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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20:18-22

충성된 자

이성훈F조회 91
🌱 함께 만든 분들: 차치환 David Cha

사무엘하 20:18-22

18 여인이 말하여 이르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게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19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거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머니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하니 20 요압이 대답하여 이르되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삼키거나 멸하거나 하려 함이 아니니 21 그 일이 그러한 것이 아니니라 에브라임 산지 사람 비그리의 아들 그의 이름을 세바라 하는 자가 손을 들어 왕 다윗을 대적하였나니 너희가 그만 내주면 내가 이 성벽에서 떠나가리라 하니라 여인이 요압에게 이르되 그의 머리를 성벽에서 당신에게 내어던지리이다 하고 22 이에 여인이 그의 지혜를 가지고 모든 백성에게 나아가매 그들이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진지라 이에 요압이 나팔을 불매 무리가 흩어져 성읍에서 물러나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고 요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왕에게 나아가니라

요즘 충성이라는 단어를 가장 진지하게 사용하는 곳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군대일까요? 그래야 되는데 말이죠. 또는 교회일까요?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 충성이라는 단어를 정말 진지하게 사용하는 곳은 다름 아닌 기업입니다. 왜냐하면 요새 여러분들 많이 아시는 대로 항공사 마일리지, 통신사 VIP 등급, 리워드, 포인트, 쿠폰 이런 것들 많잖아요. 이런 게 전부 다 뭐라고, 이걸 통틀어서 뭐라 그러냐면 로열티 프로그램이라고 합니다. 충성도 프로그램. 충성도가 높은 고객을 많이 키우고자 하는 기업의 작전인 것이죠. 여러분들도 알게 모르게 저도 충성 고객으로 어딘가에 지금 다 등록돼 있는 거예요. 충성하지도 않는데 충성 고객으로 등록이 되어 있는, 그러한 일들이 있는 겁니다. 기업은 이미 알고 있는 거예요. 사람이라는 존재는 누구나 반드시 어딘가에 충성하면서 살아야 된다. 이걸 기업들이 파악을 하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자신이 무엇에 충성하고 사는가 궁금하신가요? 그러면 핸드폰 그리고 여러분들 카드 명세서를 열어보시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눈 뜨자마자 손이 가는 곳, 그리고 여러분들 돈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흘러가는 곳, 그리고 여러분들이 잠 자려고 할 때에 잠 못 들게 붙잡고 있는 바로 그것이 여러분들의 충성의 주소지인 것이죠. 문제는 충성을 엉뚱한 데 하면 우리 인생이 한 방에 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충성하냐 안 하냐 이것을 따지는 게 사실 아니에요. 충성을 하는지 안 하는지가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무엇에 충성하는가. 여러분은 요즘 무엇에 충성하며 사시나요?

압살롬의 반란이 겨우겨우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 세바라 하는 자가 또 반역의 나팔을 불어서 울리게 합니다.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다" 이렇게 외쳐요. 요압 장군이 이 자를 잡으려고 나라 끝까지 저 북쪽 끝까지 올라가서 지금 아벨 성 앞에 있는 거예요. 추격전 끝에서 성경은 전혀 뜻밖의 사람을 충성된 자로 세웁니다. 누구일까요? 오늘은 참으로 충성된 자는 누구인지, 그냥 충성된 자가 아니라 진짜 충성된 자가 누구인지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충성된 자는 여호와의 기업을 아낍니다.

18절 19절입니다.

여인이 말하여 이르되 옛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게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거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머니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하니

머릿속에 한번 여러분 그림을 그려보세요. 이스라엘 최북단 요새 도시인 아벨 성이에요. 그런데 그 성벽 앞에 토성이 쌓이더니 그 위에 군사들이 곡괭이를 들고 와서 성벽을 지금 쾅쾅쾅쾅 부수고 있는 겁니다. 성벽에 그 단단한 돌들이 금이 가기 시작하고 막 깨질 것 같은 거예요. 성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아, 이제 우리 끝이구나"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어요. 그런데 바로 그때 성벽 위에 한 사람이 올라옵니다. 누구일까요? 근육질의 장군일까요? 그렇지 않아요. 아니면 높으신 우리 나으리일까요? 그것도 아니에요. 전쟁터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한 여인이 올라옵니다. 그것도 성경에 이름도 기록해놓지 않은 무명의 여인이 지금 성벽 위에 올라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여인을 지금 사용하십니다. 충성은 힘이나 감투로 하는 게 아니란 말이죠. 충성은 내가 무엇에 지금 목숨을 걸고 있느냐, 내가 지금 생명을 누구에게 바치고 있느냐, 이것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뭔가를 생각해보면 뭔가에 다 목숨을 걸고 살아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든, 의식하고 있든 있지 않든, 생각해보면 우리는 뭔가에 다 우리의 목을 메고 살고 있어요. 돈에, 건강에, 가정에, 성공에, 칭찬에, 인기에, 명예에, 권력에. 그 모든 것들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 우리의 목을 맡긴 채 살아가고 있어요. 이런 것들은 그래서 우리의 충성을 끌어당기는, 우리의 충성을 요구하는 것들이고, 따라서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우상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거기에 끌려가는 순간, 하나님보다 거기에 끌려가는 순간 그것은 우상으로 변신하게 되는 거예요.

