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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23:21-27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김양재조회 202
🌱 함께 만든 분들: 성경구절 자동교정, 원어 병기 자동

열왕기하 23:21-27

21 왕이 뭇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22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23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24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26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2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택한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살면서 기가 막히고 그중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일은 각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임했는데도 떨어지는 일일 거예요.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할 만큼 했는데 왜 떨어졌어. 너무너무 억울하죠. 근데 오늘 본문에 요시야가 그래요. 전에도 후에도 없었다고 평가받은 왕이에요. 전무후무한 회개를 했어요. 그런데 요시야는요, 바로 그 최고의 평가 다음에 첫 마디가 "그러나"예요.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오늘 제목이에요. 우리가 기도해도 안 되는 게 있네요. 요시야는 이렇게까지 돌이켰는데 하나님은 왜 진노를 돌이키지 않으셨을까요? 오늘 우리의 질문인데요. 오늘 요시야를 통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이 "그대로"를 견디게 하는 세 가지 "그래도"를 알려주십니다. "그대로"를 견디게 하는 세 가지의 "그래도"를 알려주세요. 돌이켰는데도 그대로일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첫째, 그래도 예배합니다.

21절이에요.

왕이 뭇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바로 앞에서 요시야는 계속 부수고 태우고 빻았잖아요. 그런데 요시야가 마지막으로 내린 명령은 "더 부수라"가 아니었어요. 예배가 회복되고 말씀으로 돌아가면 유월절을 지키라고 했잖아요. 그 질긴 산당들을 다 제거한 왕이 온 백성을 모아놓고 지금 어린 양을 잡는 거예요. 이 명령을 누구에게 내립니까? 뭇 백성이에요. 앞에서 우상을 내다 불사르는 명령은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에게 내렸어요. 그런데 유월절 지키는 일에는 온 백성을 부릅니다. 유월절이 어떤 절기죠? 한자리에 모여서 어린 양을 같이 먹는 절기잖아요. 이건 혼밥하는 게 아니에요. 구원은 혼자 받아서 혼자 간직하잖아요,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같이 모여서 먹고 나누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산당 예배는 기복신앙인데 이 산당을 제거해야 공동체에서 같이 누릴 수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공동체에서 누리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열등감이 있거나 교만하거나 둘 중에 하나예요. 그 사람을 못 누려요.

유월절을 어떻게 지키라고 합니까?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언약책. 지금까지 율법으로 지켰다면 이제는 언약으로 지키라는 거예요. 언약책대로. 그러니까 자기 마음대로 예배를 바꾼 산당 제사와 정반대인 거예요.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기록된 대로입니다. 말씀을 내 형편에 맞추는 게 아니라 나를 말씀에 맞추어서 지키라는 거예요.

그러면 유월절은요? 유월절이 뭡니까? 심판이 넘어간 날이에요. 하나님이 애굽에 마지막 재앙을 내리시던 밤에 어린 양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어떻게 하셨죠? 넘어가셨어요. 유월 하셨어요. 그들의 행위를 보신 게 아니에요. 문설주에 발린 피를 보셨어요. 그리고 그 집을 넘어가셨어요. 그런데 그 집이라고 죽음이 없었던 게 아니에요. 그 집에도 죽음이 있었어요. 어린 양이 대신 죽은 거예요. 유월절은 우리가 잘해서 살았다가 아니라 어린 양의 피로 살았다는 구원의 기억입니다. 그런데 이 기가 막힌 유월절이 그동안 어떻게 되었나요? 22절, 23절이에요.

22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23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요시야가 산당을 부수러 북이스라엘 벧엘까지 갔었잖아요.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어요. 그 돌아온 길의 종점이 바로 여기에요.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산당을 다 제거하러 나갔던 길이 예배 앞에서 끝난 거예요. 우리의 목적의 끝은 예루살렘입니다. 진정한 예배 앞에서 끝났어요.

