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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23:1-7

영원한 언약

이성훈F조회 259

사무엘하 23:1-7

1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 2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5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6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버려질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 7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하리니 그것들이 당장에 불살리리로다 하니라

오늘 본문은요, 우리 목사님께서 11년, 벌써 11년이 지났네요, 전에 "마지막 말"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해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저도 이 설교 준비하면서 같은 본문이니까 더 집중해서 읽으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요. 목사님께서 설교해 두신 게 많기 때문에 저희 같은 사역자들이 너무 감사한 것 같아요. 오늘 영원한 언약을 믿음의 유산으로 받는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저도 이렇게 물려받은 것으로 설교할 수 있어서 더 감사합니다.

그런데 오늘 제목은 "영원한 언약"이잖아요. 우리 늘 듣는, 자주 듣는 말이기 때문에 "아, 영원한 언약도 이제 그 말이구나, 좀 짧게라도 끝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계시죠? 제가 여러분들의 생각을, 저도 그 자리에 앉아있기 때문에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이건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이 "영원한 언약"이 너무 흔한 단어인데, 늘 말하는 단어인데, 여호수아부터 열왕기하까지가 이스라엘 역사잖아요. 긴 역사인데, 그 여호수아부터 열왕기하까지 "영원한 언약"이라는 단어가 기록된 곳이 딱 한 곳이에요. 딱 한 곳. 그게 바로 오늘 본문 5절입니다. 뭔가 특별한 게 있지 않으세요? 게다가 더 놀라운 거는, 이 말을 한 사람, 이 단어를 말한 사람이 누구냐. 인생에 꽃이 활짝 핀 그 절정기의 왕이 아닙니다. 집안이 흔들릴 대로 다 흔들린 그 인생 말년에 다윗이 붙든 단어가 "영원한 언약"이라는 것이죠. 다 무너져 본 사람, 그래서 생의 끝자락에서, 다 무너져 본 그 사람이 생의 끝자락에서 잡은 단어가, 그 마지막 말을 하면서 기억한 단어가 이 "영원한 언약"이라는 거예요.

게다가 이 "영원"이라는 단어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것과는 또 의미가 좀 다릅니다. 우리 "영원"이라고 하면 뭘 생각합니까? 저 시간 바깥에 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저 시간 바깥에, 저 우주 바깥에 뭔가 초월한, 우리 알 수 없는 뭐 그런 걸 떠올리잖아요. 그러나 오늘 "영원한 언약"에서 말하는 이 언약은 우리의 집, 우리의 일상에서, 좋은 날에도 나쁜 날에도 변함없이 계속 이어가시는, 끝까지 이어가시는, 계속되는 그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거예요.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 삶에 끝까지 이어가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말합니다.

우리 인생과 가정이 다윗의 집처럼 흔들릴 때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흔들흔들, 휘청휘청. 아무리 안전하게 지키려고 해도 늘 흔들리는 게 우리 인생이고 우리 집인데, 그러나 오늘 하나님이 영원한 언약으로 붙들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붙들어주실까요?

첫째, 여호와의 영이 나를 세우십니다.

성령의 역사에요. 1절 말씀이에요.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하며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

