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요시야의 개혁을 읽고 오고 있는데 다 잊어버리셨죠? 여러분, 이때는 므낫세와 아몬이 57년 동안 온 나라를 아주 우상천지로 만들었던 시대죠. 그래서 요시야가 우상을 가루로 빻아서 다윗이 눈물을 흘리고 걸었던 기드론 밭에서, 시내에 뿌리고 흘려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마지막 우상은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고 기복으로 기도하고 죄책감도 없는 산당제사예요. 산당제사, 남북에서 가장 심각한 죄가 바로 산당 예배인데요. 그래서 이 열왕기하 23장 전체에 20절까지 "산당"이 9번, "불사르고"가 8번이 나오는 거예요. 그만큼 산당은 불살라줘야 하는데요. 역대하는 이 본문에서 "산당"이라는 말이 단 한 번만 나와요. 저자의 관점이 달라요. 열왕기는 산당에 대한 태도로 왕들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남유다 초대 왕인 르호보암이 이 산당의 기초를 쌓았고, 가장 악한 왕 므낫세는 가장 악하게 산당제사를 드렸고, 부분적으로 선하지만 산당은 제거하지 않았다고 한 왕은 아사, 여호사밧, 요아스, 아마샤, 아사랴, 요담 여섯 왕이었고요. 선한 히스기야는 산당 제거는 했지만 온전치 못해서 그 아들 므낫세가 금세 다시 세웠어요. 가장 선한 왕 밑에서 가장 악한 왕이 나왔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산당은 특히 믿는 자로서 아주 뿌리 깊은 우상이었는데요. 그래서 남북을 통틀어서 요시야 한 명만이 산당을 제거했어요. 쉽게 말하면 완전히 기복에서 벗어난 왕이 딱 한 명 나왔다는 거예요. 아주 기적의 개혁을 한 거예요. 여러분, 늘 나눔에도 보면 우리도 겨울에 뭔 얘기를 해도 "나는 돈과 술은 포기 못하겠다" 뭐 이런 사람은 그렇죠. 우상을 가루로 만든 그 손이 오늘은 징하디징한 300년 묵은 바로 그 산당 앞에 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다 제거해요. 이 여전한 산당제사 어떻게 끝이 날까요?
첫째, 뿌리까지 헐어야 끝난다
15절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제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또 그 산당을 불살라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더라
요시야는 이미 유다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산당을 헐고 빻고 우상을 제거했어요. 자기 나라 안에서 할 수 있는 개혁은 이미 끝까지 한 거예요. 여기서 멈춰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이 무슨 말로 시작합니까? "또한" 요시야는 멈추지 않고 국경을 넘어 벧엘로 갑니다. 이 벧엘 산당이 하루아침에 생긴 게 아니에요.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는 백성이 각 지역 산당에서 하나님께 제사했어요. 왜냐하면 언약궤가 나갔다 들어갔다 하니까 그때 이제 공식적으로 산당이 있었는데, 그러다가 솔로몬이 불신결혼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방신을 위한 산당을 세웠고, 여로보암은 아예 금송아지 산당제사를 나라의 공식 예배제도로 만들어버렸어요. 산당이 뭔가, 번영신학, 기복주의라 누구도 끊기가 어려운 거예요. 그러니까 아세라 목상, 바알 신상, 불교 유건은 미신은 아니라고 딱 알고 있잖아요. 성기는 사람도 많지만요. 하나님을 금송아지 자리에 놓고 열심히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금송아지 보고 하나님이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나도 속고 남도 속이는 신앙인 거예요. 다 속아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섬기는 건 금송아지인데. 이제는 요시야가 벧엘 지역에까지 종교개혁을 단행한 것은 북이스라엘이 이미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앗수르의 속국으로 전락하고만 상황에서 정치적인 마찰까지 무릅쓰고 요시야가 거기에 직접 찾아간 거예요. 왜요? 거기에 이제 뿌리가 있기 때문에.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세운 제단과 산당, 북이스라엘이 저지른 죄의 뿌리 바로 이 금송아지를 섬기는 자리. 산당이지만 가시적으로 금송아지를 섬긴 게, 만들어 놓고 섬긴 게, 여로보암이거든요. 그 전에는 언약궤가 없었으니까 솔로몬 때 이때는 다윗 때도 언약궤가 없으니까 언약궤 대신할 게 있어야 되잖아요. 언약궤를 빼앗기고 막 이랬잖아요. 근데 이걸 완전히 공식화해가지고 금송아지를 섬긴 사람이 여로보암이기 때문에 마치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웠다는 말처럼 여로보암의 우상숭배 정책을 북이스라엘의 후대 왕들이 그대로 이어받아서 악순환이 계속되었어요. 그리고 여로보암은 이미 북이스라엘의 국부가 되어 있었어요. 요시야는 자기의 직계조상 아버지 할아버지 므낫세 아몬을 비롯하여, 통일왕국에서 가장 부강했던 솔로몬 조상까지도 개혁대상으로 삼았다고 그랬죠. 그리고는 그게 끝나고 드디어 북쪽의 건국의 아버지인 여로보암을 개혁대상으로 놓은 거예요. 와, 정말 누구도 할 수 없는 300년 동안 여로보암에 대해서 입도 못 벌리던 시기에. 그는 이미 금송아지를 섬기고 나라가 부강했어요. 남유다보다 잘 살았어요.