사사시대부터 요시야 때까지 오랜 세월이 흘렀어요. 모세오경에서 그렇게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였어도 여호수아 5장 10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킨 이후로는 유월절을 지켰다는 기록이 없어요. 사사시대는 물론이고 다윗과 솔로몬 때도 유월절을 지켰다는 이야기가 없어요. 이스라엘이 둘로 갈라진 이후에 수백 년 동안 남유다나 북이스라엘이나 왕이나 백성이나 죄다 유월절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에요.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하고 난 후 히스기야가 역대하 30장에 보면 유월절을 지켰어요. 그런데 그때 처음 지키니까 금송아지 섬기던 북이스라엘이 막 조롱을 했어요. 그래서 남은 자 몇 명이 참여하고, 조롱하고, 그러다가 조금씩 참여하느라고 시간이 걸려서 성결하게 한 제사장이 부족하고 백성도 예루살렘에 모이기가 힘드니까 날짜도 바꿔가면서 지켰어요. 모이기가 어려우니까 정월에 지켜야 되는데 둘째 달에 지켰다고 그랬죠. 그러니까 굉장히 불완전한 유월절을 히스기야가 한번 지켜놨어요. 그리고 이제 드디어 요시야가 제대로 남북왕국 역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 유월절을 아주 거대하게 지킵니다. 지키고 망합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와 요시야는 남북 왕들 중에서 유일하게 지역감정을 타파한 왕이에요. 이 둘이 망한 북쪽까지 찾아갔잖아요. 복음 전하는 자들은 이렇게 지역감정, 개인감정, 나라의 감정을 모두 타파해서 전해야 하는 거예요. 선지자들이 "바벨론에게 우리가 잡혀갈 거잖아요, 그래도 바벨론에게 대항하라, 앗수르에게 대항하라" 그렇게 외치기보다 "우리 훈련을 위해 붙이신 이방인인데, 가서 순종하고 복종하고 살라" 그랬잖아요. 바벨론에. 근데 하물며 같은 민족인 우리 형제 민족을 이렇게 지역감정으로 진영논리로 그냥 눈만 뜨면 상대방을 타도하자를 외치면 되겠습니까? 이거는 정말 교회에서도 잘 안 바뀌는 문제 같아요. 제가 대구, 광주에 교회까지 세웠는데 여러분 어떻게 그렇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게 남북 이스라엘이 아무도 안 되는 것처럼 내 속에 악을 짓는다. 그들은 불쌍히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지는 것이 응답이기 때문에 믿는 우리는 늘 구원을 위해서 생각하고 적용하고 기도해야 되는 것이지 누가 옳고 그름이 아니에요. 성경에는 가장 악한 므낫세도 구원을 받았단 말이에요. 이렇게 성전이 나를 수리해 가면 나도 우리도 조금씩 치료가 되어 가는데, 백성들이 요시야가 사는 날에 복종하고 떠나지 않았다고 하기는 해요. 요시야가 사는 날만 그러면 되겠어요? 그런데 성경은 요시야처럼 이렇게 지킨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하는 전무후무한 유월절이라고 했어요. 예배를 드리는 것과 이렇게 기록된 대로 여호와 앞에 드리는 것은 다른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이 지금 언약이 됐어요. 전능의 하나님이 십자가의 하나님이 됐어요. 이게 유월절의 의미예요.

역대하 35장에 보면, 열왕기하는 그냥 한 절을 쓱 지나갔어요, 그런데 역대하 35장은 한 장 전체로 유월절을 구체적으로 기록했어요. 이렇게 공동체가 하나가 되어 남북이 하나가 되어 절기를 지키게 되었는데, 제일 중요한 언어가 쭉 나오면서 "스스로 성결하게 하고." 그러니까 늘 거룩이잖아요. 인생의 목적이 거룩이. 스스로 성결하게 하고. 그리고 시작되는 유월절 제물을 갖다 바치는데, 35장 7절에 보면 요시야가 그 모든 일을 위하여 백성들에게 먼저 자기의 소유 양 떼 중에서 어린 양과 염소 3만 마리와 수소 3천 마리를 유월절 제물로 주고. 그리고 방백들도 즐거이 희생을 드리고 백성과 제사장에게도 주었고. 쭉 이걸 보니까 헌금은 정말 신앙 고백이 맞고요. 요시야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끝에 돈이 있다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요시야가 먼저 자기의 이 어마어마한 제물을 내놨어요. 다들 즐거워하면서 희생을 드리니까 다 따라 하는 거예요. 여러분, 지도자가 본을 보여야 다들 즐거이 따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요시야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라요.

우리의 위정자가, 목사가, 부모가 돈이 나의 목자가 되시면 밑에 백성과 자녀도 다 똑같이 돈이 나의 목자가 되어서 가는 거죠. 이렇게 본을 보여야 그래도 따라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 예배 안 드리시는 거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드리고 계신가요? "남편 좀 낫게 해줘요. 우리 애 붙게 해줘요. 살 풀리게 해줘요." 이런 제목만 들고 나오는 예배 말고, 나를 구원하신 어린 양의 피 때문에 예배한 적 있으세요? 있으시겠죠. 그러니까 내 자녀 때문이 아니라 남의 자녀 위해서 예배드리다 보면 요시야가 지금 백성들 위해서 다 내놨잖아요. 항상 이렇게 보면 지도자가 그래서 남의 자녀 위해서 가다 보니까 오늘날 이 TT라는 성경적 여행도 이게 자발적이 아니면 될 일이 아니에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먼저 자기 제물로 모든 일을 위하여 내놓으시니까 모두가 자발적으로 동참하게 되었어요. 특히 유월절이 뭐예요?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을 다음 세대에 가르치도록 주신 절기이기도 합니다. 자녀가 물어보면 들려주라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죄만 물려주는 게 아니에요. 이제부터 구원의 이야기도 물려줄 수 있어야 돼요. 그런데 우리가 TT 가서 다 구원의 이야기를 물려주고 와요. 다 가서 각자 간증으로, 진짜 바이블 간증. 우리들교회가 앞으로 바이블 간증의 의거가 될 건데 그 얘기를 이렇게 이게 다음 세대에 살리는 거예요. 어린 양의 피로 우리 집을 구원하셨다는 이야기를 자녀에게 들려주는 거예요. TT가 온 가족이 가니까 아빠가 하는 얘기를 아이들이 듣고, 아이들이 하는 얘기를 엄마가 듣고, 이게 가장 중요한 유산이에요. TT는 여러분 평생에 가장 최고의 추억의, 이 구원의 여행이 될 것이에요.

