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가 자주 쓰는 말 중에 "독박"이라는 말이 있더라고요. 독박 육아, 독박 간병, 그리고 요즘 같은 휴가철에는 독박 운전도 있대요. 다섯 시간씩 하루 종일 운전을 하면서 같이 타고 있는 가족들은 전부 다 쿨쿨 주무시는 것이죠. 그런데 이 "독박"이라는 말이 어디서 왔을까요? 저도 이번에 알았는데, 이게 화투판에서 왔답니다. "고!"를 외쳤는데 그게 잘못되면 그 모든 벌칙을 혼자서 다 뒤집어쓰는 것을 독박이라고 한다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우리는, 육아든 간병이든 가족이든, 하나님께서 주신 엄청난 선물인데, 이것을 벌칙을 가리키는 용어를 붙여서 쓰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여기에 대한 세상의 해결책이 뭘까요? N분의 1이죠. 그런데 아이가 아파서 자지 않고 잠을 못 자는 그 새벽의 시간은 둘로 나누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에 어떻게 합니까? 둘 중 하나죠. 손절하거나, 오기로 버티거나, 이를 악물고 버티거나.
마침 어제부터 우리가 신명기 큐티를 이제 시작했는데요. 120살 모세의 고별설교, 마지막 설교입니다. 그 첫 장에서 모세가 제일 처음 꺼낸 기억이 뭘까요? 홍해가 갈라진 것일까요? 아니면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 기적과 같은 장면일까요? 그게 아닙니다. "나는 홀로 너희의 짐을 질 수 없도다." 모세도 독박이었던 것이죠. 여러분, 오늘 무엇을 혼자 짊어지고 계십니까? 사람이 무거워서 여기 이 자리에 오신 분도 계실 것이고, 자기 자신이 너무 무거워서 오늘 여기에 나오신 분도 계실 겁니다. 모세의 이 탄식, "나 홀로 어찌"라는 이 탄식에 하나님께서 뭐라고 답을 하시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짐 같아도 별입니다.
9절이에요.
그때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는 홀로 너희의 짐을 질 수 없도다.
모세가 그때를 회상합니다. 바로 왕 앞에 서고, 홍해를 가르고, 수많은 백성을 이끌고 나온 그 모세가 뭐라 그래요? 첫 마디가 "못하겠다" 했어요. 못하겠다. "나는 홀로 너희의 짐을 질 수 없도다." 쉽게 말하면, "나는 너희 자체가 무겁다. 너희가 지금 내가 겨우겨우 짊어지고 있는 짐덩어리다." 지금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세가 광야 40년을 다 지낸 후에, 그 고생을 다 한 후에 말년에 한 고백이 아니라, 광야에 들어서자마자 그 초기에 이런 고백을 했단 말이죠.
그런데 바로 이어서 더 뜻밖의 고백을 합니다. 10절, 11절이에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번성하게 하셨으므로 너희가 오늘날 하늘의 별같이 많거니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현재보다 천 배나 많게 하시며 너희에게 허락하신 것과 같이 너희에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
백성을 짐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뭐라 그럽니까? "하늘의 별"이라는 단어를 써서 이 백성을 또 표현을 합니다. 그러면서 또 "못 지겠다"고 그러더니 이제는 또 어떻게 해요? 천 배나 많아지기를 바란다, 축복을 하는 것이죠. 백성이 많아져서 도대체 좋다는 말이에요? 싫다는 말이에요? 백성이 많아져서 모세가 지금 너무 기뻐하는 겁니까? 아니면 지금 너무 힘들어하는 겁니까? 둘 다 하겠죠? 좋지만 무거운 것이고요, 복인데 또 그만큼 힘든 겁니다. 부부가 복이죠. 그런데 함께 사는 거, 너무 힘들죠. 자녀가 복이에요. 그런데 키우는 거,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사역이 복이지만 그거 감당하는 거, 사실 무거운 일이에요. 복이라고 하지만 그 복도 무게가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해야 되는 것이죠. 복도 무게가 있는 겁니다.