그런데 여기를 왜 개혁을 할까요? 그러니까 잘 사니까 누구도 개혁대상으로 못 놓잖아요. 여로보암이 그런 이유는 성경이 그 속마음을 그대로 적어놨어요. 왜 금송아지예요? 왜 금송아지를 세웠나? 무서웠던 거예요. 열 지파를 데리고 반역을 해서 나갔어요. 근데 열 지파가 합세를 했어요. 온 국민이 두 지파 빼고 다 여로보암을 따랐어요. 개혁을 한다고 나왔는데 백성이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가면 마음이 돌아설 거다. 그러면 내 자리도 목숨도 없다. 그러니까 여로보암이 막고 싶었던 건 하나님이 아니에요. 백성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백성이 하나님께 예배하러 올라가는 그 발걸음을 막은 거에요. 내 예배는 큰 사건으로 무너지지 않아요. 이 나가려던 발걸음 하나가 멈추면서 무너지는 거예요. 그래서 백성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다" 열왕기상 12장에 나오죠. 협박이 아니에요. 오히려 좋은 소식처럼 들리는 말이죠. "먼 길 갈 것 없어, 시간 뺏길 것 없어, 이제 그냥 가까운 데서 예배 드려." 여러분, 그러니까 가깝다고 좋은 교회만은 아니에요. 예배를 가깝다고 가면 안 되는 거죠. 다들 똑같이 좋은 교회일 때에는 가까운 교회가 또 좋겠죠. 그야말로 산당 예배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금송아지를 남쪽 끝과 벧엘과 북쪽 끝 단에 세웠어요. 어디 살든 국경 넘을 일 없이 제사를 할 수 있게 해준 거예요.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금송아지가 얼마나 든든했겠습니까? 그러니까 백성 입장에서 이건 손해가 아니에요. 예배가 없어진 게 아니라 편해졌어요. 그러니까 금송아지 섬긴다고 예배를 버리지는 않았어요. 불편한 부분만 조금씩 바꾸는 거예요. 멀리 갈 것 없고, 손해 볼 것 없고, 관계 깨뜨릴 것 없고, 내 자리 내놓을 것 없는 이 예배를 찾아서 가는 거예요. 물론 북이스라엘에서도 예배 하나 지키려고 집과 생업을 버리고 남유다로 내려간 제사장과 레위인들도 있었어요. 그러나 대다수 백성은 그대로 남았습니다. 편한데 뭐가 문제였겠어요? 여러분은 어느 쪽이세요? 짐을 싼 쪽이에요, 그냥 앉아 있는 쪽이에요? 짐을 쌌어요, 앉아 있어요?
산당이 뭡니까? 예배를 없애는 게 아니에요. 예배를 꼭 드리되 내 형편에 맞게 고치는 거예요. 하나님이 정하신 자리에서 내가 편한 자리로 옮기는 거죠. 그런데 성경은 딱 한 줄로 판결을 해요.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열왕기상 12장 30절. 편한 게 죄가 되고 말았어요. 한 번 자기가 정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요. 장소를 바꾸더니 제사장도 자기가 세우고, 절기도 자기 마음대로 정합니다. 영적인 일은 육적으로 다가가고, 다 바꿔서 오직 예배를 부르짖으며 처음에는 조금 편하게 예배하자였는데 나중에는 예배의 모든 것을 자기가 정해요. 왜냐하면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로보암을 추앙하기 시작하니까. 그렇게 한 사람의 계산이 한 나라를 통째로 죄로 끌고 들어갔고 그 산당이 무려 300년을 간 거예요. 여로보암이 죽었어요. 그런데 산당은 안 죽었어요. 내가 세운 산당도 나보다 오래 살아가고, 내 자녀가 그대로 물려받을 거예요. 그런데 여로보암은 자기가 하나님을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예요. 자기의 변은 "솔로몬이 이상하니까 살려고 우리가 개혁했다" 이게 여로보암의 변이에요. 그래서 내가 자리 지키려고 조금 바꿨을 뿐이라고 생각했겠죠. 여러분, 개혁을 이해타산으로 하면 그 개혁은 언젠가 또 개혁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확히 말씀하세요.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다." 열왕기상 14장 말씀을 내 형편대로 바꾸는 순간 하나님을 내 등 뒤에 버린 거예요.
여러분, 무엇을 잃을까 봐 말씀을 바꾸고 있습니까? "시험이니까 이번 주에 어쩔 수 없고, 이 관계는 깨지면 안 되니까, 이 정도 타협은 괜찮고, 이 돈은 여기까지는 봐주시겠지" 하지 않으십니까? 다 이유도 사정도 있어요. 그러다 어느새 하나님이 정하신 예배는 없어지고 내가 편한 예배만 남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믿음 좋다고 생각해요. 산당의 뿌리는 우상 보다도 두려움이에요. 이게 원칙이 아주 중요해요.
휘문에 어떤 사건이 있었죠. 우리가 주선드린 학교 발전 기금으로 세탁을 하셔가지고, 그래서 그분이 저보고 영수증 없이 달라고 끊임없이 저를 회유했어요. 모든 분들한테 물어보면 "아니 세입자가 임대업자하고 우리는 세입자인데 세입자가 뭘 그런 걸 따지냐고, 정말 목회를 처음 해보셔서 뭘 너무 모르신다고" 다 그런데. 우리는 이 저기대로 원칙대로, 그래서 우리 휘문에 정문이 닫혔었잖아요. 제가 그걸 또 고소를 할 수도 없고, 그래서 1년 동안 정문을 닫았어요. 기억하시나요? 개구멍으로 1년을 다녔어요. 그러니까 여기까지 제가 그런 얘기를 했죠. 우린 큐티하는 교회이기 때문에 원칙을 안 지키면 이제 언젠가는 다 드러나게 돼. 제 말은 꼭 이루어져요. 그래서 드러났잖아요. 결국. 그러니까 이러이러하더라 이런 얘기하시면 안 돼요. 말씀대로 원칙을 지켜야 돼요. 그래서 휘문이 아주 휩싸였는데 저만 감옥에 안 가지 않았습니까? 한 사람이 너무 중요한 거죠. 저는 무서운 게 많아가지고 법을 진짜 어기는 걸 못하겠어요. 그래서 그러다가, 이유도 사정도 있어요. 어느새 하나님이 정하신 예배는 없어지고 내가 편한 예배만 남는 거예요. 그래도 예배를 드리니까 나는 믿음 좋다고 생각해. 그래서 산당의 뿌리는 우상보다 먼저, 두려움에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내가 지키겠다고 하는 두려움에 있어요.