요시야 유월절 예배가 어떤 상황에서 드려졌는지 생각해 봐야 돼요. 요시야는 나라에 재앙이 임한다는 말씀을 이미 들었어요.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는 기가 막히는 약속을 받았어요. 전혀 약속 같지 않은 약속이죠. 그런데도 유월절을 지키는 거예요. 그래도 예배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을 오해하시면 안 돼요. "그래도 예배 드리다 보면 언젠가는 바뀐다." 이런 말이 아니에요. 물론 초신자들이 그럴 수 있죠. 방향이 완전히 반대예요. "내가 원하는 때와 방식대로 바뀌지 않아도 나는 예배한다." 왜죠? 여러분, "그대로"라는 말이 너무 마음 아프잖아요. 기도했는데 그대로예요. 남편도 그대로, 자녀도 그대로, 재산도 그대로, 물질도 그대로. 다 그대로예요. 그런데 그대로인 게 하나 더 있어요. 어린 양의 피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그대로 있어요. 똑같이 있어요.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치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청소년 큐페에 역대로 1800명이 와서, 제 손녀딸도 고3인데 갔다 와가지고 너무 은혜받았다고 오면서 우리 집에 들렸어요. 얼마나 감사해요. 그렇죠? 대부분은 그래요. 더운데 거기까지 가죠. 그러나 또 은혜받지 않는 애들도 꼭 있죠. 은혜는 받지 않고 피해자, 가해자가 되어서 싸운 아이도 있어요. 그런데 가해자 부모도, 피해자 부모도 아이들을 감당을 못하는 거예요. 부모님들이 너무나 다 대단한 리더십을 가지셨는데 얼마나 그동안 수고 많이 하셨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대로인 거예요. 그 가해자 아이들을 가만두고 싶어서 가만두겠어요? 감당이 안 되는 거라고. 이런 아이들이 있어요. 또 학교에서 친구가 없어서 자퇴하겠다는 아이도 있어요. 옛날에는 정말 이런 거 어림도 없는데 수 틀리면 학교 안 가는 거예요.

그러면 어떡합니까? 갔다 온 선생님 중에 한 분은 이분도 목자님인데 지난번 중등부 큐페에 갔다가 아이들을 보니까 일정을 다 참여하기도 싫어하고 찬양도 안 하고 말씀도 들을 때는 자고 기도할 때는 떠드는 학생들에게 너무 화가 났다고, 교사로 갔는데 그 생기 없던 녀석들이 밤에 들어가서는 핸드폰 게임하고 떠들면서 잠도 안 자더니 기어코 나가서 폭행 사건을 일으켜 경찰까지 온 일이 있었다고. 본인은 현재 고등학교 교사고 학교에서는 내 말 한마디면 애들이 다 무서워하고 잘 따르는데 도대체가 먹히지가 않는 이 녀석들을 다 때려주고 싶었고, 자기 방 학생들이 돌아다니다가 사건이 생겨 경찰까지 왔는데 편안히 자는 청년 선생님, 큐페에 안 온 다른 선생님들까지도 정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중등부 교사회의에서 딸아이 담임 선생님의 나눔을 들었는데 그분도 큐페 기간 동안에 저와 똑같이 아이들에게 시달리며 중등부 교사를 그만두고 싶은 심정이었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제 딸도 자기 담임 선생님을 저렇게 괴롭히고 있었고 '저 선생님의 헌신과 희생으로 제 딸이 큐페를 잘 다녀왔구나' 싶은 생각이 드니 회개가 되었어요. 학교에서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고 교회에서도 그러고 있는 중등부 교사님과의 관계를 판단하고 있던 저의 모습이 바로 산당이고, 이 산당의 뿌리까지 뽑아내기 위해 말씀 듣고 예배드리는 것을 집중하겠습니다.

여러분, 그런데도 청소년 큐페에 이렇게 2천 명 가깝게 온 것은 이 중2병 아이들에게 기적 아니겠어요? 그렇죠? 중2병을 누가 치려요? 애들만 그런 게 아니고 어른도 우리들교회 오시면 말씀이 안 들려서 화를 내고, 여전히 목장이 안 들어오고. 어른들도 그렇게 안 들려서 목장이 안 들어오고, 얘네들도 큐페에 가서 안 들어가고, 뭐 게임하러 수련회 가서 게임하니 얼마나 예뻐요. 그러니까 욕을 해도 목장에 와서 욕을 하라고 좀 그래주세요. 많은 분들이 애고 어른이고 그 속사정이 이해가 안 돼요. 남을 위해서 참아라 이런 얘기 듣고 있어요. 듣기 싫어요. 내가 내 능력으로 성공해서 나만 살면 되지, 왜 내가 목장 가서 시시껄렁한 얘기를 듣냐. 이게 주제잖아요. 그 속사정이 이해가 안 돼요. 여러분. 요시야가 얼마나 힘든 길을 걸었는지 몰라요. 그런데도 이렇게 많이 모였다는 것 자체가 이 시대에 다음 세대를 위해서 하나님이 대안으로 주신 거 아닌가. 요시야가 죽은 이후에는 다른 세대가 되었을 때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6.25 후에 못 살던 시대를 경험한 저는 진짜 못 사니까 불길이 이렇게 기독교가 일어났어요. 기독교 명문이 많았잖아요. 그렇죠? 진짜 그거는 우리나라에 너무너무 아름다운 이야기 아니에요? 이화, 배재, 대광고등학교, 기독교 선교사들이 이렇게 학교 세워주고.