한 성도님이 난임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하시다가 어렵게 아이를 얻으셨는데, 무려 세 쌍둥이를 한 번에 얻으신 거예요. 얼마나 경사예요. 그렇죠? 그런데 이 세 쌍둥이가 너무 예쁘고 귀하고, 진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 세 쌍둥이를 막상 키우다 보니까, 어느 순간 "아, 이거 진짜, 얘네들이 나한테 일만 만들어 놓는 애들이구나." 이런 막 불평이 올라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집에 퇴근하는 것이 마치 출근하는 것과 같은, 집에 일하러 들어가는 것 같은. 감사함의 선물이지만 그 무게가 만만치 않은 것이 우리의 인생인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만나를 주시면 또 만나야, 물 없으면 "애굽에서는 물이라도 있었지", 길이 조금만 힘들면 "야, 우리를 이 광야에서 다 죽이려고 데려왔어." 이러는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이에요. 우리가 그 모습을 볼 때 어떻게 이 사람들은 이럴 수가 있는가 이해가 안 된다, 지금 막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봤잖아요. 그런데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조금만 사는 게 힘들어도 금방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과 똑같은 것을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이 이스라엘 백성을 하늘의 별처럼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백성의 원망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기지 못한 거예요. 그러니 모세를 짓누르고 있는 이 무게, 이것은요 하나님께서 약속을 어기셨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셨다는 증거인 것이죠. 이 많고 번성한, 이 너무 무거운, 혼자 질 수가 없는 이스라엘 백성이 말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천 배나 더 많게 되기를 원한다"고 그랬잖아요. 왜 하필 천 배일까요? 여러분, 지금 이 이스라엘 백성이 대략 싸움에 나갈 수 있는 장정만 60만이에요. 60만만 잡아도 천 배면 몇 명입니까? 아침부터 산수 시켜서 죄송해요. 6억이에요, 6억. 60만도 지금 혼자 질 수 없다고 막 쩔쩔매면서 힘들다고 그러는데, 6억이라면 모세가 그걸 어떻게 감당하겠어요? 그렇죠? 그런데 여기서 "천"은 언약의 숫자인 거예요. 언약, 하나님의 약속. 완전수 10을 완전수 3번을 곱한 거니까. 하나님의 완전한 언약, 영원한 언약을 상징하는 이 수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7장 9절에 보면,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는 하나님." 그러니까 완전히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는 하나님을 천 대까지, 영원히 언약을 이행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한 것이죠. 그리고 "하늘의 별" 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창세기에서 여러 차례 말씀하셨던 그 언약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지금 10절과 11절에서 말하고 있는 여기에, 별과 하늘의 별과 천, 이 언약의 숫자가 지금 여기 채워져 있는 것이죠.
모세는 계산을 한 게 아니라 언약을 붙든 거예요. 혼자 지려는 사람은 짐이 줄어들기를 바랄 거 아니에요. 짐 좀 작아졌으면 좋겠다,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무게 좀 가벼웠으면 좋겠다 이러는데, 오직 신실하신 하나님께 맡긴 사람만 이렇게 천 배를 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별같이 많은 백성이 동시에 모세의 속을 엄청나게 썩이는 것이죠. 12절입니다.
나 홀로 어찌 능히 너희의 괴로운 일과 너희의 힘겨운 일과 너희의 다투는 일을 담당할 수 있으랴.
백성도 지쳐 있었어요. 여러분 너무 잘 아시는 것처럼, 애굽에 누울 집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광야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라도 톡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할 지경의 상태인 거예요. 그러니까 아침에 눈을 뜨면 모세 텐트 앞에, 사막에 있는 모세 텐트 앞에 줄을 잔뜩 서 있습니다. "아, 옆집이 지금 내 염소를 훔쳐왔다고요. 지금 어떻게 좀 해주세요." "아, 지금 저 사람이 어저께 나를 때렸어요. 어떻게 좀 판결 좀 해주세요." 그냥 이게 줄을 아침마다 와서 서 있는 거예요. 200만에 달하는 백성들이 매일매일 같이 톡하면 폭발하는 그 상태에, 200만 명이 매일 그 한정된 장소에서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추운 그 사막 한가운데서 얼마나 불평과 불만과 서로 싸우고 다투는 일이 많았겠어요. 그게 모두 다 모세 한 사람한테 쌓이는 것이죠. 백성이 많아진 건 복이지만 각 사람 안에 있는 죄가 또한 문제도 많이 일으킨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모세라 해도 "나 홀로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이런 탄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모세의 이 말이 불신의 말일까요? 믿음 없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힘들면 어떻게 합니까? 조용히 도망가거나 아니면 오기로 이를 악물고 버티죠. 그러나 도망도 오기도 믿음이 아닌 거예요. 믿음은 내 한계를 인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는 온 백성 앞에서 "나 홀로 어찌"라고 고백했습니다. 눈앞에 반짝이는 사람 하나도 없었을 거예요. 그렇죠? 모세 앞에 반짝이는 사람이 누가 있었겠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별"이라고 지금 비유를 하시기 때문에, 모세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서 이 사람들을 지금 별과 같은 사람이라고, 천 배나 많아지기를 원한다고 그렇게 이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이는 대로 부르지 않고 말씀하신 대로 부르는 거예요.
