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처음 오신 여러분, 연애해보셨죠? 연애하면 어떻게 돼요? 밥이 안 넘어가요. 잠이 안 와요. 새벽 2시에도 답장을 기다리느라고 휴대폰만 들여다봅니다. 얼굴이 핼쑥해져요. 옆에서 보면 병이에요, 병. 그런데 오늘 본문에 진짜 그 병 걸린 남자가 나옵니다. 오늘 교회 와서 그것도 설교에서 연애 얘기 들을 줄은 꿈에도 모르셨죠? 이거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니고요, 일단 개역한글 성경으로 보면 오늘 본문 1절이 "암논이 저를 연애하나" 이렇게 성경에 연애가 떡하니 나와요. 그런데 "연애하다"가 아니고요 "연애하나"예요. 그런데 그 다음이 있다는 말이에요. 연애하면 좋을 줄 알았는데 반전이 있다는 거예요. 그것도 아주 좋지 않은 반전이 있다는 말이에요. 감정이 강하다고 다 사랑은 아니에요. 다윗의 아들 암논도 사랑 때문에 병든 것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그 다음에 사랑이나 연애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 따라오네요. 우리 인생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저렇게 하면 잘 될 줄 알았는데, 그 다음에 전혀 다른 민낯이 드러나곤 합니다. 특히 연애라고 부를 만큼 설렘 가득한 일일수록 그 실체는 전혀 딴판일 때가 많아요. 여러분은 무엇과 연애하고 있습니까? 그 감정이 아무리 강해도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암논이 연애하나"를 보면서 내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겠어요.
1. 죄의 삯인 사랑입니다 (부모로부터 대물림 되는 사랑)
이건 부모로부터 대물림된 사랑인데요. 부모 책임이라 이거죠. 1, 2절입니다.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다른 아들 암논이 그를 사랑하나 그녀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 때문에 울화로 말미암아 병이 되니라
"그 후에"는 다윗이 11장, 12장에서 밧세바를 빼앗고 우리야를 죽이는 무서운 죄를 저지른 다음이에요.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라는 나단의 경고를 듣고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나이다" 회개했더니 죄를 사해 주셨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죄를 짓고 있을 때도 다윗은 암몬과의 전쟁에서 이겼어요. 그러면 다윗이 완벽해서 이겼나요? 사도행전 13장 보면 사울을 왕으로 세웠는데 패하셨어요. 그 다음에 다윗이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세웠다 그래요. 이런 범죄자가 어찌 하나님의 마음에 맞겠어요. 그리고 이제 사도행전 13장 23절에 보면 왜 세웠냐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그러니까 이제 구속사를 이루기 위해서 유다를 통해서 내려오는 구속사가 사울보다는 다윗이 좀 더 맞았다 이거예요. 비교해서 좀 더 맞았다는 표현이지 다윗을 우러러볼 건 하나도 없는 거예요. 행위가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유다도 다윗도 문제 많은 사람 아닙니까? 유다와 다말은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동침했고 다윗과 밧세바는 엄청난 불륜이에요. 사실 이 둘이 얼마나 천인공노할 죄를 지었습니까? 그런데 이런 사람이 예수님의 족보를 이어간 것은 정말 은혜로 여겨주신 거죠. 이 죄인들을, 그래서 약속이라는 것이, 가장 약속의 자녀가 되는 비결이에요. 그래서 다윗이 위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약속대로, 예고한 대로, 칼이 떠나지 않잖아요. 그 일이 이루어져야 되잖아요. 그래서 그 후에 자녀들의 이 일이 따라와야 했어요. 이제부터 자녀를 통해 진짜 눈물의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에요. 이것은 사실 눈물의 인생이지만 다윗을 향한 지극한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본문에서 압살롬은 다윗의 아들이라고 하고 맏아들 암논은 다윗의 다른 아들이라고 해요. 벌써 다윗이 압살롬을 편애했다는 뜻이에요. 압살롬이 잘생겼잖아요. 그 여동생 다말도 아주 예뻤어요. 다말이라는 이름은 창세기의 유다 며느리 이름이잖아요. 다말들은 다 이렇게 예쁘고 또 믿음이 있네요. 