그런데 다음 세대가 다른 세대가 돼요. 종교의 자유를 지금 부르짖는 거예요. 그리고 선생님들이 거꾸로 지금 그런 행동을 하는 거예요. 어떤 중학교 2학년 학생이 나눔을 했어요. 학교에서 가정 선생님이, "결혼은 없어질 거다. 평균 수명이 120세 정도 되면 너희는 한 사람이랑만 100년 넘게 살 수 있겠니? 끊임없이 이혼과 재혼이 반복될 게 분명한데, 그러니까 너희들은 결혼하지 말라." 이렇게 가르쳤다는 거예요. "교회에서 깨달은 것과 너무 달라 혼란스러운데 저는 꼭 결혼해서 자녀까지 낳고 싶은데요. 학교에서 이야기 듣고 수긍하는 친구들과, 수업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선생님을 보고 가치관이 충돌이 돼서 제가 혼란스러워요. 도와주세요, 목사님." 그러니까 목장에서 나눠도 잘 모르겠는 거야. 애들이. 학교에서 자꾸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그러니까 강의석 같은 선생님이 있잖아요. 예전에는 너무 대단하게 보였는데 이게 아무렇지도 않게. 요즘 없는 이야기들을 강의석이 했는데, 진짜 가난이 가장 좋은 교육이라는 말이 맞아요.

유월절 밤에 이스라엘이 왜 살았다고요? 그들이 착하고 잘해서 산 게 아니죠. 어린 양 피 때문에 심판이 그 집을 넘어간 거예요. 우리도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았어요. 내 나라가 그대로여도, 배우자가 그대로여도, 자녀가 그대로여도, 내 사건이 그대로여도, 그리스도의 보혈은 변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도 그래도 예배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적용 질문이에요.

  • "오늘은 예배 좀 쉬자" 할 때는 없습니까?

  • 내가 드리는 예배는 기록된 대로입니까, 편한 대로입니까?

  • 자녀가 "교회는 왜 가야 해?" 하고 물으면 나는 무엇을 말해줄 수 있습니까?

둘째, 그래도 말씀대로 삽니다

내가 이렇게 돌이켰는데도 상황이 그대로예요. 그래도 두 번째는 말씀대로 사는 거예요. 24절입니다.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요시야가 유월절로 끝나지 않았어요. 예배를 회복한 왕이 이제 삶의 구석구석을 마저 정리합니다. 신접한 자, 점쟁이, 드라빔, 우상, 모든 가증한 것. 그런데 이 목록 어디서 본 목록이잖아요. 할아버지 므낫세가 했던 일이에요.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열왕기하 20장 6절. 인간은요, 눈앞에서 당장 금송아지가 번쩍번쩍한 것을 너무나 보고 싶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우상을 보고 절하지, 우상 듣고 절한다는 소리는 없잖아요. 우상 보고 절하지 우상 듣고 절하지 않아요. 신명기에도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은 들으라 하는 거예요. 생각을 해야 돼요. 하나님께 듣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의 세움도 사람과의 대화도 듣지 못해요. 대화가 안 돼요. 그러니 므낫세 할아버지가 세운 것을 손자 요시야가 하나씩 지우고 있는 거예요.

왜 제거합니까? 본문이 그 이유를 딱 하나만 말해요.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요시야가 언약을 세우며 백성 앞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우리가 입으로 세운 그 언약, 그 언약이 오늘 몸이 되고 그 결심이 삶이 되는 거예요. 내가 늘 큐티한 대로 나중에 이루어진다 그러잖아요. 그냥 툭 던지는 말이 나도 모르는데 그냥 뒷날에 보면 다 이루어져 있더라. 입으로 세운 언약, 결심이 몸이 되고 삶이 되는 거예요. 큐티하는 교회를 만들려고 이렇게 우리가 지금 서 있어요. 프런트라인에.

요시야는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들을 하나씩 정리했어요. 개혁을 완수했어요. 그래서 성경은 이를 뭐라고 평가하나요? 25절이에요.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성경이 왕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평가를 했어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 전무후무한 회개를 했다. 그런데 여기 놀라운 게 하나 숨어 있어요. 언약을 세울 때는 요시야가 어떻게 지키겠다고 했어요? 23장 3절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께 순종하겠다"고 했어요. 마음과 뜻, 둘이. 그런데 오늘 요시야의 마지막 평가는,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하나가 더 늘었어요. 언약을 세울 때 없던 "힘"이라는 말이 마지막 요시야 평가에 들어간 거예요.

이 말은 어디서 왔을까요? 신명기 6장 5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사랑의 계명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이 요시야에게 준 최고의 평가는 일을 많이 했다가 아니에요. 힘을 다해 사랑했다는 거예요.