여인이 이 위태로운 성벽 위에서 꺼낸 것은 무엇입니까? 칼을 꺼낸 것도 아닙니다. 권력을 꺼낸 것도 아니에요. 이 여인이 꺼낸 것은 다름 아닌 말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뭐라고 그럽니까? "옛말에 아벨에 가서 물어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벨에 와서 묻기만 하면 사람들이 여기서 다 지혜를 얻고 답을 얻어서 돌아갔다고요. 그런데 당신은 지금 어찌하여 여기까지 오셔서 묻지는 않으시고, 묻기는커녕 지금 이렇게 성벽을 깨트리고 계십니까?" 여인이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은 사실 신명기 모세오경 율법 말씀에 근거해서 지금 하고 있는 말입니다. 모세오경에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신명기 20장에서 뭐라고 그랬어요? "전쟁을 하려거든 먼저 화평을 청하라" 그랬어요. 먼저 설득하고 먼저 싸우지 말자고 말을 하라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 그 과정 없이 요압이 무턱대고 성벽을 깨뜨리니까 이 여인이 말씀에 근거해서 요압에게 질문하고 있는 겁니다.

잘 보세요. 반역자 세바는 문제 앞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저런 다윗 같은 사람이 우리의 왕이 될 수 있는가" 세바에겐 이게 문제였잖아요. 이 문제 앞에서 세바는 나팔부터 불었어요. 반역의 나팔을 불었습니다. 내가 옳다는 주장을 한 거예요. 그리고 요압은 어떻습니까? 요압은 이 아벨 성을 치러 와서 무너뜨리러 와서 거기에서 토성부터 쌓았어요. 문제 해결책부터 자기 머리로 세운 거예요. 그러나 이 여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에 의거해서 질문했어요. 물었습니다. 말씀으로 묻고, 말씀을 기억하고, 그리고 그 말씀으로 말씀을 듣는 그 마음. 그렇기 때문에 이 여인을 오늘 본문은 지혜로운 여인이라고 계속 말을 하고 있는 것이죠.

여인은 자기를 "화평하고 충성된 자"라고 소개를 해요. 화평과 충성, 이 한 단어씩만 해도 책이 몇 권씩 나올 아주 굉장히 무거운 단어입니다. 그러나 사실 생각해보면 이 두 단어는 한 몸이에요. 여러분 화평이 무엇입니까? 싸우지 않는 것, 문제가 없는 것. 그렇죠, 그건 화평의 현상이에요. 화평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들이 다 제자리에 있는, 그 온전한 질서의 상태를 우리가 화평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러면 충성은 뭡니까? 충성은 내가 내 자리를 지키는 것,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는 것. 아무리 무겁고 힘들다고 해도, 지금 앉아 있는 자리에 가시방석이 놓여 있는 것 같아서 당장 지금 도망쳐버리고 싶은 그 자리라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리인 줄 믿으면 거기에 버티고서 앉아 있는 것, 그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 바로 충성인 거예요.

요즘 월드컵이잖아요. 우리나라는 탈락해서 여러분 재미가 없으시겠지만, 축구에서도 보면 그 11명이 전부 다 손흥민처럼 뛰겠다고 공격수 하겠다고 앞에 나가서 골을 넣으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팀은 무너지는 것이죠. 드러나지 않는 자리라도 자기의 자리, 자기 포지션을 잘 지키면서 자기 역할을 해야 그 팀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화평인 거예요. 그 질서가 온전히 갖추어진 것이 화평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가 자기의 자리를 잘 지키는 것이 충성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내 자리를 지키는 이 충성을 통해서 내가 속한 공동체의 화평이 오는 것이죠.

우리는 늘 탓하잖아요. "나는 아무 잘못 없는데 우리 집안 구석이 왜 이런가, 우리 회사는 왜 이런가, 우리 교회는 왜 이런가, 우리 나라는 왜 이런가, 왜 이렇게 사람들이 싸움박질인가, 왜 이렇게 화평이 없는가"를 외치지만, 순서가 그 반대인 거예요. 화평은 각자가 자기 자리를 잘 지킬 때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 눈으로 이제 이 세 사람을 다시 한번 봅시다. 세바는 자기 자리를 박차고 떠났어요. 백성에서 반역자로 떠났습니다. 차고 나갔어요. 요압은 어떻습니까? 요압은 신하의 자리, 장군의 자리에 있는데 늘 다윗의 머리 꼭대기로 지금 넘어서요. 자기 자리를 넘어서서 다윗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어떻게 합니까? 무너진 성벽, 위태로운 성벽, 지금 공격을 받고 있는 이 성벽 위로 올라가서 그 위에 서는 거예요. 그래서 그 무서운, 천하를 호령하는 그 요압 장군에게 질문하는 그 자리, 그 역할을 지금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이 제일 연약한, 세바와 요압과 비교했을 때 힘으로는, 권력으로는, 영향력으로는 비교도 안 되는 이 연약한 여인 혼자서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까? 이것은 이 성을 보는 눈이 달랐기 때문이에요. 세바에게 이 성은 무엇이었습니까? 자기 목숨을 지켜줄 방패였어요. 요압에게는 뭐였어요? 이 아벨 성은 자기의 먹잇감인 거예요. 자기 트로피가 될, 무너뜨려야 될 과녁인 것이죠. 그러나 이 여인에게는 무엇입니까? 이 아벨 성은 사람들을 품고 먹이고 길러온 어머니 같은 성이에요. 그러니까 이 성은 여호와의 기업인 것입니다.