요시야는 제단만 헐고 그만두지 않았어요. 헐고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로 만듭니다. 산당을 파괴하는 정도가 아니라 부정하게 해서 다시는 성소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데, 14절, 16절에 해골로 채웠다는 것이 그것이지요. 그러니까 최대한의 표현을 쓰는 거예요. 거기 해골로 가득하니까 절대로 예배 드리러 못 가겠는 거예요. 버리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렇게 더럽게 해놨어요. 요시야처럼 우리도 끊을 건 끊고, 지울 건 지우고, 차단할 건 차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면 안 돼요. 그 제단을 처음 세운 내 두려움과 계산까지 내려가지 않으면 산당은 다른 얼굴로 또 올라와요. 집을 정리하다 보면 분명 버린 줄 알았던 물건이 다른 서랍에서 또 나올 때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없앤 게 아니라 자리만 옮겨 놓았던 거예요. 우리 죄도 그래요. 돈을 내려놓은 줄 알았는데 자녀에게 가있고, 사람 의지를 끊은 줄 알았는데 어느새 자리와 인정에 가있어요. 죄는 없어지지 않고 얼굴과 자리만 바꿔서 계속 다시 나타나는 거예요. 그 뿌리는 내가 눈 감고 앉아서 찾아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요시야를 벧엘까지 데리고 간 것도 자기 열심이 아니에요. 성전에서 발견된 말씀인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죄가 처음 시작된 그 자리까지 나를 데리고 가십니다. 큐티를 해서 내 뿌리를 찾아내야 한다.
제가 휘문 얘기를 처음 드렸는데, 왜냐하면 이사장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이에요. 할머니께서 그 사건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러고도 지금 또 굉장히 많이 세월이 지났는데, 그래서 관계된 분들이 많이 이렇게 감옥에 가셨다고 들었어요. 우리들교회가 살아남은 건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러니까 그 원칙을 지킨다는 건 십자가의 길이에요. 정말 수많은 욕을 먹었어요. 그냥 제가 보기에 너무나 머리꼭대기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것 같지 않아요. 제가 나이가 먹었는데 맨날 그러면서 할머니 얘기를 안 듣는다. 말씀이 무서운 거예요. 그래서 그때도 말씀을 드렸어요. "우리들교회는 뭘 해도 드러난다." 내 말을 꼭 이루시는 거 있죠. 하나님이. 나 괴로워. 여러분, 내 입에서 한 번 말 나오면 잘 들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래서 벧엘이 무슨 뜻이에요? 하나님의 집이에요. 이름은 하나님의 집인데 예배는 자기 마음대로 드리는 거예요. 그게 벧엘이고, 그게 바로 나예요. 산당은 내가 옳은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끝까지 남는 자리를 산당이라고 하는 거예요.
적용 질문이에요.
무엇을 잃을까 봐 제일 두렵습니까?
그 두려움 때문에 이번만은 어쩔 수 없다며 빠진 예배나 순종이 있습니까?
이것만은 내 방식대로 하겠다고 버티는 그 한 가지는 뭐예요? 돈이에요? 술이에요? 담배예요? 주식이에요?
어려서 너무 살기가 힘드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금송아지 숭배하러 교회를 나간 것 같아요. 요즘 큐티 본문처럼 아무리 크고 강한 것들도 더 강한 것에 멸망한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바로 나의 방식이에요. 결국 열심히 살았던 나의 최고는 더 강한 것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지요. 이름은 하나님의 집 벧엘로 시집을 갔는데 부모님의 꼭두각시처럼 주일만 같이 가고 주중에는 일절 나가지 말라고 하시니 그걸 순종이라고 타협을 한 것이죠. 우리 시댁은 당회가 열릴 때를 대비해 항상 너무 열심히 청소를 해놓으시지만, 그 청소해놓는 목적이 당회가 언제 열릴지 우리 집이 깨끗하다 그러면서도, 사실 교회를 위해서 청소를 하신다 그러면서도, 주중 예배와 봉사는 50이 넘어서 하라는 시댁의 방식이 있었죠. 이 방식이 있는 거예요. 분명히 우리 집은 믿는 집인데 금송아지를 섬기는 것처럼, 그것은 순종이 아닌데 순종한다고 못 나갔지요. 뿌리까지 헐어낼 수가 없었어요. 다시 생각해보니까 시기마다 어려서부터 종류가 다른 금송아지에 내 노력으로 산당제사를 드린 것이죠. 열심이 없는 사람은 산당제사도 또 못 드려요. 그래서 믿음의 반대는 내 열심인 거예요. 그래서 그 시기마다 나한테 산당제사가 있는 거예요. 종류를 받고 가면서 그건 내 열심으로 안 되는 거예요.