이번에 우리 큐티인 8월호 표지에 "One Road, All Hearts." 기억도 안 나요? 표지에 그렇게 딱 영어로 나왔어요. 역대하는 그 힘이 어떻게 나갔는지도 보여줬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내가 마음과 뜻을 다하면 결국은 내 돈이 나가고 힘이 나가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요시야가 자기 소유를 지금 다 내놨잖아요. 그렇죠? 지도자가 안 내놓으면 누가 내놓겠어요. 많고 적고를 떠나서. 사람이 이렇게 흔적이 남아요. 모든 세상의 전쟁 끝에 돈이 있다 그랬어요. 이혼도 돈, 모든 게 자녀 부모 간에도 돈. 돈 때문에 전쟁이에요. 그러니까 돈이 나가고 시간이 나가고 손과 발이 나가요.

그럼 우리 어떻습니까? 마음과 뜻까지는 가요. 은혜도 받고 결심도 하고 눈물도 흘려요. 거기까지 하고 힘은 안 나가요. 우리는 TT 가는데 시간이 아깝고 돈도 아깝고, 그다음에 손과 발로 운전하는 것도 다 아까워요.

여러분, 힘은 거짓말을 못해요. 내가 사랑하는 대로 내 힘이 나가게 되어 있어요. 내 물질이 어디로 나갔는지, 내 일주일이 어디로 나갔는지 다 보이게 되어 있어요. 내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게 어디인가. 여러분의 돌이킴은 어디서 멈춰있습니까?

그런데 요시야가 이 순종을 어떤 자리에서 했는지 잊으면 안 됩니다. 나라의 결론이 재앙이라는 확정 판결을 받은 후에요. 요시야는 그대로 힘을 다해 순종한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결과가 보여야 힘을 내는 거예요. 그건 순종이 아니라 거래에요. 요시야는 주든지 안 주든지 말씀대로 살았어요. 그래도 말씀대로 살았어요. 내 자식이 잘되면 좋은 거고, 안되면 예배 안 드리고. 요시야를 여기까지 데려온 게 뭐였습니까? 성전에서 발견된 책이었잖아요. 그 말씀이 부수게 했고 예배하게 했고 이제 삶으로 순종하게 했어요. 말씀은 우리를 결심해서 멈추게 두지 않아요. 반드시 삶으로 데려갑니다. 그래서 우리도 사람도 사건이 그대로여도 그래도 말씀대로 살 수 있는 거예요.

적용 질문이에요.

  • 내 신앙이 마음과 뜻에서 멈추고 힘까지 가지 못한 자리는 어디입니까? 시간입니까, 돈입니까, 손과 발입니까?

  • 말씀 앞에서 결단해 놓고 아직 순종하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 보이는 건 정리했는데 아무도 모르는 자리에 남겨둔 건 무엇입니까?

한 목자님이 나눔을 하셨어요. 보통 여자들이 쇼핑 중독인데 이분은 남자가 쇼핑 중독. 그래서 과거에 아내랑 한창 싸울 때 신발, 옷 사뒀던 거 절반 이상을 다 버리라고 해서 버렸는데 어느 순간 보면 다시 또 신발장에 저의 신발들이 절반 이상이 되었습니다. 아니, 남자가 신발을 사면 얼마나 샀어요, 이렇게 절반 이상을. 그 예전 습관이 또 살아나고 있어요. 그렇지만 저는 항상 중고를 사거나 엄청 할인된 곳, 원 플러스 원, 뭐 이런 걸 사기 때문에 낭비는 아니라고 합리화하지만 그 빈도가 너무 많으니까 과거의 습관이 다시 죄로 살아난 것 같아요.

그런데 이분이 목자니까 자기를 좀 직면합니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 많은 옷과 신발을 사고 꾸민 것은 단순한 쇼핑 욕구가 아니라 결국은 제 주변의 여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의도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자는 남자 때문에 쇼핑을 하고 남자는 여자 때문에 쇼핑을 한다, 이거죠. 쇼핑만 하겠어요? 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서. 그러니까 정리해도 정리해도 정리 안 되는 힘이 이렇게 남아있는 거고, 우리가 아무도 모르는 자리에 남겨둔 게 있는 거죠. 쇼핑 중독이라기보다 여자를 좋아하는 마음이 남아있는 거죠. 여자를 좋아하는 마음이 진짜 바람으로 나갈 수도 있는데, 쇼핑 중독으로 나갈 수도 있고. 근원을 살폈어요, 이분이. 목자님이니까 그래도 이런 나눔을 하는 거예요.

셋째, 그래도 하나님이 옳으십니다

돌이켰는데도 그대로일 때 세 번째는 그래도 하나님이 옳으십니다. 26절에요.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방금 25절에서 뭐라고 했어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 전무후무한 회개를 했다는 거예요.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대요. 여러분, 요시야는 돌이켰어요. 하나님은 돌이키지 아니하셨어요. 이게 "돌이키다"가 슈브(שׁוּב, šûb)예요. 같은 말인데, 우리 인간이 회개를 했는데 하나님이 돌이키지 않으셨어요.