다윗의 마지막 말은 임종 직전에 남긴 유언이 아닙니다. 40년 나라를 다스린 왕이 인생 전체를 이제 돌아보면서 그 결산에서 백성들 앞에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거예요. 최후의 선포입니다. 그런데 그 첫 마디가 정말 뜻밖이에요. 뭐라고 소개해요? "이새의 아들 다윗." 이건 영광의 호칭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다윗을 깎아내릴 때 부르던 말이에요. 사울이 신하들 앞에서 뭐라고 그랬어요?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밭과 포도원을 주었느냐." 이새의 아들이, 이건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니라 비웃은 것이죠. 조롱하는 것이죠. 그리고 지난주에 본 대로 세바가 반역을 일으킬 때 뭐라고 그랬어요? "우리가 이새의 아들에게 받을 유산이 없다" 그랬잖아요. 이새의 아들이라는 건 다윗이 가진 많은 명함 중에 제일 부끄러운 명함, 제일 초라한 명함이 바로 이새의 아들이라는 명함인데, 이것을 그 중대한 마지막 말을 전하는 그 상황의 제일 앞에다 붙여놓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새의 아들 같은 것들이 사실 다 하나씩 있지 않습니까? 남들 앞에서 제일 먼저 지우고 싶은 그 이름, 그 기억, 그 상황, 그 삶의 모습들. 내세울 것 없는 집안과 학벌, 실패한 사업과 또 초라한 직장에서의 직함. 뭐 이런 것들. 우리는 우리의 지위와 성취와 돈과 또 자녀의 성적 등등으로 이걸 자꾸만 가리려고 그렇게 우리가 사실 열심히 살아갑니다. 왜 그렇게 지우고 싶을까요? 그 이름이 드러나는 순간 내 값어치가 폭락할 것 같은 그런 두려움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아이 성적표 한 장에 또 배우자의 말 한마디에 폭발하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그게 정말 그 일 때문에, 성적표 그것 때문에, 말 한마디 때문에 그럴까요? 많은 경우 내 안에 건드려진 것은 그 말 한마디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이새의 아들"이에요.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가? 이게 드러나면 어떡하지? 들키면 어떡하지? 걸리면 어떡하지?" 이 두려움, 이 불안함이 건드려졌기 때문에 폭발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큰 소리로 덮어보려고, 힘으로 덮어보려고, 여러 가지 이것저것으로 덮어보려고 우리가 그렇게 애를 씁니다. 그러나 큰 목소리는 그렇게 흔들리는 집을 붙들기는커녕 더 흔들어 놓는 것이죠.

어느 남편 집사님이 평소 순두부를 너무 좋아하셔서 순두부 사다 달라고 아내한테 부탁을 하셨대요. 그런데 아내가 그걸 사러 가서 남편이 사다 달라고 한 걸 보니까 원산지가 미심쩍은 거예요. 그래서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하다가 제일 좋은 순두부를 골라서 사다 왔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일로 이 두 부부가 대판 싸운 거예요. 세상에서 제일 부드러운 음식 순두부를 놓고서 이 두 부부가 전혀 부드럽지 않은 모습으로 부딪힌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남편 집사님께서 목장에서 나누시기를, 화가 난 거는 순두부가 아니라는 것이죠. 순두부 때문에 화가 난 게 아니라, 자기가 어떤 순두부 사올지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는데 그거 하나도 안 듣고 다른 거를 턱 사오니 "무시당했구나, 내가 무시당했구나" 이게 그냥 찔려가지고 폭발을 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적 있으시죠? 저도 진짜 이렇게 있는 것 같더라고요. 건드려진 건 내 안에 있는 그 자존심이고요. 그 자존심은 다른 게 아니라 내가 감추고 싶은 나의 명함, "이새의 아들"이라는 그 부끄러운 나의 모습이 드러날까봐 감추려는 그 자존심, 그게 이제 폭발하게 만든 원인이라고 생각해요.

여러분의 순두부는 무엇이 있으세요? 저도 이새의 아들이 뭘까 이렇게 생각을 해봤더니 "이혼당할 뻔한 목사." 여러분은 잘 와닿지 않으시겠지만, 저는 저희 가족들이 제가 이렇게 설교하고 그러면 굉장히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구속사가 깨달아지지 않는 분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혼당할 뻔한 목사"라고 하면 자기관리가 제대로 안 된 사람으로 연결이 되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걱정을 막 하시더라고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저는 그게 이제 이새의 아들과 같은, 좀 웬만하면 드러내놓고 싶지 않은 그런 게 될 수 있겠죠. 그런데 사실 제가 그거 없으면 어떻게 말씀 전하면서 살겠어요. 그러니까 이제 이걸 제일 앞에 붙여놓고, 그래서 진짜 이런 게 저는 진짜 아무것도 별것도 없지만 이게 이렇게 생각이 되더라고요.