똑같은 성을 놓고 지금 보는데 세 사람이 다 다른 걸 보고 있어요. 무엇이 보이느냐, 그것이 곧 그 사람의 충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정을 볼 때 무엇을 떠올리느냐, 그것이 여러분들의 충성을 보여준다, 이 말이에요. 이건 단지 3천 년 전에 있었던 얘기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자기 피를 주고 사신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성경이 우리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서 그랬죠? 우리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그 공동체가 이 교회, 영원한 교회인 거예요. 교회가 우리를 복음으로 낳고 말씀으로 양육해 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공동체를, 교회 공동체를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서운하면 등 돌리고 불평하고 내가 옳다며 그 가슴에 못을 박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봐야 되겠어요. 그런 건 아무리 내가 옳은 것 같아도, 아무리 공동체가 잘못한 것 같아도, 문제가 있는 것 같아도, 그런 건 충성이 아닌 겁니다. 그러니 이 어머니 같은 공동체를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될까요? 아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아끼시는 분이세요. 여러분 요나 선지자가 왜 그렇게 하나님과 대립하면서까지 말씀을 전하기 싫어했어요. 니느웨에 가서. 앗수르는 정말 패악한 제국이었거든요.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제국 중에 가장 잔인한 제국이라고 소문이 난 그런 악한, 어떻게 보면 그런 나라의 중심지가 니느웨였는데. 이 니느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그러셨는지요? 요나 4장 11절에 보면 "내가 어찌 아끼지 않겠느냐." 우리 눈에는 "어떻게 저런 사람들이 아무 일 없이 살아갈 수 있어" 이렇게 보는 악한 사람도, 그 생명도,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죠. 하나님은 아끼시는 분이세요. 하물며 그런 악한 사람들도 그런데 자기 피로 사신 저와 여러분, 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더 많이 아끼시겠습니까? 이 아끼심을 우리가 먼저 받은 거예요. 우리 자신은 우리의 삶을 아끼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아끼시기 때문에, 여러분의 삶을 아끼시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있는 줄 믿습니다. 이 아끼심을 우리가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어머니 같은 이 교회를 아낄 수 있는 거예요.

한 성도님의 믿음 목장 나눔입니다. 이분은 유일한 낙이 책 사시는 거래요. 귀여우시죠? 책 사는 게 유일한 낙이래요. 그런데 아내분은 이거 너무 싫어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문제로 아내와 무려 4시간을 싸운 적도 있답니다. 정말 이런 기세면요, 오늘 체감온도가 43도래요. 여러분 아주 아주 그냥 엄청 무더운 날이죠. 이런 무더위에 마라톤을 완주하시겠어요? 이렇게 4시간을 이 문제로 싸울 기세시면 저희랑 별 차이는 없는 것 같아요. 저희도 그런 기세로 싸웠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4시간을 싸우다가 아내의 한마디에 양심이 그냥 확 찔리시는 일이 있었다는 거예요. 아내 말이 뭐냐. 아내는 "자기는 평생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걸 생각도 해보지 않고 살아왔다." 이 말을 했더래요.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분이 그냥 충격을 받으신 것이죠. 왜냐? 자기는 늘 내 것만 생각했거든요. 내가 좋아하는 것만 생각했거든요. 그게 책 한 권이라 하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거에 그냥 목숨을 걸면서 4시간을 싸울 정도로 그 목을 메고 있는데, 듣고 보니 내 아내는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생각도 해본 적이 없이 그렇게 살아왔다는 말을 들으니까 너무 양심이 찔린 거예요. 그래서 이분이 적용을 어떻게 하셨는지 아세요? 한 달 들어가던 그 책값을 반으로 줄이시는 적용을 하셨다는 이런 나눔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게 책이 문제가 아니라 부부로 살면서, 가정으로 살면서 내 것만 눈에 보이고 우리 것이 보이지 않는 그 모습을 아내가 볼 때 얼마나 얄미웠겠어요. 미웠겠어요. 그게 문제인 거예요. 내 것 보는 게. 그러나 이 아내의 말에 이렇게 찔림이 있으셨던 것, 양심의 찔림이 있으셨던 것이 은혜인 줄 믿습니다.

가정을 여호와의 기업으로 보셔야 돼요. 우리 남자 집사님들 정말 힘드시죠? 가장 역할 하시는 거 너무 힘드시죠? 그래도 여호와께서 맡기신 기업인 줄 믿으시고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신 이 가장의 자리 잘 지키시기를 추천합니다. 여호와의 기업인 거예요. 가정도, 우리 아내분들도 그렇고 자녀분들도 그렇고 부모도 그렇고, 가정이 여호와의 기업인 거예요. 여호와께서 맡기신 여호와의 소유를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잘 아껴서 우리 충성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적용 질문입니다.