둘째, 여호와의 말씀대로 끝난다
뿌리까지 헐어야 끝나지만 내 힘으로 뿌리를 헐 수가 있나요?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읽어가야 되는 거죠. 16절에요.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무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무덤에서 해골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그 제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은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어디나 이 개혁은 말씀이 없이는 안 되는 거예요. 4절부터 15절까지 요시야가 한 게 뭐예요? 부수고 태우고 빻고 더럽히고 전부 12절 동안 그냥 숨 쉴 틈이 없이 그 얘기밖에 없었어요. 16절에서 화면이 갑자기 멈추면서 왕이 몸을 돌이켜요. 무덤에서 해골을 꺼내 벧엘 제단에서 불살라 다시는 못 쓰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성경이 이 모든 개혁을 해석하는 한 문장을 붙입니다.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이 한 문장을 알아들으려면 300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되죠. 여로보암이 벧엘 제단을 세우려고 첫 분향을 하던 날이었어요. 북이스라엘에 여로보암의 나라에 새 예배가 시작되는 날, 개국기념일 같은 날에 왕이 제단 곁에 서 있는데, 이쪽 남쪽 유다에서 온 사람 하나가 올라왔어요. 근데 그 사람이 자기 뜻으로 온 게 아니고 여호와의 말씀으로만 왔다고 그래요. 열왕기상 13장 1절에 나오죠. 이름도 안 나와요. 그냥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왔다고 그래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만 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왕한테 말하지 않습니다. 제단한테 말해요. 여로보암이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여로보암 앞에 가가지고. 왕상 13장 2절에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들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요시야가 태어나기 오래전인 거예요. 300년 전에 하나님이 그 이름을 먼저 부르셨어요. 23장의 개혁 기사에서 요시야는 죽을 때까지 "왕이라고만 불렸어요. 왕이 명령하고 왕이 헐고 왕이 더럽게 했다"고요. 근데 16절에서 처음으로 요시야라고 이름이 나와요. 300년 전 예언한 말씀 속에 박혀있던 그 이름이 나와요. 하나님의 말씀은 300년 뒤에 이름 하나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제 읽은 말씀을 오늘 아침부터 예외로 처리해요. "내 경우는 달라, 우리 집은 어쩔 수 없다니까." 그러죠? 그러니까 목장에서 그렇게 말을 안 듣죠. "집사님이 뭘 모르시나봐." 말씀이 부정확한 게 아니에요. 나는 자꾸 예외로 만드는 거예요.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아유, 하나님도 내 상황은, 그 상황은 모르실 거예요."
무덤들을 보면 요시야 눈에 비석 하나가 들어오는데요. 17절 18절이에요.
요시야가 이르되 내게 보이는 저것은 무슨 비석이냐 하니 성읍 사람들이 그에게 말하되 왕께서 벧엘의 제단에 대하여 행하신 이 일을 전하러 유다에서 왔던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이니이다 하니 이르되 그대로 두고 그의 뼈를 옮기지 말라 하며 그의 뼈와 사마리아에서 온 선지자의 뼈는 그대로 두었더라
그 비석은 바로 요시야의 개혁을 예언했던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이었어요. 그러니까 이를 알아들은 요시야는 그의 뼈를 건드리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 곁에 누가 같이 묻혀있나요? 벧엘의 늙은 선지자예요. 이 두 사람 이야기 기억하시나요? 열왕기상 13장. 제가 설교했는데요. 그리고 한 절도 안 빠지고 다 했는데 기억 안 하면 못해요?
하나님은 그 하나님의 사람을 벧엘로 보내면서 여로보암이 지금 나라를 창건하잖아요. 그러니까 이걸 경고하러 하나님의 사람을 보낸 거예요. 조건을 다셨어요. 여로보암이 너무너무 대단한 사람이니까 거기서는 떡도 먹지도 마시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돌아오지도 말라. 열왕기상 13장 9절에 말씀만 딱 전하고 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여로보암이 붙잡고 회유해도 안 넘어갔어요. 그런데 이 늙은 선지자가 그를 쫓아와서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이러니까, 선지자라고 하고 거짓말을 하니까, 거기에 넘어가서 돌아가 먹고 마셨고 그리고 길에서 사자를 만나 죽었어요. 왕 앞에서는 꼼짝도 안 하던 사람이 같은 선지자의 말 한마디에 무너진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다 같이 아니에요. 사람이 믿음의 대상이 아니에요. 목사를 믿어야 되지만 항상 다 믿어야 되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여러분 같은 경우는 약간 믿어야 돼요. 여러분 수준이 굉장히 탁월하다면. 그런데 그를 속인 그 늙은 선지자가 죽기 전에 유언을 남기는 거예요.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왜요? 그가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믿었기 때문이에요.
참 이상하죠? 한 사람은 말씀을 전해놓고 정작 자기에게 주신 말씀에는 불순종해서 죽었어요. 또 한 사람은 선지자면서 거짓말을 했어요. 성경이 이 두 사람을 다 미화하지 않아요. 말씀 맡은 사람도 이렇게 넘어지는 거예요. 우리가 목회자에게 상처받을 수 있어요. 또 부모에게도 실망할 수 있어요. 목자 때문에 목장을 떠나고 싶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이 부모와 목자의 실패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까지 놓아버리면 나를 살릴 마지막 줄을 내 손으로 놓는 거예요. 이것은 어리석은 거에요. 사람이 완전하지 못해요. 그러니까 내가 누구 때문에 교회를 떠나고 누구 때문에 이러시면 어리석은 거예요. 그리고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에요. 부모로, 목자로, 선배로 말입니다. 하지만 내가 전한 그 말씀대로 내가 살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목자를 한번 모아놔, 내려놓겠다" 맨날 이렇게 하죠. 그런데 나 때문에 말씀을 놓아버린 사람은 없는지 돌아봐야 하겠어요. 그러니까 전한 사람도 이렇고 듣는 우리도 이래요. "저 사람은 말씀대로 못 살아, 저 목자가 말씀대로 못 살아서 내가 떠나." 그런데 목자는 또 내가 전한 그 말씀대로 내가 살지 못해서 나 때문에 말씀을 놓아버린 사람이 없는지 돌아봐야 된다는 거죠.