여러분 중에 이렇게 순두부 얘기하니까 "나는 그렇게 소리친 적 없는데, 나는 그렇게 화내지 않아" 라고 하시는 분들이 또 계실 거예요. 그런데 이게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부족해서 안 돼, 아유 나 같은 경우에 내가 뭐 목소리 내봤자 뭐해" 이렇게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우리가 엉거주춤 뒤로 물러나는 그런 사람들도 뿌리는 똑같은 겁니다. 교만은 내 값을 내가 비싸게 매기는 것이잖아요. 그렇죠? 열등감은 내 값을 내가 스스로 값싸게 매기는 거예요. 뿌리는 똑같은 것이죠. 값을 매기는 것이 바로 내 자신이라는 겁니다.

다윗은 자기 값을 자기가 매기지 않아요. 누구를 부릅니까? 야곱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의 값을 매겨주신다는 겁니다. 높이 세워주셨다는 거예요. 야곱과 같이 속이고 거짓말하고 이런 존재를 높이 세워주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가 값을 매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잘난 다윗을 스카우트하신 게 아닙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내가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양 냄새 나는 그 목동, 이새의 첫째 아들도 아니고 둘째 아들도 아니고 막내 아들을 하나님께서 데려다가 왕을 삼으신 것을 다윗이 너무 잘 아는 것이죠. 내가 지우고 싶은 그 이름이 바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시는 자리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디에서 데려오셨는지 그걸 생각해보세요. 저 같은 경우는 진짜 이혼당할 뻔한 그 목사, 그 남편의 자리에서 저를 불러주셨다는 거, 그게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러나 그 이름을 지워버리면 내 은혜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다윗의 마지막 말에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했다"라는 말을 오늘 본문에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내가 높이 섰다"가 아니라 "높이 세워진 자", "내가 왕이 되었다"가 아니라 "기름 부음 받은 자." 전부 하나님이시죠. 다윗이 기름 부음 받던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러분 기억하시나요? 사무엘상 16장 13절입니다.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기름 부음 받는 날 감동되었다는 것은 마음이 뭉클해졌다는 게 아니죠. 물론 뭉클해진 것도 포함되겠지만 그게 본질이 아닌 거예요. 본질은 뭐냐, 여호와의 영이 다윗을 붙드셨다, 그리고 쓰기 시작하셨다는 거예요. 그게 감동입니다. 쓰임받는 거,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서 쓰임받는 거, 부르심을 받아서 쓰임받는 거, 그게 이제 영의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도 성령에 크게 감동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 이 다윗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었다 바로 뒤따라 나오는 절이 뭐였냐면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사울은 정말 다 갖춘 사람입니다. 외모부터 시작해서 지도력과 성품과 지위까지 모든 스펙을 다 갖춘 사람이 바로 사울이었어요. 그러나 사울에게서 여호와의 영이 떠나시니 사울이 무너져 내리는 겁니다. 사람을 높이 세우는 것은 그 사람이 쌓아올린 조건이 아니에요. 스펙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영이신 거예요. 그 영이 다윗 인생에 맺으신 열매가 바로 노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을 뭐라고 소개해요?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라고 소개하잖아요. 시편 150편 절반 가까이가 다윗의 시편입니다. 성령에 감동되어 부른 노래인 거예요. 그래서 다윗은 마지막 말에 여호와의 영이라는 이름을 빼놓을 수가 없었어요. 2절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시며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다윗이 인생의 끝에서 제일 높이 여긴 자리, 그 자리가 어디였을까요? 그건 왕의 자리가 아니에요. 그건 혀예요. 무슨 혀? 성령의 말씀을 담은 혀. 성령에 감동되어서 성령의 말씀을 하게 하시는, 성령의 노래를 부르게 하시는, 그 입을 다윗은 자기 인생에서 제일 귀한, 제일 높은 곳으로 지금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성령께서 나를 세우신다는 것은 내 목소리 볼륨을 키워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혀에서, 내 입에서 내 목소리를 내리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 대신 그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을 세우시는 겁니다. 우리에게도 마지막 날 마지막 말을 할 그날이 옵니다. 다윗의 마지막 말은 하루아침에 만들어낸 게 아니죠. 평생 시편을 노래한 그 혀, 그 혀가 평생을 거쳐서 준비한 말인 거예요. 우리의 마지막 말도요, 지금 이 시간 준비되고 있는 거예요. 그날 내 혀에서 나올 말은 오늘 내 혀에 있는 말인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내 혀에 담는 말부터 우리가 바꾸면 좋겠어요. 내 이새의 아들을 덮으려는 그러한 말 대신에, 날마다 큐티를 통해서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우리 입에 담읍시다. 그 말씀을 통해서 성령께서는 우리를 세워가실 줄 믿습니다.