  • 가정과 교회를 볼 때 뭐가 먼저 보입니까? 내 방패, 내 과녁입니까? 여호와의 기업입니까?

  • 이번 주 내가 아껴야 할 여호와의 기업 그 한 가지는 뭐예요? 어떻게 그거 아끼시겠습니까?

둘째, 충성된 자는 내 충성을 장담하지 않습니다.

20절 21절이에요.

요압이 대답하여 이르되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삼키거나 멸하거나 하려함이 아니니 그 일이 그러한 것이 아니니라 에브라임 산지 사람 비그리의 아들 그의 이름을 세바라 하는 자가 손을 들어 왕 다윗을 대적하였나니 너희가 그만 내주면 내가 이 성벽에서 떠나가리라 하니라

여인의 이 질문에 요압이 장담을 합니다. "결단코 그렇지 않다, 결단코 그렇지 않다." 이 두 번이 다가 아니라 또 "그 일이 그러한 것이 아니다" 막 두 번 세 번 계속 부인을 합니다. 여러분 한 번 말해도 될 것을 이렇게 두 번 세 번 반복하면서 말하는 사람은 일단 의심을 해봐야 되는 것이, 수상한 것이죠. 뭔가 있는 거예요. 게다가 결단코라는 이 표현은 하나님 앞에 내 목숨을 내놓겠다, 이거 내가 거짓말이면 하나님이 나에게 저주를 내리셔도 된다라는 가장 강한 그 맹세의 표현입니다.

비교해 보세요. 여인은 아까 뭐라고 그랬습니까? 정말 힘도 없고 전쟁터와는 아무 관련도 없고 나라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충성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데, 자기를 뭐라고 고백했어요? "나는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다" 고백을 했잖아요. 그런데 요압은 성을 지금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서도 그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뭐라고 그럽니까? "결단코 아닙니다, 결단코 아니다" 장담을 하는 거예요. "제가 그렇습니다, 자격이 없어도 제가 그렇습니다"라고 시작하는 입이 있는가 하면, "아니 그게 아니고요" 이렇게 시작하는, 이런 부인의 말로 시작하는 입이 있어요. 참된 충성은 고백하는 것이고요, 병든 충성은 이렇게 변명하는 겁니다. 아니라고 잡아 떼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무서운 게 있습니다. 요압이 거짓말한 게 아닐 수 있다는 거예요. 요압은 진짜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나는 지금 다윗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이다, 반역자를 처단하고 있는 것이다, 나라를 지금 섬기고 있는 것이다"라는 확신에 차서 지금 이 일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나쁜 줄 알고서 나쁜 짓 하는 사람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나쁜 줄 모르고서 자기가 맞는 줄 알고서 사람을 삼키는 사람, 이 사람이 진짜 무서운 사람 같아요.

하지만 여러분, 진심이라고 진실한 건 아니에요. 진심이라고 그게 진실한 것은 아니란 말이에요. 사람의 실상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요압은 입으로는 "삼키거나 멸하거나 하려함이 아니다"라고 이렇게 잡아 떼고 있지만, 손으로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어요? 성벽을 지금 깨뜨리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지금 아니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이 요압은 얼마 전, 불과 얼마 전 세바를 쫓아오는 중에 자기 사촌 아마사를 만났잖아요. 뭐라고 그랬어요? "샬롬! 평안하냐? 잘 지내냐?" 인사를 하고서 어떻게 했습니까? 한 손으로는 그냥 칼로 찔러서 죽인 거예요. 입에는 샬롬이지만 손에는 칼입니다. 성경이 이 두 장면을 딱 붙여놓고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이 요압을 보라고 하시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입의 고백이 아니라 손의 자취를 봐야 되는 거예요. 말이 아니라 행동을 봐야 되는 겁니다. 말로는 "내가 사랑해서 그런 거야" 하지만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상대방 마음에 피멍이 들어있는 경우가 있는 거예요. 말로는 "야 이거 다 너 위해서 그러는 거야" 하지만은 실제로 상대가 숨을 못 쉬는 일도 있는 겁니다. 말로는 "내가 옳은 말 하는데 왜 그래?" 하지만은 결과적으로는 화평이 다 깨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되는 겁니다. 내 충성은 지금 누구를 살리고 있는 충성인가? 아니면 누구를 삼키고 있는 그러한 충성인가?

요압은 이어서 이 세바를 고발합니다. 21절이에요.

에브라임 산지 사람 비그리의 아들 그의 이름을 세바라 하는 자가 손을 들어 왕 다윗을 대적하였나니

세바의 출신과 아버지와 이름과 죄목, 완벽한 기소장을 딱 말로 구두로 내놓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요압이 자기가 얼마 전에 사람을 그렇게 불의하게 죽인 일에 대해서는 입도 뻥끗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다윗도 그랬잖아요. 나단 선지자가 와서 다윗의 우리야를 죽인 사건을 비유를 들어, 부자와 가난한 자의 그 비유를 들어 얘기할 때 다윗이 그 말 듣고 뭐라고 그랬습니까?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죽어 마땅하다, 마땅히 죽을 자다" 이렇게 외쳤잖아요. 우리가 남의 죄 볼 때는 다 명탐정이 되는 거예요. 남의 죄 판단할 때는 전부 다 명판관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자기를 볼 때 그 시력이 제로가 되는 거예요. 남의 죄에 대해서 정확해지는 것은 충성의 증거가 아닙니다. 그거는 병든 충성의 증상에 불과한 거예요.