우리는 왜 그 힘든 저 사람, 그 사람, 여러분 머릿속에 다 한 명씩 떠오르시죠? 힘든 그 사람, 진짜 짐과 같은 그 사람. 내 인생에 어쩌다 하나님께서 저런 짐을 지워주셨나, 그러는 사람들 다 있을 겁니다. 왜 그렇게 짐으로 여기일까요? "나는 괜찮은데, 저 사람이 문제야, 그 사람이 문제야."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씀 앞에 내가 서면, 나도 가족과 지체에게 무거운 짐이었다는 것을 보게 되는 거예요. 무엇보다 우리의 죄가 주님께 얼마나 무거운 짐이었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오늘 여기까지 지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저 사람도, 나를 지금 짓누르고 있는 그 사람도, 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별인 거예요. 우리에게 맡겨진 사람이 무겁다고 해서 저주가 아닙니다. 복인데, 별과 같은 복인데, 무게가 좀 나가는 복. 복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좀 들기가 어렵고 짊어지고 가기가 어렵고, 그게 내 남편일 수 있고 아내일 수 있고 자녀일 수 있고 부모일 수 있고 또 우리 목장 식구들일 수가 있고. 우리는 그걸 짐으로, 너무 무겁게, "어찌 내가 홀로 질 수 있습니까" 이렇게 탄식하지만, 하나님 오늘 말씀하십니다. "그건 짐이 아니라, 짐이기도 하지만, 내 눈에는 별이다. 약속이 담겨 있다. 그 사람을 향한 약속이 담겨 있고, 내가 그 짐과 같은 사람을 너에게 맡긴, 너를 향한 약속도 담겨 있다. 내가 너를 별로 보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담긴 줄 믿습니다.
한 성도님이 남편 때문에 많이 힘드셨대요. 남편의 화가 너무 심하셨던 것이죠.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둘이서 얘기하다가 이렇게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아, 나는 같이 살기에는 너무 힘든 사람이야." 이런 고백을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이후에, 남편이 평소와 똑같이 여전한 방식으로 욱하거나 막 큰 소리를 내도 이게 타격이 덜하게 됐다는 것이죠. 남편의 화가 줄어든 것도 아니고 이분이 믿음이 그 사이에 굉장히 잘한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어쨌든 그 고백을 들은 이후에, 평소 같으면 막 싸우고 이제 그 난리가 나는데, 싸움이 잦아들었다는 겁니다. 자기 무게를 인정하는 이 남편분의 고백, "나는 같이 살기 진짜 힘든 사람이야." 자기를 좀 보신 그 고백이 옆 사람의 짐을 좀 가볍게 했다는 것이죠. 남편 집사님, 이런 대단한 믿음의 고백을 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아내분의 짐도 좀 같이 잘 지시길 바랍니다. 우리도 나만 짐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시지 마시고, 그 짐이 하나님이 맡기신 별인 줄 믿으시고 같이 잘 지면서 가시면 좋겠습니다.
적용 질문이에요.
내게 짐처럼 무거운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를 버리고 도망가려 합니까? 아니면 오기로 혼자 감당하려 합니까?
그가 짐 같아도 별임을 믿음으로 고백하실 수 있습니까?
둘째, 함께 질 사람을 세우십니다.
13절, 15절이에요.
너희의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인정받는 자들을 택하라 내가 그들을 세워 너희 수령을 삼으리라 한즉 너희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당신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좋다 하기에 내가 너희 지파의 수령으로 지혜가 있고 인정받는 자들을 취하여 너희의 수령을 삼되 곧 각 지파를 따라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과 조장을 삼고.