하나님이 오늘 갑자기 정하신 게 아니에요. 요시야가 들었잖아요. 22장 17절에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 이미 하신 말씀 그대로 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위로의 말씀만 하시는 게 절대로 아니에요. 성경은, 교회 가서 위로의 말만 그렇게 듣기 원하시면 안 돼요. 경고의 말씀도 똑같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럼 왜입니까? 본문이 이유를 알려줘요.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이게 므낫세 때문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우리 마음이 면죄부를 받았어. "거봐, 나 때문이 아니래잖아. 아버지 때문이야, 엄마 때문이야, 시어머니 시아버지 때문이야, 남편 때문이야, 아내 때문이야, 자식 때문이야, 그 사람 때문이야." 살면서 우리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본문은 분명히 므낫세 때문이라고 하네요.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그 말 뒤에 숨는 길을 막아요. 그 말 뒤에 숨을 수가 없게 하세요. 므낫세 혼자였습니까? 성경 21장 9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이 백성이 므낫세의 꾐을 받고 악을 행했다"잖아요. 혼자 한 게 아니에요. 이 백성들의 마음이 다 므낫세에게로 따라간 거예요. 압살롬에게 따라간 것처럼. 요시야가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다 정리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왕이 우상을 없애서 므낫세의 마음을 치울 수는 있어도 사람의 마음까지 돌이킬 수는 없어요. 신접한 자를 없애도 신접한 자를 찾아가던 그 마음까지는 남아요. 바람피던 여자를 정리해도 여자를 향한 마음은 남아요. 그 마음이 지금 어디 있어요? 바로 내 안에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남자가 여자를 정리했다고 하면 집에 들어와서 몸이 여기 있잖아요. 그러면 "맨날 몸만 있으면 뭐해? 마음은 다 거기 있지." 그딴 얘기 좀 하지 말아요. 몸이 와 있잖아요. 몸이 와 있는 게 어디예요? 맨날 진정성이 없다, 지금도 딴 생각하지, 이딴 소리 하지 말아요. 그러니까 마음이 남아요. 남는 걸 이해를 해줘야지 어떡해요. 사람들이 늘 딴 데다가 기웃기웃거리는 게 인간의 죄성인데, 악하고 음란한 것이 본능인데, 그러니 그 조강지처 호적의 결혼이 중요하다고 그랬잖아요. 몸이 와 있으면 결국은 마음은 식게 돼 있어요. 기다려야 돼요. 그 돌아올 때까지 잘 기다려야 돼요. 그러면서 맨날 "오늘도 그녀 만나고 왔어요" 정 떨어지는 얘기를 그렇게 하지 마시고요.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나중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처음에는 "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애가 5장 7절에. 그러니까 조상 탓으로 우리가 포로로 왔다는 거예요. 근데 그 기도를 하다가 여기까지 와요. "오히려 우리의 범죄 때문이니이다." 5장 16절에. 조상 이야기로 시작한 기도가 "내 죄다." 이게 회개인 거예요. 항상 내 죄로 도착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짧기 때문이다.

같이 살면서 그 바람피는 사람이 잘못된 게 아니라 주님을 아직 내 구주로 삼지 못하니까 세상을 구주로 삼는 거예요. 쇼핑, 도박, 마약, 여자, 남자. 그러니까 나는 주님을 구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주님을 구주로 삼지 못한 그 사람들이 불쌍한 거죠. 예배의 본을 보여줘야 되는 거예요. 그 사람하고 똑같이 행위로 잘못된 것에 대해서 그렇게 정죄를 하시고, 예수 안 믿는 게 제일 잘못된 거지, 바람피고 뭐 이딴 짓 한 것들은 여러분들이 눈물로 기도하고 기다려줘야 되는 거예요.

오늘 큐티 본문에서 뭐라고 하셨어요?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오 오늘 여기 살아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신명기 5장 3절에. 이 언약을 조상들의 얘기로 미뤄놓을 수 없다는 거예요. 오늘 여기 살아있는 우리도 이 언약 앞에 서 있어요. "므낫세 때문이라"는 말이 오늘 여기 살아있는 내 책임을 지워주진 않아요. 누구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나만 물으면 안 돼요. 이제 거꾸로 물어야 돼요. 나는 지금 내 가족에게, 내 자녀에게 무엇을 물려주고 있는가? 나는 누구의 므낫세인가? 이거를 돌아봐야 되는 거예요. 직분이 좋을 수록 되는 일이 없다. 그래서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한 목자님이 나눔을 했어요. 목원들이 고난이 없다 보니까 3대지까지 나눔을 해도 10시 전에 일찍 끝나고 가면 가다가 아내가 "너무도 흔한 세상 모임을 한 것 같아"라는 말을 듣고 많은 회개가 되었대요. 이해가 됐어요? 고난이 하나도 없다 보니까 3대지까지 다 나눔을 해도 10시 전에 다 끝났어요. 그러니까 아내가 "보통 교회에서 하는 너무 흔한 세상 모임 한 것 같아." 그래도 모이는 게 어때요? 그런데 이렇게 어렵죠. 그럴 듯한 멋있는 므낫세, 우리는 너무 좋아. 55년 장기 집권을 하고 그냥 독재로 므낫세를 너무너무 잘하고 있는. 그러니까 다 꼬임에 넘어갔죠. 므낫세 꼬임에 온 백성이 넘어갔어요. 그러니까 우리도 이 시절에, 이 시대에 멋있는 므낫세가 되어가지고 세상으로 끌리는 목장이 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렇게 세상에서 잘되는 거 칭찬해주고, 힘들지 그죠, 믿음이 없는 사람한테 이러고 저러고 얘기하려니까 힘들어. 그렇죠. 십자가야. 목장식구들이 상처받을까봐 말을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판결문을 보여줍니다. 27절에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택한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내가 이스라엘만 버린 줄 아냐, 유다 너희도 버려." 근데 그게 요시야가 악을 행한 게 아니고, 최선을 다해, 물질도 드리고 다 드렸는데 "너를 버리리라, 유다를 완전히 버리리라." 여러분들, 이게 우리에게 주신 음성으로 들어야 돼요. "내가 택한 이 성,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란 이 성전." 하나님이 직접 택하시고 이름을 두신 곳이에요. 그 성전을 버리겠다고 하세요. 예를 보여줬잖아요. 북이스라엘을 그렇게 망하게 했잖아요. 예가 있다. 유다도 똑같이 망한다. 여러분, 성전이 있다고 사는 게 아니에요. 직분이 있다고 사는 것도 아니에요. 하나님을 버리면 성전도 직분도 나를 지켜주지 못해요.