그리고 요압이 조건을 걸잖아요. "세바 그 자만 나한테 내주면 내가 떠날게." 이렇게 조건을 지금 거는 거예요. 요구하는 것은 뭡니까? 세바의 목숨이에요. 남의 목숨을 지금 요구하지만은 내놓는 건 뭐예요? 떠나는 거, 지금 내놓는 거예요. 남의 목숨 요구하면서 지금 자기는 아무것도 사실은 내놓는 게 아닌 것이죠. 이것이 바로 무너진 충성인 거예요.

여러분, 요압도 세바도 충성이 없는 사람이 아니에요. 충성을 엉뚱한 데 지금 쏟고 있는 것입니다. 세바는 옳고 그름에 쏟고 있는 것이죠. "내가 어떻게 다윗 같은 사람 밑에서 하겠어, 우리끼리 잘 살자." 옳고 그름, 정의예요. 요압은 뭐예요? 요압은 자기의 야망인 것이죠. 그걸 섬기면서 지금 거기에 충성하면서 사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돈과 또 성과와 칭찬과 자식과,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내 자신에게 목숨을 걸고서 살아가는 겁니다. 문제는 그러한 우리의 충성과 그러한 열심이 무엇을 삼키고 있는가, 이것이 이제 문제인 거예요. 돈에 충성하면 그 충성이 나의 건강과 가족을 삼키게 됩니다. 자녀 성적에 충성하면 그 충성이 자녀의 숨을 삼키는 거예요. 나의 편에, 나의 영향력에 충성하면 그 충성이 하나님의 뜻마저 삼켜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진짜 질문은 내가 지금 충성스러운 사람인가, 내가 충성스러운가가 아니라, 내 충성이 지금 무엇을 향한 충성인가, 그리고 그 충성이 무엇을 삼키고 있는가, 이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되는 겁니다.

"나는 절대 안 그래, 나는 그럴 리가 없어, 나는 삼키는 사람이 아니야." 이것이 바로 요압의 장담이에요. 여러분 장담하면 우리가 빼놓을 수 없는 사람 있죠? 누굽니까? 베드로잖아요. 베드로.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이 "결코"가 요압이 말한 "결단코"와 의미가 똑같은 단어예요. 하나님께 내 목숨을 걸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하고 지금 딜하는 거예요. 그만큼 센 장담, 맹세를 하는 겁니다. 근데 그렇게 해놓고서 베드로가 어떻게 했는지 우리는 너무 잘 알죠. 바로 그날 불과 몇 시간 뒤에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맙니다.

내 충성을 장담하는 사람은 내가 제일 자신하는 그 자리에서 무너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충성이 주님께 기댄 것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기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하는 충성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실 이러한 장담은요, 남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저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충성이라는 단어만 보면 그냥 가슴이 뛰더라고요. 한자로 충 자만 보면은 막 가슴이 웅장해졌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충성해야지" 막 그 생각만 하면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너무 벅차올라서 그 감격과 그 감동이 벅차올라서 초등학교 때, 중학교 때 말이죠. 벌써 정상이 아니잖아요. 아픈 거잖아요. 어딘가 아파요. 삼국지, 그때는 우리 삼국지가 유행이었거든요. 요새는 그런 거 안 봅니다만, 삼국지를 읽을 때도요 거기 얼마나 재밌는 전투 장면 이런 게 많이 나와요. 그러나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요, 충성을 결의하는 도원결의 같은 거, 그다음에 다 기울어가는 나라를 위해서 내 목숨을 걸고 내 충성을 걸고 "마지막 전투에 나가겠습니다"라고 하는 그 제갈량의 출사표 장면. 저는 그 두 장면이 너무 감동이었던 거예요. 그리고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인물은 삼국지에서 충신의 대명사인 관우였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뭐라고 장담했겠어요. 제 스스로에 대해서. "나는 누구보다도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 나만큼 준비된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막 이러면서. 정말 제가 지금 생각하면 너무 심각했어요. 사실은 우리 아버지가 다른 환자들 보실 게 아니라 아들을 좀 치료하셨어야 되는데. 우리 아버지가 하여튼 다른 환자 보신다고 너무 열심히 하셔가지고. 그런데 여러분, 이 확신이 제가 바리새인이고 서기관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았겠죠. 이러고 살았는데 어떻게 몰랐겠어요. 저, 좀 이상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는 전혀 몰랐던 거예요. 남의 신앙은 그렇게 다 평가하면서 제 죄는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의 결론으로 어떻게 됐어요? 제가 그렇게 장담하던 삶인데 아내한테 이혼당할 뻔했잖아요. 우리들교회를 안 만났으면 사실 이혼 당했겠죠. 저를 힘들게 한 거는 아내가 아니라 이 제 자신의 모습인 거예요. 장담맨. 정말 자기 자신은 전혀 보지 못하고 장담만 할 줄 아는 그 장담맨인 제가 제 인생을 이렇게 삼켜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충성을 장담하던 사람이 바로 같이 옆에 사는 그 아내에게 충성하지 못했던 것이고요. 머릿속으로는 막 이 목회의 자리에 충성하겠다, 신학자의 자리에 충성하겠다, 선교에 충성하겠다, 막 머릿속으로는 그런 거창한 것들 생각하면서, 정작 하나님께서 세워두신 그 남편의 자리에는 충성하지 못했던 거예요. 완전히 삼켜진 인생인 것이죠. 왜 그랬습니까? 제가 제 삶도, 저에게 주신 가정도 하나님의 기업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내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죠. 장담을 했기 때문에.