홀로 질 수 없다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답이 뭡니까? 더 강한 모세? 아니에요. 더 가벼운 짐?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답은 함께 질 사람들, 그 짐을 나눠서 질 사람들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짐을 없애주시기보다는 그 짐을 함께 질 어깨를 더해주신 것이죠. 그런데 아무나 이 어깨로 세우신 것이 아니에요. 말 잘하는 사람, 목소리 큰 사람, 힘 센 사람, 이런 사람들을 세우신 것이 아니에요. 이를 바르게 처리할 줄 아는 지혜가 있는 사람, 그리고 상황을 분별할 수 있는 지식이 있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옆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아, 저 사람이면 맡길 수 있겠다"라고 인정받는 사람들을 세우십니다.
함께 짐을 질 수 있는 사람은요, 화려한 능력자가 아니라 그 짐을 그냥 질 수 있는 사람이에요. 인생의 짐을 지고 있는 사람. 그래서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짐을 함께 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혼자서 이런 사람들을 정해서 자기가 꽂아놓은 게 아니에요. 백성의 동의를 받아서, "이렇게 하면 어떨까?" 백성이 "좋습니다." 이 동의를 받아서 각 지파가 직접 그 사람들을 택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천부장부터 조장까지 세우신 것처럼, 우리들 공동체에도 평원지기와 초원지기, 또 마을지기, 목자, 부목자, 이렇게 세워주셨어요. 여러분, 이름도 "지기"예요. 그렇죠? 지기. 지는 분들, 지는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무도 혼자 끙끙대다가 무너지지 않도록, 같이 우리 인생의 짐을 지도록, 같이 고난의 짐을 지도록, 공동체에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순서를 잘 보세요. 우리는 뭔가 조직을 세우고 시스템을 만들어야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을 하잖아요. 그런데 오늘 말씀의 순서를 보시면, 말씀으로 짐을 지는, 짐에 관한 모세의 고백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이제 이 조직이 나온다는 것이죠. 제가 목사님께 배운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말씀으로 서로 짐을 지다 보니까, 열세 가정이 처음에 모여서부터 말씀으로 서로 짐을 지다 보니까 저절로 조직이 필요에 따라서 세워졌고, 그리고 저절로 천 배가 됐잖아요. 열세 가정에서 지금 보면 천 배 이상의 축복을 받은 것이잖아요.
그런데 이제 이 말씀을 듣고 제가 제 자신을 생각해 보니까, 저는 그 순서가 완전히 정반대였더라고요. 저는 천 배부터 생각을 했습니다. 넘버 게임을 했던 것이죠. 숫자로 천 배의 부흥을 이루어서 내가 뭔가를 보여주겠다, 뭔가를 이루겠다. 제가 사실은 체면과 교양이 있다 보니까 이걸 대놓고 하진 않았어요. "아, 나는 뭐 그렇게 큰 거 하지 않아요. 그냥 맡기시는 거 충성하겠어요." 그랬지만 속으로 그런 욕심과 야망이 왜 없었겠습니까? 아직도 지금 사실은 있는 것 같아요. 아무리 제가 생각해도 부인할 수 없는 저의 야망이라고 해야 될까요, 욕심이라고 해야 될까요? 저는요, 우리 큐티인 사역이 천 배로 부흥하기를 너무너무너무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게 돼야 되겠죠? 다른 뭐 그게 다른 이유에서 그런 게 아니라, 제가 그 큐티인을 통해서 살아났잖아요, 여러분. 이 큐티인을 통해서 저처럼 살아나는 사람들이 천 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해서 우리들교회를 끝까지 잘 사용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지금도 이렇게 이 사명이라고 사실은 제가 이야기를 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는 저는 늘 이 조직을 통해서, 또 시스템을 통해서, 효율성을 통해서 이것을 이뤄보려는 그러한 인간적인 생각들이 제 안에 많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같이 일하는 직원들이 저 때문에 많이 수고를 할 텐데요. 그러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을 해야 될 것은, 좋은 조직을 원한다고 내가 바라는 일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말씀으로 먼저 내가 살아나고, 오늘 간증한 자매처럼, 그리고 그 말씀대로 짐을 같이 지는 그 적용을 해 갈 때, 어느 조직이든 어느 공동체든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천 배의 복을 다 감당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셔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사람이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관중석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앞에서 책임지고, 누군가는 또 옆에서 함께 들어주고, 누군가는 또 뒤에서 이렇게 밀어줘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 모두가 함께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일에 함께 동참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내 말을 들어줄 목자도 우리에게 두셨고, 함께 울어줄 지체도 우리 옆에 두셨습니다. 