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요즘 우리가 자주 하는 거짓말 중 하나가 뭔지 아세요? "읽었으며 동의합니다." 앱을 깔 때도, 회원가입할 때도, 결제할 때도 날마다 읽고 동의하나요, 여러분? 저는 이제 읽지도 않고 "동의합니다"를 눌러요. 무슨 내용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내 정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이제 빨리 넘어가려고 이렇게 동의를 합니다. 신앙도 이렇게 할 때가 있어요. 말씀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아멘"합니다. 언약의 내용은 "믿습니다"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내가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 어떤 말씀 앞에 서야 하는지는 모르면서 그냥 "은혜 받았다"고 해요. 그런데 말씀을 듣고 회개한 요시야는 그렇게 하지 않더라고요. 읽지 않고는 동의하지 않아요. 듣지 않고는 아멘하지 않아요. 그리고 백성을 모읍니다.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들려줍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앞에 함께 서서 언약을 세웁니다. 오늘은 말씀을 들은 회개는 어떻게 언약을 세우는지 본문을 통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공동체를 하나님 앞에 모읍니다.
22장 20절이에요.
그러므로 보라 내가 너로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내 눈이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사자들이 왕에게 보고하니라
지지난주에 들었는데요, 요시야에게 평안을 약속하시는 말씀이에요. "내가 너로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하시는데요. 우리가 지금까지 본 대로 열왕기의 모든 왕들의 죽음이 기록될 때 거의 모두 "잠들다"라고 했어요. 그런데 요시야만 이렇게 믿음의 조상들에게 쓰였던 "돌아가서 들어가게 하리니"라는 표현이 쓰였어요.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요? "돌아가서"와 "들어가게 하리니"가 원어로는 같은 동사 "아사프"인데요, 그 뜻이 "모으다"예요. 이 표현이 모세오경에는 자주 쓰여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다 이렇게 표현되어서, 아론과 모세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하나님 백성에게 죽음은 하나님이 그 조상들에게로 모으시는 거예요. 버려지는 게 아니고요.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 앞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로 모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에게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재회예요. 모두 다 함께 다시 만나는 거예요. 이것이 너무 뭉클한 거예요. 그러니까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나를 죽은 후에도 하나님의 백성에게로 모으신다는 이 확신이라고 생각이 돼요. 우리 모두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나길 축복합니다.
그러니까 이 확신은요, 신념과는 다른 거예요. 이 확신은 율법을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남유다가 얼마나 크게 범죄한지를 깨닫고 옷을 찢고 회개했는데 그 회개를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셨다는 뜻이에요. 이런 회개를 거의 본 적이 없으셔서 가뭄에 단비 보듯이 반가워하셨다는 거예요. 회개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이전에 요시야는 여선지자 훌다에게 사람을 보냈는데, 훌다가 뭐라고 그러냐면 "내가 이곳을 향하여 내린 진노가 꺼지지 않을 것이고 이곳은 황폐해지며 그 주민은 저주를 받으리라"는 심판의 말씀을 받는 거예요. 다만 요시야는 그 재앙을 자신의 눈으로는 보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도 함께 받았어요. 끊임없는 재앙 얘기가 성경에서 나오지만, 요시야는 끝까지 물었잖아요. 훌다에게 묻고 힐기야 성경 듣고. 그러니까 한결같이 끝까지 묻는 자는 하나님도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하시면서 하나님이 의논하시는 거예요. 묻는 자에게는 의논하시는 거예요.
이런 비슷한 말씀을 들은 히스기야 왕이 있었잖아요. 히스기야 왕도 "네가 쌓아두었던 것이 바벨론에 옮긴 바 되고 네 아들 중에서 바벨론의 환관이 되리라"는 말씀을 들었어요. 근데 히스기야도 "네가 사는 날 동안에 태평과 진실이 있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 두 왕의 반응이 달랐어요. 히스기야는 아쉽게도 마지막에 그런 회개의 모습이 보여지진 않았어요. 똑같이 나라의 멸망과 개인적으로 평안의 예언을 들었으나, 늘 하나님께 물었던 요시야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킬 수 없다고 해도 자포자기하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내가 큐티 열심히 하고 예배드리고 회개해도 내 옆에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는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내 옆에 사람이 심판이면 나도 심판인 거냐. 우리 가족이니까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근데 그 말을 듣고 "아휴, 할 수 없겠네요" 이러는 게 아니라 회개하는 자가 있는 거예요. 요시야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게 되고, 그 최선을 다할 때 요시야는 재앙을 보지 않는다. 이런 뜻이에요.
잘 들으세요. 23장 1절입니다.
왕이 보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자기에게로 모으고
그러니까 이제 재앙의 말씀을 듣고도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실제로 보여주는데, 그게 뭡니까? 재앙이니까 오늘이 마지막이잖아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는 모습이에요. 그러면서 요시야가 모든 장로들을 모으는 거예요. 첫 번째 한 일이 무슨 뜻이에요? 쉽게 말하면 조금 전에 20절에서 하나님이 요시야에게 "내가 너를 모으겠다"고 하셨잖아요. "네가 죽어도 내가 너를 하나님 나라로 모으겠다" 이러니까 요시야가 "됐어요"가 아니고 "아, 그럼요. 저는 백성을 모으겠습니다" 이러는 거예요. "저는 내 날 동안에 백성을 모으겠습니다." 하나님의 모으심을 받은 사람은 가만히 못 있어요. 모으는 사람이 돼요. 하나님이 은혜로 나를 모아주셨으니까 나도 누군가를 하나님 앞으로 모으게 되는 거예요. 이게 회개하는 사람이에요. 회개는 사람을 모으는 것이고, 모으기 위해서 지혜를 동반하고요. 그리고 그 지혜는 타이밍을 알게 하세요.