그러면 전한 사람도 듣는 이도 이런데 그 말씀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300년이 지나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세요. 온 산에 뼈가 다 끌려 나와 불태워진 그날에 그 무덤 하나만 옮기지 말라 하시는 거예요. 그가 외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으니까, 그가 전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도장을 찍어주신 거예요. 말씀 말씀하시고 그 같은 사람은 말씀을 어길 수 있어도 하나님은 자기 말씀을 어기지 않으세요. 그래서 이 말씀은 지친 우리에겐 위로이고 버티는 죄인에겐 경고인 거예요. 몇 년을 기도했는데 아무 변화도 없어서 "이 말씀은 우리 집에는 안 되나보다" 하고 덮어버린 일이 없습니까? 그런데 벧엘의 그 말씀은 무려 300년을 기다렸어요. 그동안 아무 일도 안 일어났어요. 여로보암도 죽고 왕조도 바뀌고 나라까지 망했어요. 그래도 그 말씀은 살아있었어요. 이사야 55장 11절에서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기다리다 지쳐 폐기 처분한 그 말씀을 하나님은 한 번도 폐기하신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이 말씀이 득이 된 거예요. 좋기만 한 약속만 있는 게 아니에요. 요시야는 이미 들었어요. 열왕기하 21장 16장
내가 이곳과 그 주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벧엘의 말씀이 300년 만에 이루어진 것처럼 심판의 말씀도 반드시 이루어지는 거예요. 하나님은 언제나 100% 이루세요. 여러분, 산당은 여전했어요. 왕이 바뀌었어도 버텼어요. 선지자가 외쳐도 버텼어요. 나라가 망해도 버텼어요. 그러나 말씀은 더 여전했어요. 산당보다 더 여전했어요. 300년을 버틴 산당도 말씀 앞에서는 하루를 더 버티지 못해요. 300년 전에도 벧엘 제단을 정확히 찾아낸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도 살아있습니다. 내가 말씀을 읽는 줄 알았는데 말씀이 내 안에서 내 산당을 찾아내는 거예요. 말씀은 오늘도 내 산당을 향해 "제단아 제단아" 하고 외치십니다.
적용 질문이에요.
오래 기도해도 안 되어서 "우리 집에는 안 되나보다" 하고 덮어버린 말씀이 있습니까?
사람에게 실망해서 하나님의 말씀까지 놓아버린 적이 있습니까?
오늘 말씀이 "제단아 제단아" 하고 콕 집은 내 산당은 무엇입니까?
300년 뒤라도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걸 믿습니까?
그렇게 믿는다면 어떤 일에도 실망하지 말아야 되죠. 수요일날도 그냥 목사님이 아들이 자기를 그렇게 미워한다고 정말 "왜 저렇게 미워하지" 할 정도로. 그러니까 우리는 그게 자녀 문제가 되면 그냥 실망을 해요. 일평생 말을 안 들어도 그냥 실망을 해요. 반드시 말씀은 이루어진다고요.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찾아가실 거예요. 아셨어요? 다 자녀 때문에 우리가 예수 믿지, 자녀가 얼마나 보물인지 몰라요. 자녀 때문에 다 믿어요. 사랑부 큐티도 다 자녀 때문에 성자가 되셨어요.
제가 아프리카 케냐 가기 전 주에 당회를 했는데요. 한 장로님이 편지를 주셨다. 십여 년 전에 증권 계좌에 여유 자금을 넣어두고 있었는데 관심이 없어서 비번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고 그래요. 그런데 직원이 병원으로 교회로 찾아와서 주식에 투자하라고 권해가지고, 제일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S전자를 사게 되었대요. 내버려 두었는데 작년 말부터 너무 오르기 시작하니까, 그게 너무 오르니까 눈만 뜨면 주식 시장만 쳐다보게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그게 너무 올라가니까 환자 보기도 시들하다고 하시니 굉장히 심각한 거잖아요. 어떤 부목자님도 주식이 너무 올라가니까 회사도 그만두고 차에서 하루 종일 주식만 보고 있다고, 교회도 안 나온다고. 들으셨죠. 당장 불로소득이 올라가면요 인생이 사는 게 다 시들시들해져요. 이렇게 돈이 쉽게 벌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당장 정리하시라고 했어요. 그분이 그때 오픈을 해주셨어. 그때 누군가 또 옆에서 "상반기 실적평가하고 각종 호재가 많아서 조금 더 기다리셔야 될 건데요, 이왕 파는 것도 그러세요" 그래서 당장 무조건 정리하시라고. 제가 지금까지 손해보지 않은 것만도 감사하고, 지금이 그때인가보다. 내가 더 일찍 얘기했으면 그랬을 건데. 그래서 제가 막 욱박질러가지고 대답을 받아냈어요. 정리하시라고. 그러나 장로님이 저한테 고백을 보낸 거예요. 주일에 당회가 끝나고 당장이라고 그러면 주일날 끝났으면 월요일날 정리해야 되잖아요. 근데 "이번 주에만 팔면 된다"는 합리화를 하며 그래도 이번 주 조금 더 오를 때 팔자고 생각을 하고 그랬는데, 지금까지 올라가던 그 주식이 목요일부터 정신없이 떨어지는데, "자기 생각과 상황 논리만 내세우는 요압이 적었고 은 천 개가 주어져도 왕의 명령을 따르겠다는 한 종의 적용에 저도 주식을 일부 팔 수밖에 없었습니다. 떨어져도 일부 매도하여 얻은 수익은 현재 투자 금액의 두 배 이상을 보유하게 되었고, 그 당시 떨어질 때인데도 너무 잘 팔았다는 생각에 감사드리고 있어요. 요즘 주식시장을 전문가들도 해석하지 못하고 있는데 목사님은 전문가보다 더 전문가시라는 생각이 들었고, 제 생각에는 목사님의 명령을 지켜주시려고 전국의 주식을 떨어뜨리는 게 아닌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죄송하게도 갑자기 너무 떨어져서 아직 팔지 못한 주식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만일 당회 후에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팔았다면 엄청난 수익을 올렸을 것인데요. 그때가 최고의 피크였는데. 저 어떻게 이렇게 팔 날까지 잘할까요? 근데 욕심이 없으면 주식을 해도, 여러분 욕심이 있는 사람은 못해요. 진짜. 목사님 이번 일을 통해 제가 불순종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불순종하고 불충성하는 죄인이고 믿음이 하나도 없는 자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어요. 목자의 말을 듣고 집을 판 목자보다 못한 자입니다. 저의 실체를 정확히 볼 수 있었어요. 처방이나 말은 쉽게 하는데 적용하지 못하는 저의 구질구질한 탐심의 뿌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할 말 없는 죄인이고 베옷을 뒤집어써도 모자랄 자인 걸 알게 되었어요. 목사님 앞으로도 평생토록 이번 일을 쓰지 않고 끊임없이 회개하며 저를 구하려고 합니다. 고쳐주시기를 기도하며 가겠습니다. 날마다 큐티노트 회개하며 기록하였습니다. 너무 죄송하고 감사드립니다. 십일조는 전부 매도 후 하려고 했는데 일단 매도한 수익부터 하겠습니다."