그런데 목장에서 "이번 주 기도 제목 뭐예요?" 하면 "아, 이번 주 뭐 특별한 거 별로 없어요." 이럴 때가 종종 있어요. 그런데 집에 돌아가서는 혼자 고민하고 탄식하고 우는 것이죠.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는 보이고 싶은데 도움 받는 사람으로는 보이기 싫은 것이 또 우리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한 성도님 나눔이에요. 일이 잘 될 때는 "하나님께서 하셨다" 이렇게 막 고백하고 감사했지만, 일이 풀리지 않자 교회도 큐티도 목장도 다 싫다는 거예요. 여러분도 그런 적이 있으신가요? 그런데 이 자존심 때문에 공동체의 기도 부탁도 못하다가,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시는데 자존심 때문에 기도 부탁을 못했다는 거예요. 마감 직전에야 겨우겨우, 너무 중요한 일이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기도 요청을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실 조금만 더 일찍 목장에 기도 요청을 하셨으면 함께 기도해주고 같이 나눠주고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그 더 큰 복을 받으실 수 있었을 텐데요. 그런데 어쨌든 마감에 임박해서라도, 늦게라도 자존심 내리시고 기도 부탁하신 거, 너무 잘하신 거예요. 그런데 이분이 이런 경험을 거치면서 앞으로는 새로운 프로젝트는, 또 그게 어려울 때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공동체에 꼭 기도 부탁을 일찍 하겠다고 이렇게 나누셨더라고요. 꼭 그렇게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자기 기도 제목만 부탁하실 게 아니라 다른 지체들의 기도 제목도 같이 함께 기도해주시는 더 큰 복을 누리셨으면 좋겠고요. 이러한 복을 우리 모두가 같이 목장에서 누리고 계신 줄 믿고, 더 풍성하게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목장에서 짐을 꺼내놓는 건 약해지는 게 아니에요.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닙니다. 은혜 받던 그 첫 자리,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신 그 첫 번째 자리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걸 기억하는 겁니다. 그러니 절대로 우리가 혼자 견딜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다 구해내겠다고 나설 수는 없어요. 우리 중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나는 상관없다고 빠져서도 안 되는 거예요. 우리 중에 아무도 구원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 아무도 구경꾼도 아닌 거예요.
적용 질문이에요.
내 짐을 함께 져주는데 내가 고마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입니까?
자존심 때문에 혼자 버티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누구의 짐을 함께 지고 있습니까?
셋째, 재판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16절, 18절이에요.
내가 그때에 너희의 재판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너희의 형제 중에서 송사를 들을 때에 쌍방간에 공정히 판결할 것이며 그들 중에 있는 타국인에게도 그리할 것이라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할 때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차별 없이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거든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 하였고 내가 너희의 행할 모든 일을 그때에 너희에게 다 명령하였느니라.
세워진 지도자들의 가장 무거운 책임은 다른 것이 아니라, 송사를 듣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재판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재판장도 죄인이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편을 들 수밖에 없는 것이고요, 또 사람 얼굴 보고서 판단하기 마련이었을 거예요. 그래서 이 재판장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생각을 해보면, 그것은 재판장이 탕탕탕 두드리는 이 법봉이 아니라 "귀"였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16절에 "송사를 들을 때에"라고 해서 잘 드러나진 않지만, 원문은 이게 명령이에요, 명령. "들으라! 그리고 판결하라! 들으라! 그리고 판결하라!" 바른 판단은 잘 듣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이죠. 말 잘하는 것, 많이 아는 것, 여기에서 바른 판단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잘 듣는 데서 판단이 나오는 겁니다. 내 형제, 내 편, 내가 좋아하는 사람 말만 들은 게 아니라, 본문에도 보면 아무 연줄도 없고 뒤를 봐줄 사람이 없는 그러한 타국인의 말도, 그러니까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 우리와 상관없는 사람,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의 말도 이 판단 앞에서는 똑같이 잘 들으려고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듣기 전에 이미 판단할 때가 너무 많죠. 