그러나 대부분은 "나라는 망해도 요시야를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신다고 하니까 나는 괜찮지 않은가. 나는 평안히 하나님 나라로 들어간다고 하니까 나는 괜찮지 않은가." 이게 모두의 생각이에요. 히스기야는 약간 그런 것 같아요. "내가 사는 날이 태평하니까" 그 말을 선히 여겼다고 했잖아요, 그죠. 이렇게 나라가 망해가는데도 "나는 괜찮지 않은가, 하나님이 내 예배 열심히 드렸다고 너 괜찮다고 그래, 괜찮지 않은가" 하는 성도들이 너무 많다는 거예요.
이거 어떻게 적용합니까. 인구 절벽 1위가 될 나라이기 때문에 지금 당연히 2030 세대 유권자 수가 40, 50보다 적죠. 그래서 별로 신경을 안 쓴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여러분, 저출산은 흑사병으로 죽은 인구 감소율과 같은 그런 기가 막힌 감소율이라고 하더라고요. 우리나라 이혼율, 자살률도 인구 절벽에 한몫을 해요. 그래도 다들 "나만, 우리 세대만 괜찮으면 됩니까?" 인구가 없어진다는데 동성애도 막아야 되지 않아요? 낙태도 막아야 되지 않아요? 그런데 다들 "나는, 이 세대는 괜찮지 않은가?" 이게 주제예요.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에 들어와서 지금 케이팝과 BTS와 이재와 함께 전 세계를 석권하고 있으니까 "괜찮지 않아?" 케이팝 헤이즈 아시죠? 헤이즈가 정말 괜찮더라고요. 그 분이 꼭 우리들교회 교인 같더라고요. 거절당하는 자들에게 바치는 노래 그죠? 자기가 그렇게 노래를 잘하는데 12년 동안 아이돌 훈련을 그렇게 했는데 자기는 왜 이렇게 잘하는지 모르겠는데 오디션에 붙질 못했어요. 그러니까 걔는 말만 하면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아. 그것이 지금 너무 전 세계에 은혜를 끼치는데, 그래가지고 지금 그 골든이 아카데미상까지 받았잖아. 그리고 걔는 나라 사랑도 대단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이럴 때 이렇게 하나님께서 알려주실 때 아이 많이 나와서 전도할 때 아니겠어요? 이때가 전도할 때인데, 근데 전도할 인구가 없어지고 있어요. 지금 인구가 없어지고 있어요. 우리 이렇게 좋은데 "다 아니, 저러니까 괜찮지 않은가?" 이러면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인구 절벽은 지역과 진영과 세대 모두를 뛰어넘는 주제예요. 여러분이 지금 그렇게 진영 싸움할 때가 아니에요. 지금 괜찮지 않아요. 지금 남유다도 손을 댈 수가 없이, 므낫세 암몬 왕에 의해 57년간이나 우상숭배로 넘쳐나서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의 때가 지금 코앞에 왔다는 거예요. 근데 여기도 다 여전히 "나만 괜찮으면 되지" 다 이러고 있는 거예요.
괜찮지 않으면 어떡하나요? 지혜가 필요하죠. 나만 구원받는다고 기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변하지 않는, 심판받을 식구들의 구원을 위해 이제 천국 가는 그날까지 애통해야 된다는 거예요. 실제로 제 남편이 죽기 3시간 전에 영접을 했잖아요. 이건 기적이에요. 그만큼 주어진 하루하루의 날이 안타까운 날들인 거예요. 결국 제가 남편의 구원을 위해서 뭘 했어요? 회개를 했잖아요. 그러니까 지혜를 주셨어요. 지나고 보니까 이렇게 이제 결론을 내린 거죠. 제가 날마다 구원의 타이밍을 알려주셔서 새벽에 영접을 하게 했잖아요. 그는 구원받고 하나님의 집에서 우리가 서로 모일 것을 영원히 확정하고 갔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기쁘게 살고 하는 거잖아요.