적용 질문이에요.

  • 최근 누구 앞에서 화를 내거나 기가 죽었습니까? 그 순간 드러날까 두려웠던 나의 이새의 아들은 무엇입니까?

  • 바로 그 이름 위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다면 그 사람에게 어떤 말을 다시 건네겠습니까?

둘째, 참된 왕이 나를 살리십니다.

이건 성자 하나님, 그리스도의 역사입니다. 3절이에요.

이스라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요.

밑줄을 그어야 될 부분이 "내게 이르시기를"입니다. 다윗은 왕임에도 불구하고 통치의 기준을 자기가 만들지 않았어요. 자기 말을 기준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였어요. 그걸 들었습니다. 자기가 기준을 만드는 사람은요 주변 사람들을 얼어붙게 하죠. 여러분, 사울이 묻는 장면이 없잖아요. 사울은 늘 자기가 생각하고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가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자기 기분이 사울에게는 기준이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이 그렇게 자기 아플 때 와서 노래해주고 수금을 켜주는 그 다윗이 자기 기분이 틀리면 어떻게 했어요? 창을 던져서 죽이려고 하잖아요. 주변 사람들을 이렇게 다 얼어붙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을 듣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주변 사람들을 살아나게 하는 것이죠.

다윗이 하나님을 뭐라고 부릅니까? 이스라엘의 반석. 시편에서 다윗의 시편 보면 "반석"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많이 나와요. 여러분, 흔들리는 인생을 살면서, 깨지는 인생을 살면서, 산에 있는 바위를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것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왜요? 자기 인생이 깨지고 있으니까, 자기 인생이 휘청거리니까. 반석을 볼 때마다 "하나님, 제 인생을 좀 저 반석 위에 세워주세요. 반석이신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좀 도와주세요" 기도했다는 그 증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반석, 반석, 반석. 이스라엘의 반석. 하나님을 지금 이스라엘의 반석이라고 다시 부르고 있는 겁니다. 쫓기고 흔들리던 세월 내내 불러왔던 그 이름인 것이죠. 다윗은 이제 늙었지만 반석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반석이신 하나님께서 왕의 통치 기준 두 가지를 말씀해주신다고 그러죠. 뭐예요? 공의와 하나님을 경외함이 두 가지인 거예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나도 하나님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알잖아요. 그래야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을 수 있는 거예요. 그게 공의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먼저고 그게 뿌리고, 그 열매가 공의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신명기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왕이 될 사람에게 두 가지 숙제를 딱 주세요. 뭐냐? "율법책을 손수 베껴 써라. 이거 서기관한테 맡기지 말고 네가 율법책을 손수 베껴 써라. 그리고 평생 그 베껴 쓴 것을 옆에 두고 읽어라." 이거 뭐예요? 이거 우리가 맨날 하는 쓰면서 하는 큐티, 이거 하라고 하나님께서 왕이 될 사람에게 이거 시키신 거예요. 근데 왜요? 왜 이걸 시키셨느냐, 뭐라고 그러냐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기 위해서." 날마다 성경을 베껴 쓰고 그리고 그것을 날마다 읽어라. 그래야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죠. 경외(믿음)는 우리가 타고나는 성품이 아닌 거예요. 경외(믿음)는 이렇게 날마다 말씀 앞에 서는 그 훈련을 통해서, 그 큐티하는 습관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는 것이죠. 우리가 배워가는 겁니다. 그래야 이제 공의가 생겨서 통치도 잘하게 된다는 말씀인 것이죠.