지난주에 요시야가 산당을 다 제거하되 "빻았다"고 했잖아요. 오늘은 하나님이 유다를 "물리치며," 똑같은 말이에요. 내가 산당을 제거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제거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시야 때는 요시야 덕분으로 제거되지 않았잖아요. 요시야가 죽자마자 그대로 제거되는 거예요.

사건이 그대로라고 해서 하나님이 틀리신 게 아니에요. 사실 이게 제일 어려운 고백입니다. 내가 돌이켰는데도 사건이 그대로일 때 "그래도 하나님이 옳으십니다" 하는 고백 말이죠. "제가 이만큼 했잖아요, 이제는 바꿔주셔야죠" 하고 결과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우리는 100% 죄인이고 하나님은 100% 옳으셔요. 요시야는 최종 심판이 철회된다는 약속이 없는데도 순종을 멈추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옳으시기 때문이에요.

전 옛날에 구원, 구원, 끝에 돈이 있다 이러니까 이 병원 망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고 그랬어요. 근데 그런 기도는 참 들어본 일이 별로 없었어요. 그러니까 이 병원을 망하게 해주고, 그다음에 내 생명을 내놓고. 그렇게 되다 보니까 오늘이 마지막이잖아요. 저절로. 그러니까 제가 병원에 잘 살기 위해서 남편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를 하는데 그 목적이 좀 다른 거잖아요. 지금 구원 때문에, 구원 때문에 하는 거지요.

그 옛날 수십 년 전에 한 "병원 망하게 해달라"고 그랬으니까 병원에서 죄짓고, 그래서 결국은 병원은 하나님 거잖아요. 그렇죠? 제 말이 이렇게 다 씨가 되어가지고 병원을 내려놓게 된 거잖아요. 말대로 처음부터 적용하기가 너무 어렵지만 결국은 내가 이렇게 말을 하면 지켜지게 돼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원해준다, 네가 그러면 병원도 잘 되고." 이게 아니고, 이 땅에서 육이 무너지는 것만큼 영이 세워지는 거예요. 그리고 또 우리 남편 데려가셨어요. 살려준다는 보장이 없지 않아요. 그렇죠? 살려준다는 보장이 없어도 나는 주님께 내 생명을 드렸어요.

그럼 여기서 물어야 돼요. 하나님이 옳으시고 내가 100% 죄인이라면 우리 어떻게 살아요? 우리가 흘린 눈물, 우리가 한 순종을 공로로 내밀어서 살 수 있어요? 왕들 가운데 요시야만큼 돌이킨 왕이 없다는데 우리가 뭘 내밀겠어요? 요시야의 회개는 참된 회개였어요. 전무후무한 회개였어요. 그래도 그 회개의 눈물이 죄의 값을 치르는 피가 될 수는 없는 거예요. 우리의 행위는 선한 것이 없다. "내가 이만큼 했는데, 당신이 왜 안 돌아와"

유월절 밤에 그 집에도 죽음이 있다고 했었어요. 어린 양이 대신 죽었다고. 성경이 그 어린 양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우리가 받아야 될 죄의 형벌과 언약의 저주를,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담당하신 거예요. 그러면 므낫세처럼 물려받은 것들은 어떻게 됩니까? 아버지에게 보고 배운 그 성질, 습관, 그 우상이 내 안에서 반복되고 있는데요. 성경이 베드로전서 1장 18절,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어린 양의 피가 조상에게서 물려받아 반복하던 헛된 행실에서 우리를 대속합니다. 죄가 대물림되던 집에 구원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예요.

여러분, 요시야는 돌이켰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어요. 사실 우리 남편에 대한 진노를 이 땅에서 돌이키지 않은 거죠. 그러면 당신이 그럴 수가 있냐? 그게 아니죠.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돌이켜야 돼요? 내 회개를 공로로 내미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아래로 돌이켜야 돼요. 회개가 소용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참된 회개는 자기 눈물과 수고를 의지하지 않고 어린 양의 피를 의지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도 사건이 끝내 그대로여도 보혈 아래에서 고백할 수 있는 거예요. "주님, 주님만이 옳으십니다. 100% 옳으십니다."

적용 질문이에요.

  • 회개했는데도 바뀌지 않은 그 상황을 나는 지금 어떻게 해석하고 있습니까?