근데 하나님의 시간표에 보면 요시야가 39세에 죽었어요. 그러니까 그때가 지금 얼마나 하루하루가 안타까운 날들의 하루입니까. 지금 요시야가 죽을 때가 가까웠는데, 요시야가 알고 그런 건 아니죠. 그런데 이제 회개를 하면요, 내가 그냥 노느라고 막 타락하느라고 미워하느라고 원수 갚느라고 시간 낭비를 할 틈이 없어요. 그렇다고 또 내가 급해서 회개를 부르짖는다고 내 옆에서 회개가 되나요? 바늘허리 꿰어서 못 쓰죠. 요즘 저도 바늘 꿰려면 너무 힘들어요. 돋보기 끼기도 힘들어요. 힘들어요. 그런데 꿰어야 바느질을 하잖아요, 그죠. 아무리 급해도 그 바늘구멍 같은 한 사람의 마음을 얻는 거부터 시작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근데 바늘구멍 하나 꿰기가 너무 어려운데 그거부터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장로를 모으잖아요, 그죠. 장로. 요시야가 처음부터 장로를 모아요. 가문과 지역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죠. 공동체 대표예요. 회개는 나 혼자 마음 한 번 찡하고 마는 개인감정이 아니에요. 온 공동체가 함께 참여할 공동체적 사건이라는 건데요. 이제 다윗처럼 하나님 나라 시작할 때 환난당하고 빚지고 원통한 자들 400명이 모여서 시작한 나라는 다윗 말을 잘 듣죠. 그런데 이 나라가 지금 이제 500년이죠, 내려와서 나라의 틀이 완전히 딱 정해져서 이때는 너무 힘들어, 아무도 말을 안 들어요. 지금 그러니까 이럴 땐 지도자부터 모았다는 거예요. 큐티 목회를 하려면 그래서 이제 장로님들부터 설득을 해야 되는 게 있더라고요. 설득을 또 어떻게 하나요? 그건 신뢰가 쌓여야 하는데요. 신뢰가 또 어떻게 쌓였나요? 그 하나님만 아시는 그 요시야의 회개가 있었다는 거예요. 이건 말로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회개 후에 요시야가 이제 "나라가 망한다"는 그 얘기를 들었지 않아요. 그랬더니 "이제 망하니까 오늘이 마지막이다"는 생각을 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고 회개를 하고, 이거를, 요시야의 말보다 회개와 통곡의 진정성이 장로들에게 보인 거죠. 이거 보인 거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내가 보이겠다고 해서 보여지는 게 아니에요.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진정한 회개예요. 남편의 구원을 위해서 생명을 내놓으니까 저도 오늘이 마지막이잖아요. 그럼 오늘이 마지막인데 할 게 뭐가 있어요? 회개밖에 더 있어요? 아니, 생명이 뭐 두 개예요? 내 한 생명. 천국으로 모임을 당하려면 회개를 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마지막이라는 마음이 저절로 들었어요. 생명을 내놓으니까. 그러니까 그런 마음으로 요시야가 모든 장로들을 모았어요.
그러니까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그래 끝이야, 아무것도 안 하고 놀자"가 아니고, 스피노자가 말했잖아, "내일 지구가 망한다고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이게 성경적인 얘기인데요. 그게 되더라고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죽어도 하나님께서 모으시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이런 확신이 드는 사람은 내가 갈 곳이 정해졌는데 그곳이 너무 좋은 곳이기 때문에 그곳으로 같이 가고 싶은 거예요. 너무 좋으면 저절로 소개하고 싶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망한다는데 다 끝이야" 그러니까 이제 아주 확신이 없는 거예요. 이러고 있으면 여러분이 갈 곳으로 천국으로 모음받지 못한 자예요. "다 끝이야" 이러면. 모음받은 자는 마지막까지 이렇게 모으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여러분들은 그냥 단 한마디 "우리 예수 믿고 천국에서 모이자" 이렇게 유언하셔야 돼요. "우리 예수 믿고 천국에서 모이자." 이거를요. 모든 사람들이 또 하지 않더라고요. 제가 가보니까 "너는 꼭 결혼을 해라" 이게 마지막 말이더라고요. 결혼을 해라, 학벌이 있어가지고, "꼭 자매랑 결혼해라." 예수 믿으라고 얘기 좀 하라고 내가 아무리 얘기를 해도 그 얘기를 못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결혼해서 이혼했잖아요. 그렇죠.
자, 2절입니다.
이에 왕이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며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노소를 막론하고 다 왕과 함께 한지라
그러니까 요시야가 진짜 회개를 하니까 회개가 확산이 되는 거예요. 한 사람이 중요해요. 확산이 돼서 전부 와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이벤트도 아니고 프로그램도 아닌 거예요. 요시야의 회개가 백성들을 불러 모으게 하신 거예요. 모아서 어디로 올라갑니까? 요시야는 왕궁으로 올라가지 않았어요. 여호와의 성전으로 올라갔어요. 공동체를 자기 편으로 모은 게 아니에요. 여호와 앞으로 모은 거예요. 이게 너무 중요한 거예요. 사람을 내 밑으로 모으면 세력이 되고 패거리가 되죠, 그죠? 그러나 회개한 사람은 사람을 여호와 앞으로 인도하는 거예요. 이걸 분별을 못해요. 패거리인지 여호와 앞으로 인도했는지.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확신이 없으면 사람들이 지금 다 "와보라" 그러잖아요? 그러면 지금까지 회개하지 않았던 예루살렘 이 사람들이 갑자기 너무 이상하잖아요, 그죠. "아유 저 요시야를 왜 저렇게 신격화하는 거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회개를 안 해봐가지고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거예요.
요시야가 성전에 올라가면 어떻게 됩니까? 유다 모든 백성이 노소를 막론하고 다 함께 올라갑니다. 우리는 "저 사람은 안 돼, 저 집은 안 돼, 쟤는 어차피 안 올 거야" 이러면서 자꾸 예외를 만들어요. 자기를 예외로 둘 때도 있지요. "나 같은 사람이 어떡해. 쟤도 안 되고 나도 안 되고."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 데는요, 예외가 없는 거예요.