여러분, 이게 왕만의 이야기일까요? 부모가 하나님 집에서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잃어버리면, 그리고 자기 기분이 그 자리에 앉아서 자녀들이 부모 눈치만 보면서 살아가는 걸 우리는 우리 가정에서 너무 많이 보고 있습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죠. 우리 집에도 분명 두려운 대상이 있어요. 그렇죠? 여러분 집에 다 두려운 대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기분이라면 그 가정은 겉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속으로는 이미 뭔가가 문제가 있는 거예요. 흔들리고 있는 겁니다. 다윗의 세계도 그 공의가, 하나님 경외하는 것이 무너진 날이 있었죠. 경외가 무너지자 어떻게 됐어요? 공의가 무너졌습니다. 공의가 무너지자 어떻게 했습니까? 사람이 죽었어요. 밧세바를 취했고 그걸 감추려고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아를 죽였습니다. 살리라고 맡기신 그 권력으로 자기를 제일 섬기는 그 부하를 죽인 거예요.

그렇다면 참된 다스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대해서 길게 설명하지 않으시고 그림 한 폭을 딱 보여주세요. 여러분, 머릿속으로 한번 그림을 그리면서 읽어보십시오. 4절이에요.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에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그림을 그려보시죠. 밤새 비가 내렸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는데 구름 한 점 없어요. 거기에 해가 쫙 떠오르는 거예요. 그 빛이 젖은 땅에 딱 비추자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그 풀이 돋아난다는 거예요. 새풀이 돋아난다는 거예요. 이 그림에서 풀은 누구일까요? 왕을 포함한 백성 전체인 것이죠. 여러분, 해가 풀을 잡아당기나요? 그렇지 않아요. 풀에게 소리 지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해는 빛을 비추는 거예요. 그러면 풀이 싹이 나고 돋아나고 자란다는 겁니다. 이런 분 여러분 주변에 계십니까? 여러분 가정에서, 또 우리 교회에서 이런 분 계십니까? 그분 앞에만 가면 이상하게 내가 잘하는 것 같고, 실수했는데 다시 해보고 싶고, 그러한 격려를 받는 그런 분들. 여러분이 이런 사람 만나시고 또 이런 사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물론 반대도 있죠. 전혀 정반대 사람도 있어요. 그 사람이 출근하면 사무실이 그냥 얼음장이 되고, 그 사람이 현관에 들어가면 아이들이 슬금슬금 방으로 다 도망가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이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제가 그래요. 제가 생각해보니까 제가 그렇더라고요. 신학생 때 신학생들이 모여서 신학에 대해서 목회에 대해서 토론을 하잖아요. 제가 기다리다가 발언을 딱 하고 나면 이상하게 조용해지는 거예요. 썰렁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런 경험들을 하면서 오랫동안 어떻게 생각을 했냐, "내가 너무 명쾌한 정답을 내놓으니까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거구나, 내가 결론을 내줬구나."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살았어요. 진짜로 저는 제가 정확한 기준을 잘 듣고 그 기준을 잘 전달하는 그런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다시 그때 떠오르는 장면들을 생각해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 사람들이 제 답을 듣고 설득이 되어서 논쟁이 그친 게 아니라 그냥 말문이 막힌 거더라고요. 그러니까 여러분, 이게 교실에서만 그랬겠습니까? 집에서도 똑같이 그런 것이죠. 그러니까 제 아내와 아들이 너무 힘들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제가 지금 계속 과거형으로 말씀드렸어요. 지금은 안 그러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 그랬다는 거예요. 그러나 이런 말을 듣는 제 아내와 아들이 "과거형으로 말하는 게 맞나?" 이러지 않을까라고 살짝 자신감이 없어지긴 하지만. 지금도 그러겠죠? 그렇죠? 이런 게 다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그림대로 다스린 왕은 이 말을 들은 다윗도 아니고 그 훌륭한 아들 솔로몬도 아닙니다. 천 년 후에 노 제사장 사가랴가 성령에 충만해서 외쳤죠.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참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돋는 해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다윗은 기름 부음 받은 왕이지만 이 그림을 온전히 이루신 참된 기름 부음 받은 그 그리스도는 예수님이신 거예요. 다윗은 자기 왕좌를 지키려고 우리아를 죽였지만 참된 왕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자기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햇살이기 전에 참된 왕의 빛 아래 살아나야 되는 풀인 것이죠. 기본적으로 우리는 다 풀이에요. 내 결심으로 좋은 부모, 좋은 지체, 좋은 사람 되려고 하면 그게 사흘을 못 가는 것이죠. 먼저 내가 참된 왕의 빛을 받아야 되는 겁니다. 그 빛 아래 서야 되는 거예요. 살아난 사람만이 사람 살리는 것이잖아요. 자기가 살아난 경험이 없으면 사람을 살릴 수가 없죠. 그러니까 우리가 먼저 그 빛 아래서 살아나야 되는 것이죠.