여러분, 이렇게 내 충성을 장담하는 순간 회개는 가장 멀어집니다. 장담은 "하나님 절 좀 불쌍히 여겨주세요"가 아니라 "하나님 저는 괜찮습니다. 다른 사람 좀 돌보세요." 전 그랬거든요. "하나님 제가 저까지 걱정하시면 어떡해요. 다른 사람들 돌보시느라 바쁠 텐데. 저는 알아서 잘할게요." 이게 정말 여러분, 딱 이 장담하는, 자기 충성을 장담하는 모습이 진짜고, 이 말씀 준비하면서요 너무 제 자신이 보여가지고 숨고 싶더라고요. 진짜로. 정말 이 바보 같은 저의 모습이 너무 이제 말씀으로 드러나서.

그래서 충성된 자는 절대로 내 충성을 장담하지 않아요. 역설적인 거예요. 충성된 자는 내 충성을 장담하지 않습니다. 대신 기도하는 사람이에요. "주님 제 안에도 요압이 있습니다. 제가 진짜 충성하고 싶은데 충성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저를 좀 도와주세요. 저를 좀 불쌍히 여겨주세요." 이런 기도로 한 주를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적용 질문이에요.

  • 최근 "난 절대 안 그래" 장담했던 일은 무엇입니까?

  • 누구의 잘못을 낱낱이 지적하고 있습니까?

  • 이번 주 "그게 아니라" 대신 "그러게요"로 시작해야 할 대화가 있다면 누구와 어떤 대화입니까?

여러분, 막상 부담스러운 대화, 미루어왔던 대화 혹시 있으시다면 이번 주에 기도하시고 묵상하시고 다가가셔서 "그러게요"로 시작하시면서 대화를 한번 해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셋째, 충성된 자는 내 안에 세바를 내어 던집니다.

21절 22절이에요.

여인이 요압에게 이르되 그의 머리를 성벽에서 당신에게 내어 던지리이다 하고 이에 여인이 그의 지혜를 가지고 모든 백성에게 나아가매 그들이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진지라 이에 요압이 나팔을 불매 무리가 흩어져 성읍에서 물러나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고 요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왕에게 나아가니라

요압의 요구에 여인이 답합니다. "그의 머리를 성벽 너머로 내어 던지겠습니다." 요압은 자기 결백을 지금 장담했는데 이 여인은 지금 약속을 하는 거예요. 결단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결단대로 약속대로 실행을 해요. 그러나 여인 혼자서 칼을 든 게 아닙니다. 모든 백성을 지혜로 설득해서 그들과 함께 이 세바를 처리하는 거예요. 죄가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의 손으로 다뤄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게 있어요. 여인은 성을 아꼈잖아요. 그래서 세바를 감쌌습니까? 이 성을 아낀다고 해서 지금 성 안에 들어와 있는 세바를 감쌌어요? 아니. 아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세바, 이 반역자 세바를 도려낸 겁니다.

다윗을 보세요. 다윗이 압살롬을 얼마나 아꼈습니까? 모든 그 많은 자식 중에 제일 사랑했던 자식이 압살롬이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압살롬을 끼고 돌았어요. 감쌌습니다. 압살롬의 죄를 도려내지 않았어요.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뭐예요? 반란이었어요. 죄를 감싸는 건 사랑이 아닙니다. 우린 사람을 감싸야 되는 거예요. 죄를 감싸면 안 되는 겁니다. 참으로 아끼는 사람만이,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 죄를 도려낼 수 있는 거예요.

한 목자님의 나눔인데요. 연말에 갑자기 실직을 하셨대요. 그래서 급한 마음에 연봉만 보고서 한 회사에 들어가셨는데 그 회사에 들어가 보니까 그냥 소송에, 민원에, 야근에 이 업무 스트레스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답니다. 그래서 두통은 물론 이제는 정말 숨도 못 쉬고 쉬기 어려울 정도의 공황에 가까운 그 스트레스로 인한 증상이 나타난 거예요. 너무 힘들어서 지금 겨우겨우 버티는 상황에서도 이분은 "회사가 나를 몰라준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는가, 회사가 잘못된 거다" 이런 자기 방어만 계속해서 올라오셨다고 해요. 결국 견디다 못하고 퇴사를 결심하셨는데, 더 큰 문제는 이 일을 아내와 상의하지 않고 혼자서 결정하고 그냥 하셨다는 거예요. 이러면 안 되시는데요. 근데 이분 설명을 듣는 순간 제가 이해가 너무 이해가 됐어요. 왜 얘기를 안 하셨느냐, 아내가 무서우셨다는 거예요. 너무 공감이 되더라고요. 무서워서 지금 얘기 못하는 얘기들이 있잖아요. 그렇죠? 아니 저만 그런 거 아니잖아요. 다, 다 있지 않으세요?