전도주일에 보살님만 찾아다니던 한 친구에게 너무 어렵게 어렵게 그래서 한 일주일 전인가 "교회 가자. 아무개야 내 소원이야. 한마디만 딱 해" 놓고 이제 그 직전 수요일에 또 막 기도를 한 다음에 그냥 아주 담담하게 "교회 갈래?" 그랬더니 그 친구가 "기다렸어" 이러더라는 거야. 그래가지고 이제 지난 주일날 부담을 느낄까 봐 그냥 조심조심 내려와 친구에게 말씀이 들리기만을 기도하면서, 저는 그냥 친구 신경쓰느라고 사실 무슨 설교를 하셨는지 기억도 안 나고 오직 "연애" 두 글자만 기억이 나는데, 영접 시간에도 기도만 하고 너무 떨려서 친구를 쳐다보지도 못했다는 거예요. 영접 끝나고 딱 보니까 친구가 일어나 있다는 거예요. 근데 이후에도 한마디도 안 했는데 자발적으로 등록하고 자발적으로 목사님과 사진도 찍었다는 거예요.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아니 우리도 교회 조금만 일찍 왔더라면 이혼하지 않았을 수 있겠어. 그리고 목장은 몇 번 가는 거야? 어떻게 하는 거야? 나도 오늘 간증한 분처럼 하면 되는 거야?" 매일 보살님만 찾아다니며 물었는데 친구 정도로 이제 하나님께 물어보기 시작했다고 간증하면 되는 거야. "우리 애들이 나한테 말은 못 해도 이혼으로 인한 상처가 클 텐데, 아이들이 공동체에 속해서 나에게 하지 못하는 말을 나누고 갔으면 좋겠어." 정작 전도한 집사님은 "연애" 워딩 뺏겨 설교가 기억이 안 나는데 생판 새까만 친구가 이런 반응을 보였으니 전도를 왜 해야 하는지 아시겠죠. 조금만 먼저 왔으면 이혼 안 했을 거라고 이러잖아요.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주님이세요. 이 친구는 너무 기뻤어요. 그래서 저한테 또 편지를 써서 보낸 거예요.
그냥 요시야의 회개는 신-불신간에 성경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함께 올라가는 기적을 이제 이룬 거죠. 회개보다 확실한 전도는 없어요. 누가 말하기 이전에 회개를 하니까 자발적으로 여호와의 전에, 또 우리 교회에 "한번 와보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온 분이 이제 등록을 하는 거예요. 회개가 너무 중요해요.
그런데 이제 또 더 중요한 게 있죠. 내가 누구를 모으기 전에 내가 먼저 모여야 해요.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로 모아주셨잖아요. 그런데 정작 우리 마음은 모여 있는지 돌아봐야 해요. 몸은 목장에 와 있는데 마음은 안 모여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 자리에 앉아는 있는데 마음은 여전히 내 행복과 고난, 내 일과 손해로 흩어져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마음이 공동체로 먼저 모여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회개는 어디서 멈춰 있어요? "나만 평안하면 됐지, 나만 은혜 받았으면 됐지" 여기서 멈춰 있지는 않아요? 그럼 회개가 아직 나한테서만 맴돌고 있는 거예요. 진짜 말씀을 들은 회개는 나 혼자 평안한 데 머물러 있지 못해요. 옆에 있는 내 배우자, 내 자식, 내 부모, 내 목장, 내 이웃을 자꾸 여호와 앞으로 끌어당기게 되는 거예요. 한 사람의 회개가 공동체를 여호와 앞으로 부르는 거예요. 쌩짜들도 이렇게 오는데 여기 있어도 공동체에 속하지 못한 사람이 있죠. 이 설교가 들리지 않는데 계속 인간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래서 이 교회를 떠나야 되겠다. 도대체 이 죄 고백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 많이 듣고 결론이 또 그거예요. 그럴 수 있어요.
이 모음이 어디까지 갈까요? 요시야의 모음이 끝이 아니에요. 성경 전체가 하나님이 흩어진 백성을 모으시는 이야기예요.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흩어졌어요. 또 바벨에서 온 민족이 흩어졌어요. 그런 인류를 하나님이 다시 모으시는 거예요. 우리 주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마 23:37, 눅 13:34)
예수께서 우리를 하나로 모으시려고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거예요. 흩어진 우리를 모으기 위해서. 그러니까 말씀을 들은 사람은 혼자 평안하지 않아요. 공동체를 하나님 앞에 모아요. 여러분이 이렇게 모여있는 것도 여러분보다 먼저 말씀 듣고 회개한 한 사람이 여러분을 호호 불며 데려왔기 때문에 여기 앉아있는 거예요. 그렇죠? 이제 여러분도 이렇게 모으는 그 한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해요.
요시야의 회개가 확실하기 때문에 영혼구원으로 나가게 돼 있는 거예요. 가장 확실한 회개를 했기에 오늘 사과나 망고를 심는 것처럼 즉시 장로들을 모으고, 그 지도자 한 사람의 회개가 전염이 돼서 얼마나 중요한지. 지도자, 집에서 가장, 대표들. 그러니까 이거 저한테 적용하면 저 혼자 서 있으면 이게 되는 거더라고요. 그렇죠? 제 회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여러분들이 저절로 이렇게 평가를 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진짜 자발적으로 "와보라, 와보라" 이걸 하는지 안 하는지는 이제 저에게 달려있는 거죠. 경고로 받는 거예요. 제가 모든 사람들을 다 회개를 하게 했으면 좋겠지만 안 들리니까 이제 떠난다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이제 이게 제 탓인 거죠. 그렇죠?