아내가 세 마디 하기도 전에 "또 그 소리야!" 이렇게 하잖아요. 아이가 뭔가를 설명하려고 하면 말을 듣기도 전에 표정만 보고서 "아, 네가 잘못했네!" 이러는 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친한 사람에게는 "뭔가 사정이 있겠지" 하지만, 미워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네, 그럴 줄 알았다!" 그러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에요. 내 편 말은 확성기처럼 크게 듣고 남의 편 말은 음소거를 시켜버립니다. 저마다 이런 재판관이 되어서 다 각자의 판단을 하니까 우리 사는 세상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충돌이 많겠어요. 우리는 좋아서 한쪽으로 기우는가 하면 또 싫어서 한쪽으로 굽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한 처방으로 모세가 오늘 뭐라고 말하나요?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재판만 아니라 모든 판단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이죠. 우리가 대법관이 아니라는 거예요. 최종 판결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기분이 판결문이 아니고, 내가 가진 사상이나 이념이 기준이 아니고, 내 확신이 하나님의 뜻 그 자체도 아니라는 겁니다. 또 그렇다고 아무 판단도 하지 말라는 건 아니지만요. 끝까지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서 바르게 분별하되, 그 판단을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최종 판결이냥 다른 사람을 향해서 휘두르지 말라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세상의 모든 시비를 다 내가 가려야 된다는 그 쓸데없는 짐으로부터 내가 자유로울 수도 있는 것이고요. 사람의 낯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것이죠. 왜냐하면 최종 결재권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에요. 책임지시는 분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 생길 거 아니에요. 그럴 땐 어떻게 하라고 해요? 모세가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 모세도 듣는다고 해요. 혼자 결론 내리지 말라는 걸 다시 한번 얘기하는 겁니다. 우리는 혼자 생각할수록, 혼자 내 생각에 빠져있을수록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맞는데" 이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결론은 결국에 내 머릿속 법정 속에서 내가 검사가 되고 또 증인도 서고 판사가 되어서 결론을 내리는 그 생각일 뿐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말씀 앞으로 가져가야 되는 거예요. 무엇을요?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감정과 우리의 원함과 우리의 의지, 우리 속에 있는 이 모든 것들을 날마다 말씀 앞에 가져가야 되는 것이고요, 그다음에 주마다 한 번씩 목장에 가서 그것을 또 다 꺼내놔야 되는 겁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물어야 되는 것이죠. 사람 얼굴을 보면 판단이 휠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을 보면 다시 서게 됩니다.
짐은 여러분 함께 지십시오. 가족과 짐을 함께 나누어 지시고 지체들과 함께 나누어 지시고, 여러분 삶의 자리에서 짐은 서로 나눠지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리에는 그 누구도 앉아서는 안 되겠어요. 내게 잘못이 없다고, 내가 맞는 것 같다고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판단을 내리고 최종 결정을 내리고 답을 내리는 그것은 우리가 하면 안 되겠습니다. 왜냐?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에요. 모든 판단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적용 질문이에요.
누구의 말은 듣기도 전에 옳다 하고, 누구의 말은 듣기도 전에 틀렸다 그럽니까?
혼자 판결하지 말고 목장에 가져가야 될 일은 무엇입니까?
한 성도님은 어렸을 때부터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하고 풀어야 되는 그런 환경에서 자라셨대요. 묻고 의논하는 대신에 혼자 판단하고 결정해서 통보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셨답니다. 거절받고 비난받는 것이 두려워서 아내와의 소통도 잘 하지 않으셨대요. 그러다가 최근에 아내 몰래 퇴직금을 미리 당겨 받아서 그 큰 돈을 투자를 하신 거예요. 근데 끝까지 숨길 수 있는 일이 어디 있겠어요. 이게 이제 드러나서 아내와 엄청난 전쟁을 치르면서 집안에 이제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이 사건을 거치면서 생각을 하신 거예요. "도대체 내 문제의 근원이 뭘까, 왜 이런 일이 이렇게 일어날까." 