적용 질문 드립니다.

  • 내 눈치를 보며 말을 삼키는 사람 누구입니까?

  • 참된 왕의 빛 아래 살아난 사람으로서 이번 주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어떤 말이나 태도를 바꾸겠습니까?

저도 토론을 굳히게 하는 그 모습이 제게도 여전히 있을 테니까, 우리 집에서, 사무실에서 일할 때 그런 부분들을 잘 조심해야 될 것 같아요.

셋째, 하나님이 나의 구원을 이루십니다.

성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왕의 그림은 정말 이처럼 눈이 부셔요. 빛을 비춰서 풀을 다 살아나게 하는 그 모습이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 그림을 처음 듣고 받아 적은 이 다윗이 고개를 들어서 정작 자기 집을 봤다면 어땠을까요? 다윗의 집은 정말로 구름 한 점 없는 그러한 화려하고 찬란하고 아름다운 그림 같은 집안이었나요? 절대 아니죠. 큰아들 암논은 이복동생 다말을 짓밟았습니다. 그 오빠 압살롬이 형 암논을 죽였죠. 그리고 심지어 아버지를 향해서 칼을 빼들었다가 나무에 걸려서 죽고 마는 거예요. 나단의 예언대로 다윗의 집에 칼이 그치지 않는 그 시간들이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눈부신 그 왕의 그림과 피로 얼룩진 부끄러운 자기 집, 다윗은 지금 이 둘 사이에 엄청난 간격 사이에 지금 서 있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도 이 간격을 너무 잘 알죠. 꿈꿨던 가정의 모습이 다 있잖아요. 여러분들 결혼하실 때 지금과 같은 모습을 꿈꾸시진 않았을 거잖아요. 저도 그랬습니다. 결혼할 때 저는 진짜 모범적인 남편, 모범적인 아빠, 모범적인 부부를 막 꿈꾸면서 했는데 현실은 그게 아닌 것이죠. 이상과 현실 사이에 그 엄청난 간격 사이에 우리는 살아가는 거예요. 바로 이 간격 사이에서 다윗이 세 번째 고백을 하는 것이 바로 세 번째, 하나님이 나의 구원을 이루시는 겁니다. 5절이에요.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어찌 이같지 아니하냐." 이거 뭐예요? 앞에 지금 말한 거, 그 그림, "내 집이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고 화려하고 빛과 같이 빛나지 않느냐" 지금 이 말을 하는 건데요. 우리가 다윗의 집안을 알잖아요. 다윗도 다 알잖아요. 우리 귀에는 그게 이상하게 들리는 거예요. 그게 아니죠. 다윗이 지금 폐허, 자기 집이 지금 다 무너져 내린 그 폐허를 못 본 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 폐허에 자기의 마지막 말을 맡기지 않은 거예요. 그 폐허가 내 마지막 말이다, 라고 인정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자기 집을 지금 현실 성적표만 보고서 판단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 아래에서 지금 이 다 무너져 내린 집안을 해석하는 겁니다.