적용 질문이에요.
몸은 예배의 자리에 와 있지만 마음이 흩어져 있는 일은 무엇이에요?
나만 평안하면 괜찮다는 생각으로 멈춰 있는 곳은 어디예요?
내가 하나님 앞으로 모아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꼭 하고 싶은 유언이 무엇이에요? 시집 잘 가라? 그거예요? 장가 잘 가라?
둘째,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들려줍니다.
모아서 말씀을 들려줘야 되는 거예요. 2절 이어서 봅니다.
왕이 여호와의 성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모아서 발견한 언약책의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들려줍니다. 누가요? 왕이. 요시야 왕이 읽어줘요. 처음 이 책이 발견됐을 때는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읽어줬잖아요. 그땐 요시야가 듣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백성에게 읽어주는 사람이 됩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이 말씀을 들려주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사실 이 낭독은 새로운 게 아니에요. 모세가 이미 명령했던 일인데요. 신명기 31장에 읽어주는 거예요. 신명기 31장 11절을 보면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에게 듣게 할지니 남자도 여자도 아이도 나그네도 모두 다 듣게 하라"
왜죠? 듣고 배워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려는 거예요. 요시야가 지금 이것을 회복하고 있는 거예요. 잊어버렸던 이 낭독을 다시 살려낸 거예요.
그런데 요시야가 들려주는 게 뭐예요? 자기 생각? 아니죠. 자기 교훈도 아니에요.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요. 왕의 권위를 세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권위로 세우는 거예요. 이게 회개한 지도자의 특징이에요. 자기가 권위자 되는 게 아니라 말씀 아래 머무는 거예요.
요시야가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 옷을 찢고 통곡했잖아요.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의 위력을 절감했어요. 그래서 "이거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에게 이 말씀을 읽고 들리게 해야겠구나." 제가 힘들었는데 큐티를 하고 회개를 하니까 해석이 되어서 살겠더라고요. 그러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큐티를 하라고, 말씀을 읽고 들리게 하고 싶었어요. 해 아래 새것이 없어서 성경에 나와 똑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 항상 제가 놀라웠어요. 진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22장에서 율법책이라고 했던 책을 이제는 언약책이라고 하잖아요. 말씀을 듣고 나한테 주신 음성으로 듣는 사람은 언약책이라고 하는 거예요. 책이 바뀐 게 아니에요. 그 책에 기록된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가 드러난 거예요. 언약이 뭡니까? 그냥 지켜야 할 규칙과 목록이 아니고요. 좋은 말 한마디가 아니에요. 우리를 하나님과 묶는 관계예요. 나를 하나님께 속하게 하고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는 생명줄이에요. 그러니까 율법이 율법으로만 들리면 부담이에요. 근데 그 율법이 나를 살리시려는 하나님과 나를 묶는 언약으로 들리기 시작하면 그게 은혜인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이 나에게 들려지니까 성경이 나를 읽고 가게 되고, 창조주가 말을 걸어주기 시작하니까 감당 못할 시험은 없는 거예요.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인, 더 웨이 예수님이 거기 계셨어요. 피할 길이 예수님이에요. 환경이 아니고. 결혼도 그래서 언약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과 나를 묶는 언약의 관계가 결혼이에요. 힘든 배우자도 하나님과 나를 묶는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쓰시는 거예요. 그래서 결혼의 목적이 행복이 아니고 거룩인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진다면 어디에도 길, 더 웨이 예수님, 예수님이 계시니 희망이에요. 결혼뿐만 아니라 여러 갈등과 다툼으로 분열된 우리 사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고 순종하겠다는 그리스도인들의 결단과 헌신이 있다면 회복은 가능해요.
요즘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러 모이더라고요. 엊그제는 고등학생들이 시청 앞인가 그렇게 모여서 그냥 기도회를 하더라고요. 제가 다음 세대를 위해서 목을 놓아 기도를 한 그 자리에 청소년이, 청년들이 모여서 다른 거 하나도 안 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기도도 너무 잘하고. 그런 일이 또 이렇게 일어났더라고요. 절망 속에 희망을 보게 되는데요. 와, 이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구나. 다음 세대가 다 무너졌다고 생각했는데. 저는 이런 때일수록 청년들에게 좀 더 말씀을 읽어 들리게 해야겠습니다. 네.