  • "저 사람 때문이라"고 말해온 사건에서 "나 때문"으로 옮겨야 할 내 죄는 무엇입니까?

  • 내가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있는 것은 므낫세의 헛된 행실입니까, 어린 양의 구원 이야기입니까?

우리들교회의 초원지기 딸이에요. 우리들교회의 큐티인이고요. 근데 얘가 너무 유명하네요. 하도 속을 썩여가지고 어렸을 때부터. 학창시절 심한 왕따와 괴롭힘을 당하며 받은 상처로 인해서 사람에게 미움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까 왕따를 벗어나고 사귄 친구들이 너무 소중해가지고 걔네들이 잘못된 걸 알면서도 또다시 혼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친구들이 권유하는 술, 담배, 외박을 거절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까 이미 망가져 있었고 부모님께 반항하며 학교도 가지 않고 비행 청소년기를 지냈어요. 여러분, 얼마든지 이런 자녀들이 있어요. 부모들이 목장에서 날마다 이 얘기를 끄집어내서 정말 20년 동안 기도했어요.

성인이 되어서도 그 왕따의 두려움이 이어져서 항상 눈치를 보며 싫은 소리 하나 못하는 삶을 살아왔어요. 꿈도 없고 소망도 없었어요. 그러다가 학교생활을 갑자기 하고 싶어서 막무가내로 지원을 했더니 다 떨어지고 딱 한 곳에 붙게 되었는데 전문학교에 모델과가 있더래요. 그래서 시작을 했대요. 그리고 얘가 들어간 다음에 모델과가 없어졌대요. 얘를 위해서 모델과를 열어주신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모델과를 들어가니까 세상이 즐거워가지고 이제 주일 성수가 안 되었고 그다음에 공동체에 대한 소중함이 없으니까 교회를 떠났대요.

그렇게 세상 우상만 쫓고 있던 3년 전에 오랜만에 만난 우리들교회 키즈,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내던 한 친구가 저를 이끌고 청년부 큐페에 끌고 가주었고, 우상과 강박, 상처로 저는 채우고 채워도 항상 가진 게 없다며 자기 연민으로 제 자신을 갉아먹으며 마음이 피폐했던 저를, 기도 시간에 그저 눈만 감고 있던 저에게 하나님은 찾아와 위로하며 만나주셨고 그때의 표현 "이제는 안심하라"를 보며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살려달라는 기도와 함께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어요.

이번 주 신명기 말씀에서 "내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내 아들들과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고 하셨는데, 저는 제가 섬기고 있는 중등부에서 날마다 저의 상처를 약재료로 나누며 저와 같은 시기를 보내며 방황하는 10대들을 섬기고 공동체의 예배의 자리를 떠나지 않도록 지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현재 중등부 간사로 섬기고 있어요. 또 이번 여름 청년 안동 TT에서 엘더님, 평원님과 함께 어르신들께 복음을 전하러 갔는데 그 힘든 산골에서도 매번 직접 어르신들의 집집마다 찾아가서 노방 전도로 하시는 그 권사님, 또 안동 한사랑교회의 목사님, 성도님들에게 오히려 더 큰 감동과 은혜를 받았고, 또 청소년부 여름 큐페에서도 아이들을 섬기러 간 자리였지만 매번 그 기도 시간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귀한 아이들을 보며 제가 더 큰 은혜를 받고 가는 것 같아요. 그 아이들을 위해 섬겨주시는 교사들, 사역자님들, 스태프들이 있었기에 저도 갈피를 못 잡던 청소년기 시절에 어떻게든 붙어있었고, 말씀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자리에 앉아 듣고 있었기에 다시 공동체에 돌아올 수 있는 힘이 있었다고 생각하며 감사합니다. 아멘.

요새 속썩이는 이들이 많은데 얘야말로 중고등부를 속썩임의 대명사로 보냈어요. 여러분들, 그래도 한 친구가 초청했는데 딱 온 거예요. 어렸을 때에 향수가 있는 거예요. 청소년부 큐페에 갔다 온 거예요. 이거 어마어마한 추억이에요. 어디 가서 죄짓다가도 그때를 생각하면 돌아올 거예요.

우리의 전가족 TT가 아들, 손자, 다음 세대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한 최고의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해요. 이제 8월에 대구 성명교회에서 경상도 지역 TT에 갔던 여러분들의 눈물의 열매로 목회 세미나가 24일부터 3일간 열리니까 담임 목사님들을 동반한 사역자님들 은혜 받으셨으면 다 참여하셔서 이런 목회를 열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은혜 아니면 우리가 설명이 안 됩니다. 우리의 상황이 그대로일지라도 그래도 예배하게 하시고, 그래도 말씀대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다. 그래도 하나님이 옳으시다고 고백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다. 땀 흘려서 수고한 TT에 기름 부으셔서 경상도에 구속사가 흘러가도록 성명교회 TT에 기름을 부어달라고. 이 더운 여름에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나라가 그대로일지라도 하나님이 옳으시다는 고백을 하도록 인권이 왕도로 타는 이때 하나님, 이 나라의 다음 세대를 위하여 임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아이들을 찾아가 주시옵소서. 집집마다 우리 아이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다 같이 주님 부르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