요게 중요하기 때문에 읽어요. 제가 그러니까 말씀이 이루어진다고요. 말씀이 이루어진다고요. 이 여전한 산당제사 어떻게 끝이 난다고요? 뿌리까지 헐어도 끝나기가 어렵다고 그랬죠. 말씀이 임해야 끝난다고 그랬잖아요,
셋째, 예배로 돌아와야 끝난다
말씀이 임해도 예배로 돌아와야 산당제사가 끝나는 거예요. 19절에요.
전에 이스라엘 여러 왕이 사마리아 각 성읍에 지어서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산당을 요시야가 다 제거하되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대로 행하고
열왕기의 오랜 꼬리표가 여기서 이제 마침내 뒤집혀요. 아까도 말했지만 선한 왕이 나올 때마다 따라 붙던 한 줄, 기억하시죠? "오직 산당은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특히 유다의 왕들이 산당은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런데 오늘은 다릅니다. "산당을 요시야가 다 제거하되" 같은 "제거하다"라는 말. 수백 년 동안 반복되던 그 말이 마침내 오늘 "다 제거하되"로 뒤집힌 거예요.
그럼 앞으로 저한테 "언제 팔까요, 언제 살까요" 또 물어볼 예정이에요. 제가 쪽집게라서 그런 게 아니고. 장로님이 불로소득이 많아지니 지금 병원도 기쁜 게 아니고 시들하고, 그러면 구원에서 멀어질 거잖아. 그럼 돈이 뭐가 문제. 그러니까 그냥 당장 처분하라, 당장 처분. 그러면 장로님 이렇게 올라갔다, 그러니까 조금 보시고 7월 말이 분기가 얼마 안 남았잖아요, 그때 그러면 하시죠. 제가 그랬을 거 아니겠어요. 옆에서 제가 뭐가 전문가로. 그런데 제가 그냥 장로님이 그러면 심각해서 더 올랐다가는 더 큰일 나겠다 당장, 당장. 제가 얼마나 강력하게 그만두시라 그러니까, 이렇게 구원에 대한 시각을 놓으면 이런 것들이 좀 보이는 것 같아.
이 19절이 무엇을 겨냥하는지 보세요. 멸망한 북이스라엘 땅에 들어와 살던 이방 사람들의 종교가 아니에요. 이스라엘 여러 왕이 사마리아 각 성읍에 지어서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산당이에요. 그러니까 아세라, 바알 신상보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그 산당이 훨씬 더 나쁘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어서 여호와를 격노하게 했다는 거예요. 히스기야도 산당을 부쉈죠. 근데 아버지가 부순 것을 아들 므낫세가 다 다시 세웠어요. 은혜받고 부쉈다가 사건이 오면 도로 세우는 거예요. 우리도 주일에는 이스라엘이었다가 월요일에는 므낫세가 되지 않습니까? 않습니까?
그런데 요시야는 자기 땅에서 멈추지 않았어요. 국경 너머 벧엘과 사마리아까지 가서 그 산당들을 다 제거합니다. 여로보암 한 사람의 죄가 여러 왕의 관행이 되고 백성의 문화가 되고 나라가 망한 뒤에도 살아남았어요. 산당은 나라보다 오래 삽니다. 그런데 그 산당을 끝낸 건 요시야의 망치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한 사람의 순종을 통해 마침내 끝내신 거예요. 근데 열왕기가 무서운 대조를 하나 보여주는 거예요. 산당을 제거하지 않은 북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그 땅에서 제거하셨어요. 열왕기하 17장 보면 산당은 제하지 못하는데, 산당은 그대로 있는데, 그 산당의 백성이 뽑혀나갔어요. 망했잖아요, 백성이 뽑혀나갔어요. 회개로 내어놓지 않은 산당은 결국 심판으로 드러나요. 하나님이 심판을 기뻐하셔서가 아니고요. 돌아오라고 300년을 참으셨는데도 끝내 산당을 붙들었기 때문에.