그러니까 요시야 자신이 듣고 옷을 찢을 수밖에 없었던 그 말씀까지 하나도 빼지 않고 다 읽어줬어요. 우리 어떻습니까? 성경을 골라 들으려고 해요? 내게 복 주는 구절, 위로되는 구절은 밑줄 쫙쫙 긋고 외웁니다. 한국 성도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 1위가 빌립보서 4장 6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듣기만 해도 좋죠. 그리고 또 욥기 8장에 보면 "내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할렐루야 아멘, 뭐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런데 내 죄를 찌르는 구절, 나를 불편하게 하는 "내가 이곳에 재앙을 내리되 돌이키지 아니하리라"는 구절은 어때요? 이건 슬쩍 넘어가려고 하죠. "이건 그때 이야기지, 이건 나한테 해당 안 돼, 왜 성경을 그렇게 봐?" 이러던 거죠. 피합니다. 기복적인 구절만 붙들고서 성경 봤다고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성경은 구속사의 책이기 때문에 우리가 좋아하는 구절도 구속사로 해석하면 아까 빌립보서 4장 6절에도 내 죄가 보이는 구절인 거예요. 어떻게 감사를 하겠어요? 그렇죠? 내 죄가 안 보이면 기도와 간구가 나오는 게 아니에요. 해석을 해야 돼요. 성경을 이렇게 차례대로 읽어가는 것이 책망도 위로도 받는, 내 죄가 보이는 비결인 거예요.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성경에 있잖아요. 위로 얘기가 지금 하나도 없잖아요. 그런데 편식하지 않고 이 네 가지, 책망을 받아야 17절에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그래야지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거예요. 책망을 잘 받아야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나를 찌르는 말씀은 나를 버리려는 말씀이 아니에요. 언약 밖으로 밀어내려는 말씀도 아니에요. "너는 내 백성이다, 그러니 돌아오라" 하시는 말씀이에요. 찔림도 언약의 은혜예요. 책망도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그러니 모든 말씀을 듣는다는 건 내 죄를 찌르는 그 말씀까지 "아멘, 이것도 저를 살리시는 언약의 말씀입니다" 하고 받는 거예요. 바로 이것이 우리 큐티의 정신이에요.
그러니까 말씀을 들은 사람은 자기 말을 들려주지 않아요.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들려주는 거예요. 그러므로 성경을 이렇게 차례대로 읽어가는 것은 나의 죄를 피해갈 수가 없는 최고의 훈련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비교적 죄를 보는 거예요. 그리고 자발적으로 그래도 전도를 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모이고, 성경을 읽고, 들려주고, 나누는 모임이야말로 최고의 공동체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바벨론 그발 강가에서 사로잡혔기 때문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모습을 보니까 죄의 실체가 보였다고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사로잡힌 게 무서운 게 아니고, 사로잡힌 것이 하나님 만나는 지름길 아니겠어요? 성경을 이렇게 구속사로 해석을 해야지, 좋은 본문 나쁜 본문이 어디 있겠어요? 성경은 안 좋은 본문이 없는 거예요.
적용 질문이에요.
성경을 골라 듣고 있지 않아요?
큐티 제목만 보고 건너뛴 날은 없습니까?
나를 찌르는데도 "아우, 이건 나한테 해당 안 돼. 아우, 이 교회를 떠나야 되겠네" 하며 피하고 있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번 주 목장에서 솔직하게 나누겠습니까?
솔직하다고 구원 생각 않고 그냥 자기 감정을 이렇게 털어놓으면 모두가 상처받지 않아요. 믿음에는 분량이 있는데 무조건 솔직하라고 아니고, 이게 구원까지 가려니까 양육을 받으셔야 돼. 큐티를 하셔야 돼. 내가 무슨 말을 언제 어떻게 해야 될지.
셋째, 함께 서서 언약을 세웁니다.
모여서 들어서 세우는 거예요. 3절입니다.
왕이 단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며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며 백성이 다 그 언약을 따르기로 하니라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은 요시야 왕이 이제 무엇을 합니까? 일어섭니다. 일어서요. 그러고는 오늘 제목이죠, 언약을 세웁니다. "세우다"는 이게 이제 원어로 "자르다, 가르다" 뜻이에요. 옛날에는 언약을 맺을 때 짐승을 잡죠, 반으로 딱 자르고 그 사이로 횃불이 지나가고, 목숨 걸고 약속한다는 뜻이에요. 약속을 어기면 이 짐승처럼 잘릴 거다, 그만큼 진지한 거예요.
근데 요시야가 세우는 건 새로운 언약이 아니에요. 시내산에서 이미 주셨던 그 언약을 다시 붙드는 거예요. 잊고 버렸던 언약 앞에 다시 서는 거예요. 유다 백성이 말씀을 다 잊어버렸어요. 이제 말씀을 들은 회개가 가야 할 자리예요. 이게 여호와 앞에 서는 거예요.
어떤 언약을 세웁니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키겠다고 서약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고 해요?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기록된 말씀을 이루게 하겠다는 언약을 세우는 거예요. 어떻게 해요? 전심으로 순종하고 계명을 지켜서. 여기에 "이루게 하리라"는 이게 "서게 하다, 세우다" 이런 뜻이에요. 기록된 그 말씀이 책 안에만 머물지 않고 내 삶 속에 실제로 서게 하겠다, 내 순종 안에서 말씀이 유효하게 되게 하겠다. 이 말씀이 진짜다, 내 삶을 통해서. 말씀을 듣는 것이 최우선이지만 그냥 듣는 데서 끝나면 그건 아직 종이 위에 있는 말씀이잖아요. 그 말씀이 우리 삶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게 필요해요. 성도의 삶은 말씀이 응하는 삶,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거예요.
3절 마지막이 무엇입니까?
백성이 다 그 언약을 따르기로 하니라
요시야가 말씀을 읽어 들리게 하니까 백성이 다 그걸 따르기로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것도 백성이 따르기로 하는 것이 백성이 다 그 언약 안에 섰다, 이 뜻이에요. 처음에 왕이 단 위에 섰잖아요. 왕을 따라서 백성도 함께 섰다는 뜻이에요. 언약을 세우는 일에 동참했다는 뜻이에요.