공동체에 들어와 있으니까, "재판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이 공동체에 들어와 있으니까, 평생을 그냥 자기 혼자 결정하고 자기 혼자 생각하고 자기 혼자 하던 분도 이런 생각의 시스템이, 여러분들이 서로 말씀으로 짐을 져주는 여러분들이 적용을 하시면서 가시다 보니까, 그런 시스템이 없던 우리 같은 사람들도 그런 시스템이 이제 생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목장에서 나누시는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요, 그게 찌질한 것도 아니고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내가 약한 게 아니라요, 그 나눔과 그 적용하는 것, 그 탄식하는 그것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본보기를 보여주시는 거라고요. 목장 식구들에게. 그래서 그 모습을 보면서 전혀 그런 걸 모르던 분들도 생각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 이 심각한 고민을 하시면서 깨달으신 것이 뭐냐면, 이렇게 혼자서 모든 걸 결정하고 해결하려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이게 내 안에 있는 우상이구나, 라는 것을 깨달으셨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이게 뭐 그걸 가지고 그래" 하지만, 제가 이분의 마음이 공감이 좀 되더라고요. 정말 이거 보시기가 너무 힘드셨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분에게는 이게 책임감이거든요. 이게 능력이거든요. "가장으로서 내가 모든 걸 해결한다. 내가 책임진다. 내가 다 알아서 한다. 신경 쓰게 하지 않는다." 이게 그러니까 장점이에요, 능력인 거예요. 평생 그렇게 살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아, 이게 우상이구나." 이걸 깨달으셨다는 거는 여러분, 진짜 엄청난 고백인 것처럼 저는 생각이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이제 이런 문제들을 아들에게 상의를 했더니 아들이 한 말이 기가 막히더라고요. 아들이 이렇게 얘기를 했대요. "모든 경제권을 엄마에게 넘기세요." 그랬다는 거예요. 저 같으면 아들이 저한테 그런 얘기를 했으면 앞에서야 "그럴까" 했지만 절대 그렇게 못했을 텐데, 이분은 이 말을 듣자마자 자기 통장에 있는 모든 돈을 아내에게 다 보내셨다는 것이죠. 그런데 더 놀라운 게 있습니다. 이분의 직업은 재정 전문가입니다. 돈의 흐름을 알고 누구보다 돈이 어떻게 도는지를 아는 전문가신 거예요. 이 전문가가 이 아들의 말을 듣고 자기의 모든 통장 돈을 아내분에게 보내드렸다는 거, 적용 맞죠? 이 적용이에요. 그러면서 앞으로는 이렇게 나누셨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혼자 판단하거나 결정하지 않고 아내에게 꼭 묻고 상의하겠다고, 그리고 목장과 공동체에서 오픈해서 묻겠다"고 하셨습니다.
꼭 그렇게 하시기를 바라고요. 그리고 지금 중요한 문제만 얘기를 했는데요, 사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중요한지 중요하지 않은지 어떻게 판단하겠어요. 판단 못해요. 재판은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중에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반대의 경우도 많죠. 우리는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고도 판단할 수 없는 존재인 거예요. 나 홀로 어찌 그런 것들을 다 판단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이 뭐예요? 무슨 일이든, 무슨 문제든, 크든 작든, 사소하건 부끄러운 일이건 무엇이든 간에, 하여튼 믿음의 공동체, 말씀 있는 공동체에서 말씀으로 나누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나눔을 들으시고, 모든 재판을 소유하신, 재판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말씀의 공동체를 통해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무슨 일이든 우리가 잘 나누고 들으시면서 주님의 인도함을 받으시길 바라요.
말씀 맺습니다.
"나 홀로 어찌." 정말 우리 여러분, 나 홀로 어찌 탄식할 때가 너무 많은 인생이잖아요. 그런 우리에게 오늘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짐 같아도 별이라고. 네가 그렇게 짐처럼 무겁다고 불평하는 그것이 별이라고 말씀해 주세요. 그리고 함께 질 사람들 세우십니다. 우리 옆에 함께 질 수 있는 사람들 다 두셨어요. 그리고 재판은 하나님께 속해요.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거예요.
우리 삶을 다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오늘 그런 마음으로 이 자리에 오신 분도 계실 거예요. 그러나 광야 같은 우리 인생을 주님이 안고 오셨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안는 듯 우리를 하나님이 꼭 안으시고 데리고 가시는 거예요. 독박인 줄 알았는데 독박이 아니라 하나님께 안겨서 하나님과 같이 온 것이죠. 우린 자기 삶 하나도 홀로 질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아시고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제일 무거운 짐이 뭐예요?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죄의 짐이죠. 이 죄 짐을 우리 주님이 져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모든 문제와 고난과 사건의 이 무거운 짐들을 믿음의 지체들과 함께 질 수 있는 거예요. 혼자 버티던 그 손을 펴고 오늘 우리의 죄짐과 걱정과 이 무거운 짐을 주님께 맡기면서 함께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