그러나, 그러나 이 집사님이 목자님이시잖아요. 아내는 무서워서 말 못할지언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있는 데가 있으니, 그게 어디예요? 목장이죠, 목장. 목장에 가서 이런 힘든 상황들, 이런 거 얘기 안 하고 막 이렇게 한 거를 꺼내 놓으셨어요. 꺼내 놓았더니 목장 식구들이 그냥 아주 사랑으로 지혜를 가져와서 권면을 막 해주셨다는 겁니다. 무슨 말씀을 해주셨습니까? 여러분 상상이 되시죠? 여러분 목장에서도 늘 하시는 일이죠? 그 순간 목장 식구들의 권면을 듣는 순간 목자님이 깨달으셨답니다. "아, 내가 아내 배려 못한 것까지 합리화를 하고 있었구나. 정말 회사에서 그렇게 힘든 것마저도 합리화를 한 나의 모습이, 아내와의 관계에서도 내가 이 자기 방어, 합리화로 자기 방어를 하고 있었구나." 이런 게 그냥 순간 깨달아지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자기 방어했던, 합리화했던 자기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두 손 두 발 들면서 항복을 했더니,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하나님께서 공백도 없이 새 직장으로 인도해 주셨다는 거예요. 할렐루야죠?

그런데 여러분, 이게 기적이겠습니까? 새 직장에 바로 이어진 것도 너무 감사한 일이고 기적이겠지만, 진짜 기적은 그날 목장에서 있었던 그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자기 죄가 깨달아지는 것, 자기 회개하게 되는 것, 그게 진짜 기적인 거예요. 그래서 목자님이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목장에서 내 힘든 걸 꺼내놓았더니 하나님이 회개하게 하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아멘입니다.

꺼내놓는 것. 이렇게 내 안에 이 문제들을 꺼내놓는 것이 바로 내 안에 세바를 내어 던지는 거예요. 혼자 끌어안고 있으면은 성과 같이 무너지지만,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러워도 그걸 꺼내놓을 때, 공동체 앞에서 꺼내놓을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우리는 내 안에 세바가 무엇인지 모르잖아요. 그렇죠? 내 안에 있는 세바가 무엇인가 바로 생각나는 분들이 몇이나 되시겠어요? 잘 몰라요.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목장에서 그냥 내 안에 있는 좀 힘든 고민,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그걸 다 꺼내서 물어놓고 이야기하고 나누다 보면, 그 과정에서 저절로 내 안에 숨어있던 세바가 내어 던져질 줄 믿습니다. 그러니까 목장에서 무엇이든 자꾸 얘기하고 물으시고 나누시고, 그것이 이 세바를 내어 던지는 것이란 말이죠.

아벨 성에서 이렇게 세바가 내어 던져졌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야, 이제 반란 진압됐다, 좋다, 문제 해결했다" 이러고 끝나면 안 되는 거죠. 이 승리에는 그늘이 남아 있습니다. 성은 살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한 사람의 목이 날아간 거잖아요. 전쟁은 끝났지만 지금 이 다윗 머리 꼭대기에 올라있는 요압은 더 기세등등해서 반란을 진압했잖아요. 더 기세등등해서 지금 다윗 앞으로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반란은 진압됐지만 세바가 외쳤던 구호는요 없어지지 않았어요. 놀랍게도 열왕기상 12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남쪽과 북쪽이 갈라질 때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쳤던 구호가 이거예요. "이 세바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없도다." 이게 바로 세바가 외쳤던 반란의 구호였던 겁니다. 이게 그대로 살아남아 있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이 인간의 최선입니다. 전부 다, 사실 여러분 여기서 이 세 사람 중에 충성하지 못했다고, 열심히 살지 않았다고 지적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구보다도 지금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고 있는 이 세 사람이에요. 그러나 이 최선의 결과가 이거란 말입니다. 인간의 최선은 당장의 반란은 진압할 수 있어도 영원한 죄의 반란은 진압할 수가 없는 거예요. 당장 문제는 해결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도, 죄로부터, 사망으로부터 구원은 이룰 수 없는 겁니다.

그럼 오늘 본문에서 이 다윗 왕국을 지킨 진짜 이유는, 진짜 동기는 무엇일까요? 여인의 지혜일까요? 아니에요. 아니라는 것이 지금까지 그걸 우리가 본 거예요.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약속이 있습니다. "내 집과 내 나라가 영원히 보존되리라." 이 약속을 맺으셨어요. 이 약속을 지키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지키신 것입니다. 신실하심, 바꿔 말하면 하나님의 충성. 여러분 하나님도 충성하시는 거예요. 왜요? 충성은 자기 자리 지키시는 거라고 했잖아요.