같은 사건을 기록한 역대하 34장 32절을 보면
"요시야가 백성이 다 여기에 참여하게 했다."
"참여하게 했다"고요. 이게 바로 "서게 했다"는 말이에요. 여기서도 한 사람이 이렇게 중요한 거예요. 요시야 한 사람이 언약의 말씀 앞에 서서 백성을 서게 하니까 온 공동체가 함께 언약 공동체로 빚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함께 모인 공동체가 함께 듣더니 이제 함께 서는 거예요.
여러분, 왜 백성이 다 같이 섰을까요? 말씀을 이루는 것, 말씀을 내 삶에 서게 하려면 나 혼자만 서도 되지 않아요. 말씀 묵상하고 적용하는 큐티도 나 혼자 하면 되지 않아요. 근데 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함께 서야 할까요? 이건 혼자 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혼자 서려면 자꾸 넘어질 뿐이에요. 혼자 공부 잘하고 일 잘하고 관계 잘할 수는 있겠지만요,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는 것은 우리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오죽하면 우리 예수님도 이 땅에서 말씀이 응하게 하시는 삶을 사실 때 혼자 감당하지 않으셨잖아요.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님이 총출동하셔서 예수님을 도우셨어요. 능력이 부족해서 그러셨겠어요? 아니죠. 함께 서는 게 너무 중요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부터가 늘 함께 일하시는 분이에요.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우리 구원을 이루신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함께 일하시는 분이에요.
그래서 우리에게 공동체가 있어요. 목장이 있어요. 혼자 못 서니까 함께 서라고 주신 거예요. 목장에서 지체들이 같이 말씀 붙들고 서 있으니까 그 힘에 기대어 나도 한 발 순종할 수 있는 거죠. 도저히 못 버틸 것 같은 자리도 옆에서 같이 서주니까 서게 되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한 발 순종하고 적용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게 또 다른 지체에게 함께 서는 공동체가 되어서, 그가 서게 해주는 거예요. 성령님의 손이 되고 발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공동체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이에요.
여러분, 요시야가 그렇게 마음과 뜻을 다해 순종해서 그 말씀을 이루겠다고 했지만 사람은 그 말씀을 이룰 수가 없어요. 서로 함께 서서 붙들어줘도 우리는 결국 다 같이 넘어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몸인 거예요. 그런데 이 연약한 몸을 주님이 자기 몸 삼아 주셨어요. 그래서 그 몸을 주님께서는 주님의 능력으로 덮어주셨어요. 우리가 설 수 없고 세울 수 없는 것을 우리 주님께서 친히 서주셨고 세워주셨어요.
다윗을 보세요. 너무 연약하고 약한 모습을 지금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어요. 지나고 보면 사울은 예배 중독자예요. 예배도 혼자 드리고, 그냥 이 사람은요 연애도 안 해요. 사울은 여자가 없는 거 아시죠? 모든 것이 다윗이에요. 다윗이 따라갈 수가 없는 모범생이에요 사울이. 그런데 사울에게는 공동체가 없어요. 옆에 있는데 알아보지를 못해요. 세계적인 선지자 사무엘이 있고, 세계적인 아들 요나단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인 다윗이 사위인데, 그렇게 예배 중독자인 사울이 이들을 평생 미워하고 핍박하고. 왜? 왜? 다윗은 사울은 천천이 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해서. 그 예배 중독자가 시기 질투하느라고 그냥 인생을 그러고 살아요. 똑같은 사람인 사무엘, 요나단이 다윗에게는 세워주는 지체들이었잖아요. 똑같은 사람이 한 사람에게는 원수고 한 사람에게는 지체인 거예요. 그러니까 공동체라고 다 같은 공동체가 아니고요. 다 훌다, 힐기야 공동체가 돼야 해요.
우리의 가정도 언약 공동체이죠. 그러려면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은 꼭 지켜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명령하셨으면 하나님이 반드시 세워주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언약은 새 언약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과 자기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이에요.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 앞에 서고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는 거,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는 것은요 우리 힘으로 뭔가를 하는 그런 행위적인 게 아니에요. 행위가 아니에요. 우리가 서는 것은요 오직 그리스도의 몸에 딱 붙어있는 거예요. 그게 뭐예요? 공동체라고요. 공동체에 속해서 함께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언약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에요. 그냥 공동체에서 나누기만 해도 기쁘시게 받으세요. 따라서 오늘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적용할 수 있는 일은 그냥 공동체에 붙어있는 거예요.
지난번에 패트릭 민즈 목사도 "어떤 것도 아니고 내가 내 죄를 날마다 고백하는 거, 그거밖에 없더라." 예. 뭐뭐, 이게 머릿속으로 하는 게 아니고 날마다 우리가 그렇게 죄인이거든요. 예배의 자리에 나와서 그냥 나누는 거예요. 목장에 들어가 목장 식구들과 함께 묵상하고 진실하게 나누고 듣고 전심으로 순종하는 거예요. 목장에 굉장히 거룩한 얘기하지 않아요. 이상한 얘기해도 목장이 최고예요. 어떤 집사님은 이번 예배 때 남편이 "나를 보고 남편이 머리입니다" 하고 계속 얘기를 해요 아내한테. 그래서 아내는 "네, 맞아요. 내 남편은 머리카락입니다" 하고 이제 또 대답을 해줬대요. 이렇게 나눠도 기쁜 거예요. 할렐루야! 이것이 연약한 내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이고요.