다윗이 붙든 언약은 사무엘하 7장 약속이에요. 다윗이 하나님께 집을 지어드리겠다고 하자 하나님이 그걸 뒤집으셨잖아요. "야, 네가 무슨 집을 짓느냐. 내가 너를 위해서 집을 지어줄게." 이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집을 세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집을 세우시는 것이죠. 우리 인생의 주어가 나에서 하나님으로 바뀌는 거, 이게 복음인 것이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집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주셔야 되는 것이구나, "하나님 해주세요"로 바뀌는 것이 복음인 것이지. 이 언약은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되는 것이 이 영원한 언약인데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끝까지 책임지신다는 거예요. 특히 "만사에"라고 했어요. 모든 상황에, 모든 형편에, 모든 조건에,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언약을 반드시 이루신다, 책임지신다. 그러니까 여러분 "지금 내가 처한 이 사건, 이 상황은 하나님도 어찌하실 수 없어" 이런 절망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뭐라고 말씀하세요?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다는 거예요. 조건적인 견고함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견고함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집은 이미 폭삭 무너진 거나 다름없죠.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다윗의 집은 정상적인 집이 아닌 거예요. 세바가 옳고 그름을 외쳤겠지만, 성경이 분명히 기록하잖아요, "불량배"라고. 오죽하면 이 불량배 세바가 뭐라고 그랬어요? "이새의 아들에게서는 우리가 받을 유산이 없다"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다윗의 집안이 지금 그 지경인 거예요. 완전히 다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그 이새의 아들에게 영원한 언약을 유산으로 주시는 거예요. 영원한 언약을 다윗 집의 그 기억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약속하세요? 다윗의 모든 구원을, 그리고 그 구원을 바라면서 품은 모든 소원을 어떻게 해주신다고 그래요? 반드시 이루어주신다는 거예요. "어찌 이루어지지 않겠냐." 반드시 이루어주신다는 그 약속인 거예요. 여기 "이루다"라는 말이 "싹트게 하다"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4절에서 뭐가 싹 터졌죠? 새풀이 싹 터졌잖아요. 돋아났잖아요. 그 그림이 여기 지금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의 다 무너진 우리 삶의 폐허, 무너진 자리에서 싹을 틔워내주시는 거예요. 내 인생에 무너진 자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을 싹 틔우시는 그 밭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내 삶은 이렇게 무너졌어, 지금 이 지경이 되어서 어떡하나"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구원을 심어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싹트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영원한 약속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정말 그 싹이 났죠. 이사야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라고 예언했잖아요. 이사야 11장에서 다윗의 줄기가 아니라, 이새의 줄기입니다. 이새의 아들의 줄기라는 거예요. 부끄러운 이름이 여기서 다시 반복되고 있어요. 게다가 이 "줄기"라는 것은 멀쩡한 나무 줄기를 말하지 않습니다. 나무가 잘리고 남은 그루터기, 그 밑동을 말하는 거예요. 밑동 잘린 나무는 이미 생명이 끝났습니다. 그런데 그 이새의 줄기에서,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그 부끄러운 자리에서, 덮고 싶은 자리에서, 떠나고 싶은 자리에서 뭐가 난다고 그래요? 한 싹이 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끝났다고 도장 찍은 바로 그 자리에서, 내가 포기한 내 삶의 자리에서, 바로 그 싹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시는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같은 땅에서 다른 것이 자랄 수도 있습니다. 6절, 7절이에요.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버려질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하리니 그것들이 당장에 불살리리로다 하니라.

가시나무는 언약을 거부한, 언약을 받아들이지 않은 인생을 비유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서 이 가시나무, 가시가 제일 처음 등장한 곳이 어디일까요? 바로 아담과 하와가 심판받을 때, 에덴에서 쫓겨나서, 그 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셨잖아요. "가시덩굴을 낼 거라."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의 출발점이 가시나무인 거예요. 우리 자신이, 우리 태어난 본성이 가시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는 배우지 않아도 남 찌르는 거는 다들 도사잖아요.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 우리는 그냥 기본적으로 남 찌르는 게 전공이란 말이죠. 가시라는 증거인 거예요.