여러분 아이들 키우면서도 아빠의 자리, 엄마의 자리 떠나고 싶을 때 많으시죠. 저는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의 자리, 그 자리도 사실 지킬 수가 없어요. 늘 떠날 생각하죠. 그런데 여러분,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이 썩어 문드러져 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실 때 하나님의 자리를 지키시고 싶으시겠어요? 여러분 같으면 지키시겠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리를, 그 구속주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키시는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충성인 겁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 한 번도 안 나오세요. 이름으로만 등장하십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이름으로. 하나님이 직접 등장하지 않으세요. 대사가 없으십니다. 그러나 이 약속을 붙드시고 무대 뒤에서 조용히, 하지만 쉬지 않고 지금 일하고 계신 거예요. 그 증거가 뭐냐고요? 남의 말을 도저히 들을 수 없는 이 요압이, 그리고 두려움에 떠는 그 군중이, 귀를 열었잖아요. 그 여인의 말을 들었잖아요. 들을 수 없는 사람들이 말을 듣게 하신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역사하셨다는 증거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충성하는 것들, 끝에 가면 전부 다 요압처럼 말합니다. "그거 하나만 내놓으면 내가 살려줄게. 너 그거 하나만 내놓으면 내가 살려줄게. 그러면 나한테 바치면 내가 너 보장해줄게. 네 자리 지켜줄게."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우리 머리, 우리 머리마저 요구하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에 나를 아껴주는 우상은 없습니다. 우상은 다 우리를 삼키는 존재예요. 세상에 우리 위해서 대신 죽어주는 우상은 없습니다. 온 우주에 그런 우상은 없어요.

그런데 딱 한 분, 반대로 하신 분이 계십니다. "내놓으라" 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가 말했죠.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어떻다고?" 유익하다고 그랬어요. 이 세바를 넘기던 논리와 똑같은 논리예요. 그런데 이 한 사람이 누구냐에서 모든 것이 다 갈리게 되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서 충성은 뜻밖의 자리에서 나왔죠. 이름 없는 그 무명의 여인에게서 충성이 발견되고, 충성의 그 씨앗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충성된 분은 가장 뜻밖의 자리에서 발견됩니다. 어디예요? 반역자들이 처형되는 그 십자가 형틀 위에서 발견되는 거예요. 멸시받고 버림받으시고 성문 밖에서 처형당하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히브리서 3장이 뭐라고 그럽니까?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충성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신실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는 그 어린 양의 그 자리를, 우리 주님께서 우리 예수님께서 끝까지 충성스럽게 지키셨기 때문에 지금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거예요. 최고의 충성된 자는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주님이신 거예요.

요압은 남의 머리를 요구했고, 여인은 죄인의 머리를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머리를 내어주셨어요. 세바는 자기 죄로 죽었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어떤 죄도 없이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충성의 최고봉인 거예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시는 십자가 사랑입니다.

여러분, 이 사랑을 오늘 우리가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도 내어 던질 수 있는 거예요. 우리 안에 있는 세바를 내어 던질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우리의 삶을, 우리의 생명을 우리의 유일한 왕이신 우리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내어 던진다는 것, 내 안에 세바를 내어 던진다는 건 다시 한마디로 말하면 회개하는 것이죠. 내가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이고 하나님만이 100% 옳으시다, 이 고백을 하는 것이 내 안에 세바를 내어 던지는 것이고, 그걸 인정할 때 그 모든 것들을 감추지 않고 공동체에서 말씀의 빛 가운데 꺼내 놓을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이렇게 던질 때 우리가 살아나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던져져서 그 비워진 우리의 빈자리가 이제 빈자리로 남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에요.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내 안에 세바가 나간 그 자리, 진짜 충성자이신 우리 예수님께서 들어와서 살아주시는 줄 믿습니다. 지금도 살고 계시는 줄 믿어요. 그래서 연약한 우리도 충성된 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내 힘이 아니라 내 안에 사시는 주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충성을 의지하여서 이번 주 구체적인 것 하나, 내 안에 세바 하나 그거 잡아서 내어 던지시기를 바랍니다.

적용 질문 드립니다.

  • 내 안에 세바는 무엇입니까? 삭이지 못한 억울함입니까, 오래 품은 원망입니까, 나만 옳다는 자기 의입니까, 습관이 된 자기 방어입니까?

  • 이번 주 목장에서 오픈하고 회개해야 할 한 가지 무엇입니까?

충성된 자는 여호와의 기업을 아끼고, 내 충성을 장담하지 않고, 내 안에 세바를 내어 던집니다. 그러나 이 세바를 던지지 않으면 우리 힘으로 되는 거 정말 하나도 없어요. 하나도 없어요. 아끼다가 삼키고 장담하다가 무너지는 게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은 내 충성이 아니라, 유일한 소망은 자기를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충성인 거예요.

진짜 충성되신 주님이 지금 저와 여러분 안에 살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힘으로 충성할 뿐이에요. 그리고 그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 안에 사시며 우리를 충성으로 이끄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우리 모두 그날에 주님으로부터 이 칭찬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