이렇게 부족한 내 삶에 이제는 언약이 굳게 세워져서 "말씀대로 살았다"는 간증의 시대를 살아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SG 시니어 여러분이 경북에 TT를 세 곳 모두 어려운 형편에 담임 목사님들이 사역을 하고 계셨는데, 그냥 이 TT팀의 방문이 여름날에 단비와 같이 힘든 사역에 위로가 되었다고 해요. 간증과 목장 시연을 통해서 거기 담임 목사님 성도들이 너무 놀라면서 은혜를 받았다는 거예요. SG 성도님들이 그쪽 담임 목사님에게 얼마나 열성적으로 8월에 있을 대구 목사 컨퍼런스를 홍보하시는지, 결국 허락을 받아내셨고, 그래서 이 TT 사역이 지역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들교회도 꼭 필요한 사역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계속 참여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또 요청을 하신다는 거예요.
앞으로 우리들의 간증은 가고 오는 세대에서 언약을 세우는 찬란히 빛나는 교과서가 될 날이 올 줄 믿습니다. 우리는 이게 문서로 남겨지고 있잖아요. 옛날에 이 모든 경전들이 그렇게 해서 나왔어요. 지금은 성경이 너무너무 많아가지고 옛날에는 성경이 없었는데, 이 간증, 여러분들의 간증은 이 어마어마한 고전과 경전과 교과서가 될 줄 믿습니다.
적용 질문이에요.
나는 공동체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습니까? 누워 있습니까? 앉아 있습니까? 서 있습니까? 아니면 부재 중이에요?
공동체 안에서 나도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경험한 일이 있어요?
내가 함께 서 있어줘야 할 지체는 누구입니까?
우리들의 간증이 언약 교과서가 될 것을 믿습니까? 이 간증 하나만 남겨줘도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어마어마한 유언을 하고 가게 되는 거예요. 이 간증 하나만 남겨줘도. 목장에서 나눔하는 거예요.
내가 빚이 언제쯤 갚아지려나 많이 기다리는데, 눈에 띄는 변화를 보려면 10년은 지나야 하고 20년까지도 갈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하루하루 가다 보면 금방 1년이 가는데, 이 기다림이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기다림 때문에 한눈 팔지 않고 직장생활을 잘해요. 교회 가고 목장 나오는 것이 즐거우니까요. 초창기에는 일부러 피하려고 술약속을 잡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 자체가 안 나요. 수입도 정해진 급여로 빚을 미리 갚고 고정 헌금을 하니 감사합니다. 엊그제 아내에게 "죽은 개 같은 나를 도와줘서 고맙다. 아내가 옆에서 가정을 지켜주는 것이 너무 감사해서 앞으로 더 잘하겠다"고 했어요. 지금 돈이 넘치는 것보다 이렇게 마음 편하게 서로 의지하는 게 최고라고 생각을 해요. 아내에게 "나와 살아줘서 고맙다. 당신이 나보다 옳다"고 하니 감동을 받더라고요. 여러분, 이렇게 감동을 주면 변화가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빚, 누구는 빚이 얼마? 2억 있다고 자살하려던 분 오셨어요. 여기 목자 되셨잖아요. 2억 빚 때문에 자살하려고 경부고속도로에서 차 타고 가다 미수에 그쳐서, 경부고속도로 보니까 "그럼에도 살아납시다" 이게 표가 있어가지고 저한테 메일을 줘서 한 번만 와보라고 그랬더니 그분이 오셔가지고, 그날 부동산 목장에 보냈더니 거기 74억 빚진 분이 "무슨 2억 가지고 그러냐" 살아났다, 뭐 이런 얘기를 들었어요. 그러니까 빚 때문에 죽는 게 아니고, 빚 때문에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이 이거를요, 이거 최고로 행복하게 살지 않아요? 빚을 갚기로 작정만 하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 목자님이 이분의 나눔에 이렇게 대답해요. "저도 사실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 아내의 쇼핑 중독으로 카드빚이 쌓여 이용정지까지 하고 완전히 망하는 사건을 통해서 우리도 교회 와서 하나님 만났어요. 그래서 이제 그 이후 아내와 재결합을 목표로 함께 예배드리고 이제 목장에 나가서 드디어 재결합을 했는데, 아내에게 생활비 카드를 주고 매달 통장으로도 이체했는데 1년도 안 됐어요. 그래서 1,800만 원 빚을 또 만들었어요. 그때 이제 공동체에 물었더니 돌아온 처방이 '생활비 더 올려줘라. 애엄마니까 살아야 한다.' 그 말도 안 되는 처방에 순종했더니 아내가 감동받고 변화되어 지금까지 신용카드를 한 번도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게 목장이에요. 집사님도 지금 그 순종의 자리를 잘 걷고 계신 거예요. 너무 감동. 언약 교과서 되지 않겠습니까? 누가 이런 처방을 해주겠어요. 그냥 조금만 뭐 하면 "이혼하라. 왜 그러고 사냐." 우리는 언약 공동체의 결혼이라는 걸 아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