그런데 이 가시를 심판하실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받은 심판 대신 십자가로 가시던 날 머리에 쓰신 게 뭡니까? 가시관을 쓰셨죠. 맨손으로도 잡기 어려운 그 가시를 우리 주님은 맨 머리에 쓰셨습니다. 우리에게 임할 저주를 우리 주님이 대신 받으시고, 가시 같은 우리를 언약의 땅에 옮겨 심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 태생에도 싹이 돋게 된 거예요.

적용 질문입니다.

  • 우리 집에서 내가 이미 끝났다고 결론 내린 문제는 무엇입니까?

  • 하나님이 아직 끝내지 않으셨음을 믿으며 이번 주 무엇을 다시 시작하겠습니까?

한 성도님의 나눔인데요. 이분은 우리들교회가 태어나서 처음 나온 교회라고 하세요. 이혼의 아픔을 교회에 나오기 전까지 17년 동안이나 말 못하고 숨기면서 사셨답니다. 직장 생활 하시면서 아이가 둘이 있는데 그 아이들 뒷바라지 하시면서 숨기면서 사신 것이죠. 그러다 화나는 일이 생겼다고 해요. 뭔가 재혼을 하시려고 했는데 "불신 결혼 안 된다"고 하면, 그 말을 듣고 거기에 힘드니까 화가 나가지고 따지러 온 거예요. 목사님한테 직접 따지겠다고 교회로 찾아온 겁니다. 그런데 이제 그 분노의 발걸음을 하나님께서 은혜의 발걸음이 되게 하셔서 목장에 연결이 되셨고, 목장에 처음 참석을 하셔서 평생 처음으로 그 누구한테도 말 못했던 자기의 그 이혼과 그동안의 삶에 대해서 목장에서 털어놓으신 것이죠. 그래서 이분이 이렇게 고백하세요. 그 첫날에 그 고백을 통해서 큰 자유와 위로를 경험하셨다. 그렇게 고백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 38주를 한 번도 안 빠지고 그냥 양육을 계속 계속 받으셨다는 거예요. 이제는 자기가 조급해하지 않고 무슨 일이든 서두르지 않고 말씀의 인도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때를 잘 기다리면서 그렇게 가겠다고 목장에서 이렇게 나누셨더라고요.

여러분, 17년 동안 끝났다고 결론 내린 이 폐허예요. 이분의 삶은.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서 끝내지 않으셨어요. 이분은 폐허라고 여겼지만, 숨기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폐허로 보시지 않은 거예요. 말씀의 공동체에 꺼내놓는 순간 바로 그 자리에서 구원이 싹트게 하신 것입니다. 성도에겐 폐허가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성도에겐 폐허가 마지막 말이 아니에요. 언약이 마지막 말이에요. 영원한 언약이 우리의 마지막 말입니다. 이 언약의 하나님이 이 성도님의 집도, 또 여러분의 집도, 또 우리 공동체도 끝까지 붙드실 줄 믿습니다.

말씀 맺겠습니다. 영원한 언약의 하나님은 여호와의 영으로 나를 세우시고요, 참된 왕의 빛으로 나를 살리시고, 마침내 나의 구원을 이루십니다. 나의 모든 구원을 이루십니다. 다윗의 마지막 말은 이새의 아들이라는 가장 초라한 이름에서 출발해요. 그러나 영원한 언약이라는 가장 견고한 약속에 도달합니다. 은혜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고백이죠. 그러니 우리 삶의 무너진 자리에 마지막 말을 맡기지 마세요. 여러분, 폐허 같은 그 일에 "이게 끝이다"라고 마지막 말을 맡기지 마세요. 폐허가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언약이 마지막 말인 거예요. 영원한 언약의 하나님이 우리 모든 구원을 끝까지 이루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