남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여기서 우리가 꼭 물어야 할 게 있는데요. 요시야는 왜 여기까지 갔을까요? 이 사람은 이미 유다의 재앙이 임한다는 말씀을 들었어요. 열왕기하 22장 16절에 잘될 보장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런데도 개혁을 멈추지 않았죠. 그것도 자기 나라가 아니라 이미 망해버린 옛 형제의 땅까지 가는 거예요. 요시야는 벧엘 제단을 "내 나라 일도 아닌데" 하며 남의 일로 버려두지 않았어요. 그 남의 땅을 자기 책임으로 여겼어요. 거기 산당을 부순다고 세금이 더 들어옵니까? 자기 이름이 더 높아집니까? 우리가 TT 가는 것도 세상적으로 얻을 게 있어서 갑니까? 그럼 왜 갔을까요? 하나님이 옳으시기 때문에. 여호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 말고는 이유가 없어요. 근데 TT을 갔던 팀들 중에서 은혜를 너무너무 받은 사람들이 많은 거예요. 우리가 더 은혜를 받았어요. 모두가 주인공이 돼서 가서 이렇게 간증을 하니까, 다 사명을 감당하니까. 이게 산당제사의 반대예요. 산당은 잘되려고 드리는 예배잖아요. 그런데 요시야의 순종은 잘될 게 하나도 없는데 드리는 예배예요. 그러니까 잘될 게 없어도 드리는 예배만이 잘되려고 드리는 제사를 이기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자체가 상급인 게 제일 무서운 얘기고 제일 확실한 기쁜 답인 거예요. 잘될 게 없어도 드리는 예배만이 잘되려고 드리는 제사를 이기는 거예요. 이기는 거예요.
우리 순종에 늘 조건이 붙어있어요. 이만큼 했으니까 되겠지, 이번엔 응답해 주시겠지. 그런데 안될 때도 드리는 예배가 있습니까? 붙으면 회개, 떨어지면 감사, 진짜 할 수 있습니까? 그게 없으면 내 신앙은 이름만 예배지 사실은 산당제사인 거예요. 여러분은 산당 예배 드리고 있는 거예요. 산당 예배, 뭐라고요? 반드시 하나님이 칼을 물고 쫓아가서 망하게 하는 게 산당 예배예요. 내가 이 땅에서 잘 산다고 산당 예배가 감춰지는 게 아니에요. 300년 뒤라도 쫓아와서 드러내세요.
마지막 20절에요.
또 거기 있는 산당 제사장들을 다 제단 위에서 죽이고 사람의 해골을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오늘 이거를 문자적으로 제사장들을 죽였다니 사람을 제거하라는 말씀으로 들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항상 여러분들이 죽이고 아니면 살리고. 전쟁이, 지금까지 이 땅에서 전쟁이 없었던 때는 8%밖에 안 된대요. 92%가 전쟁 중에 있었다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전쟁을 이기려고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쪽이 아닌 저쪽이 틀렸다, 이런 굳은 고정관념으로 어떻게 여러분이 사람을 구원하겠습니까?
한 부목자님 편지를 보내셨어요. "요즘 저는 올림픽공원에서 부정선거, 재선거, 당일투표, 수개표 등을 외치는 집회에 참여하고 있고 카카오톡 프로필에도 저의 정치적 성향이 드러나는 이미지를 올려두었어요. 그런데 목장에서 한 집사님이 "부목자님 이렇게 하시면 취업도 안됩니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이후 권찰님께서도 프로필 사진에 정치 성향을 드러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시면서 예전에 비슷한 일로 평원님께서 목사님을 크게 책망하신 적이 있었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정치적 표현을 자제하라는 것이 맞는 것인지 스스로는 분별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런 걸 보내셨어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다들 갑자기 꿀꺽이가 됐어요.
목장에서 이런 얘기 물어볼 수 있죠. 저는 아마도 부목자님을 사랑해서 한 말씀이라고 보여지는데요. 여러분들이 진짜 성경 말씀을 받은 자답게 좀 살자고요. 북이스라엘도 앗수르 때문에 망한 게 아니라 우상숭배로 망했어요. 북이스라엘 보고 남유다는 좀 회개하라고 100년 이상의 유예기한을 주었어도, 남유다도 바벨론 때문에 망한 게 아니라 회개하지 않아서 망했다고, 정확하게 말씀이 다 나와 있어요. 우리는 이쪽저쪽 모두 이해타산을 내려놓고 회개하고, 교회는 교회 본을 보여야 되는데요. 편 가르기가 아니라 집회에 참여해도 좋아요. 그런데 영혼구원의 마음으로 참여하라는 것이에요. 그걸 만류를 해도 같은 마음으로, 진영 논리를 내려놓고 만류를 하라는 것이죠.
산당의 제사장들을 죽이라고 하는 것은 구약 이스라엘에 주어진 언약 심판이에요. 우리가 무너뜨려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내 안에 교만과 탐욕과 자기 방식의 산당이에요.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닌 거예요. 그렇지만 우리 가운데는 하나님 편에서 옳은 게 있잖아요, 그 옳은 거를 어떻게 합니까? 전 세계가 옳은 걸 옳다고 여겨서 전쟁이 납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되든지 우리는 회개와 영혼구원의 그 모습을 보여줘야 되는 거예요.
그러나 본문은 마지막에 어디를 보여줍니까?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요시야는 부수는 사람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예배의 자리로 돌아오는 사람이었어요. 산당을 제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이 귀환은 다음 주일 본문에 유월절로 이어져요. 그러니까 산당을 제거하고 돌아오고 예배하는 거예요. 근데 우리 어디서 멈추나요? 부수는 데서 멈춰요. 끊는 결심은 있는데 돌아오는 예배가 없어요. 술은 끊었는데 말씀을 안 봐요. 관계는 차단했는데 목장에는 안 나와요. 중독된 앱은 지웠는데 예배의 자리를 채우지 않아요. 그러니까 비워놓은 그 자리에 다른 산당이 들어와요. 반쯤 태운 우상은 반드시 살아납니다. 산당을 비워놓는 것이 회개가 아니에요. 하나님께 돌아와 예배하는 것이 회개의 완성입니다.
