도를 했겠어요. 그런데 마이 베이비, 유어 베이비, 아워 베이비 가정의 재혼은 어떨까요? 그렇게 서로 아껴하고. 그래서 어떤 경우도 가정은 지키셔야 되는 거예요. 자녀들 때문에 지금 바람잘날이 없는 거예요. 그렇다고 또 자녀가 없는 가정은 어떻게 될까요? 자녀가 없는 가정은 또 부부가 철이 안 들어요. 자녀가 있어야 철이 들어요.
그 남편에게, 아내가 외도해서 이혼을 하셨잖아요. 그런데 그 아내의 외도가 힘이 들어요. 지금 아내의 자살 기도가 힘들어요. 물어보니까 그때로 돌아가면 당연히 이혼을 안 하겠지만 그래도 그 외도한 아내를 사랑하기는 힘들 것 같아요. 그러셔서. 바로 그게 답이네요. 완벽한 가정이지만 아빠가 이렇게 너무 정답가이기 때문에 편하지가 않아서 사랑이 느껴지지 않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어떻게 자살보다 외도가 더 힘들 수가 있어요. 그렇죠? 편하셔야 되고 사랑이 느껴져야 돼요. 정답가가 사람을 질리게 하는 게 있어요. 이것이 애굽으로 잡혀가지 않는 비결이에요.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면 어떤 경우도 토를 달지 않게 돼요. 그러면 저절로 망가지는 거예요. 제가 상식이 있으니까 늘 제가 네네네를 잘했잖아요. 그런데 죄가 없으니까 저에게 사랑이 하나도 없었어요. 죄가 없는 사람의 네네네는 느껴지는 게 있어요. 그러니까 사람이 고난으로는 변하지 않아요. 거기서 내 죄를 처절하게 봐야 토달지 않는 주님의 사랑이 조금은 나오게 되는 거예요. 고난이 축복이다? 아유 어떻게 고난이 축복이겠어요. 고난 통해서 내 죄를 봐야지.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봐야 되는 거예요.
애굽으로 잡아갔더니, 세상의 손에 붙들려 살게 되는 거예요. 여호아하스가 세상을 너무 좋아하니까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세상의 손에 붙들려 살게 되는 거죠. 그리고 세상이 붙인 이름으로 너무 좋아하면서 살아요. 사장이다 어디 산다 학벌이 뭐다 그냥 이게 너무 좋아서 거기서 완전히 묶여버렸어요. 그리고 그냥 이 세상을 짜내고 살아요. 자기가 그거를 유지해야 되니까. 우리가 참으로 이제 한 병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밑동 잘린 나무처럼 때가 저물어서 날이 어두운데 내 친구가 나를 위로 못하고 내 사는 날이 속히 지나고. 근데 이 모든 시험을 주님 홀로 마귀를 물리쳐 주신다 그랬는데. 이 육신이 쇠해서 눈을 감을 때가 있다는 걸 아셔요. 주님만이 내 모든 슬픔을 위로하시고. 그걸 우리가 찬양을 하고 고백을 해야 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