근데 요시야가 돌로 된 제단은 다 부쉈어요. 그러나 백성의 굳은 마음까지 새롭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 언약을 약속하세요. 에스겔 36장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오늘 제거라는 말 많이 들으셨죠. 마지막으로 제거해야 될 게 뭡니까? 내 굳은 마음이에요. 우리의 인생을 주장해가는 것은 감정, 이성, 지성이 아니라 바로 죄예요. 눈을 뜨면 지탱하는 것들, 살게 하는 것들이 다 죄예요. 굳은 마음을 주장하는 것은 굳은 마음이에요. 그리고 그 제거는 내가 못해요. 오직 새 영, 하나님이 해주셔야 돼요. 하나님만이 내 굳은 마음을 제거할 수 있어요. 수백 년도에 바로 그 옛 이스라엘 땅 사마리아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세요. 요한복음 4:21-23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요시야는 잘못된 예배의 자리를 제거했고 예수님은 참된 예배의 길을 여셨어요. 남편이 다섯이 있는 여자한테 참된 예배의 길을 제시하셨어요. 하나님은 산당을 비우신 그 자리를 참된 예배로 채우십니다. 믿으십니까?
적용 질문이에요.
응답이 없어서 그만둔 기도나 예배가 있습니까?
끊었다가 도로 찾아가는 습관이나 죄는 무엇이에요?
내가 다시 찾아갈 버려진 벧엘 같은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회개로 예배가 완성되었습니까?
목숨보다 사랑하는 당신, 피곤하시죠. 사랑합니다. 나중에 통화해요. 이런 남편의 문자로 인해 도피처로 생각하고 남편과 결혼했어요. 내가 집에서 반만 하다가 내 식구밖에 모르고 죽을 인생인데, 나 죽을 때 슬퍼할 사람이 아이들밖에 없을 것이었는데, 어느 날 제가 이렇게 스타로 탄생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왜 스타로 탄생했을까요? 남편이 바람을 펴서 간증을 하니 수백 명에게 은혜를 끼치고 살리게 되니 제가 스타가 되었지 뭐예요. 세상은 힘들어서 못 살겠다고 하지만, 집집마다 악을 깨닫는 한 사람 때문에 그 사람이 있어서 여기에 여러분이 이렇게 앉아계신 거예요. 할렐루야!
저만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아요. 보통 결혼해서 자기 자식 보고 있다가 아무도 말할 사람이 없어. 근데 우리가 이렇게 한번 사명 감당하려고 간증 한번 했더니 그냥 몇백 명이 듣고 몇천 명이 듣고 이렇게 되지 않아요. 어떤 집사, 아니면 자신의 죄가 안 보이니까 "자기가 바람 한번 펴서 죄패를 이마에다 딱 붙이면 자기도 스타 되는 거 아니냐"고 이런 농담을 하면서. 웃을 일 없는 이 세상에서 즐거워하는 것이 우리 목장이에요. 이런 해석이 산당을 제거하는 해석이고 예배인 거예요. 할렐루야!
이와 반대로 어떤 분이 재혼을 했는데, 남편이 자기 모르게 수백억을 대학에 기증하고 앞으로도 천억을 더 기증한다는 것을 신문을 보고 알았답니다. 그 남편이 나이가 많았는데 부자인 것을 모르고 재혼했다는 거예요. 근데 그때부터 인생이 슬픕니다. "내가 호적상의 부인인데 내 허락 없이 기부할 수 있는가"라며 소송을 벌이고 난리를 친 거예요. 여러분 재클린이 재혼하는 오나시스가 죽고, 사실은 유산은 포기하기로 했었는데 그냥 소송을 해서 2000만 불에 1000억을 받아냈대잖아요. 그 사람은 그러고도 알링턴 공립묘지에서 그냥 케네디와 같이 묻혀가지고 국모처럼 모든 사람의 추모를 받고 있더라고요. 정말 이 세상은 이상한 세상이야. 가치관의 변화로 삶의 질이 달라지는 것이 인류인데, 주님을 만나야 삶의 질이 달라지는 거예요. 그것을 만군의 여호와가 자기 이름을 걸고 말씀하시는데요. 택함을 받지 않은 자의 영광이 80년이라고 해도 너무 짧은 거예요.
산당을 비워놓는 것이 회개가 아니고요, 하나님께 돌아와 예배하는 것이 회개의 완성이에요. 근데 회개가 죽어도 안 되는 것이 심판이에요. 사무엘하 24장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나와 내 아비 집을 치소서 하고 회개한 다윗처럼, 교회와 목장에서 타작을 잘 당해가지고 항상 심판의 말을 잘 들으면, 거기서 쭉 찧어지는 나라하고 알곡이 되어 남은 사람. 거기는 훗날 예수님이 그 자리에 오셨잖아요.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그런 것처럼 우리도 심판의 말을 잘 들으면 알곡이 되어가지고, 여러분이 있는 그곳에 예수님이 임재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스타 탄생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할렐루야!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꾀는 회개예요. 남편이 바람을 펴도 사람을 살리는 스타가 되어서, 진정한 회개가 되어서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분이 가장 인류이고, 이게 산당이 제거되는 비결이고. 그러므로 산당이 제거되는 건 회개이고 회개는 예배의 완성인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