여기 암논이 꽂혔어요. 사랑했다, 연애했다고 해요. 이게 진짜 사랑이면 문제 될 게 뭐겠어요. 그런데 어떻게 되어요? 울화병, 상사병에 걸리는 거예요. 왜 걸렸을까요? 장자인데도 지금 압살롬이 후계자 같잖아요, 그죠? 열등감이 그냥 아주 치솟는 거예요. 그래서 그 동생을 내가 차지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계속 압살롬의 누이라고 나오잖아요. 그런데 이 다말이 응하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그때 누가 등장해요? 3절에 보니까 심히 간교한 친구 요나답이 옵니다. 열등감이 심한 사람이 높은 자리에 가면요 아부하는 사람만 살아남아요. 그래서 권위적이 되잖아요. 열등감이 많은 사람이 권위적이에요. 4절에 이 간교한 친구가 "너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 그러니까 암논이 "내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사랑해서 상사병이 걸렸어." 그래서 5절에 "야, 너 병든 척 하다가 네 아버지가 오시면 다말 좀 보내달라고 해" 그리고 계책을 내요. 당시에 처녀 공주는 보호를 받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일반 여자가 아니잖아요. 아버지 허락 없이는 다말도 다른 오빠 집에 놀러 갈 수가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이 말을 들은 암논은 6절에 지체 없이 곧 계책대로 연기를 해요. 여러분, 악은 얼마나 부지런한지 몰라요. 악은. 그러니까 7절에서 다윗이 사람을 보내 다말이 가도록 허락을 했다고 그러잖아요. 이것은요 11장 12장에서 다윗이 사람을 보내서 밧세바를 부르고 사람을 보내 우리야를 죽게 한 거하고 같아요. 아픈 암논을 보고 지금 이제 암논이 아프다고 그래서 갔잖아요. 백전노장인 다윗이 아들이 꾀병인 걸 몰랐겠어요? 그러나 회개를 했어도 이 자신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자녀의 죄를 객관적으로 보고 싶지 않아요. 분별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드러내지도 못하고 양육하지도 못합니다. 이런 다윗의 범죄의 연장으로 아들의 간음과 살인을 무섭게 불러들이고 있어요. 그러므로 다윗은 유부녀 밧세바를 범했는데 아들은 여동생 다말을 범한 거예요. 당장 나단의 예언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네요. 아버지는 권세가 있으니까 속전속결로 간음을 했지만 암논은 그만큼 권세가 없어서 상사병을 앓게 된 거예요. 약해서 생긴 병이 아니에요. 죄를 저지르지 못해서 난 병이에요. 그러니까 죄 지를 기회만 노리는 거예요. 이 악이 어디서 왔어요? 성경은 죄의 영향력이 3, 4대까지 간다고 해요. 아버지가 간음하니까 아들도 하는 거예요. 그 아래 솔로몬은 아내와 첩이 천 명이에요. 성경에서 최고의 족보인 다윗 집안인데도 사실은 범죄자 집안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문제 부모만 있는 것이에요.
다윗은 암논의 어미인 아히노암도 암논도 사랑하지 않고 미갈, 아비가일, 밧세바 등 굵직한 사랑 타령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몰라요. 게다가 아버지가 전쟁 통에도 여자를 계속 얻어들이고 있는 걸 봤어요. 일찍 쾌락의 눈을 떴어요. 그 정욕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연애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암논 마음에 불을 붙였습니다. 이름표는 고상하게 사랑이라고 달았지만 실상은 정욕이에요. 펄펄 끓어오르는 정욕이 향한 게 예쁜 여동생 다말이었어요. 그렇게 대형 사고를 치고 말이에요. 우리가 계속 읽어가면서 이 굉장한 죄악이 다윗부터 비롯된다는 걸 여러분들은 아셔요. 다윗이 회개를 했는데도 오랜 습관이 된 죄는 내 의지로 못 끊어요. 정욕이든 돈이든 인정욕구든 중독이든 죄는 대물림되고 반복돼요. 좋은 본을 애써 보여줘도 잘 안 따라오는데 악한 습관은 보이는 척만 해도 전염이 돼요. 이것이 죄의 삯이 대물림되는 무서움이에요. 우리는 부모의 죄에 대해서 생각해보는데 이런 것도 다 불편해요. "우리 부모님은, 우리 조부님 훌륭하셨어" 이렇게 생각하고 말해줘야만 후손들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훌륭한 부모가 없어요. 아무리 훌륭해도 죄인이고 아무리 엉망이어도 죄인이에요. 그러니 회개는 내 죄의 뿌리를 정직하게 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지난주에 본 요시야도 조상들의 죄를 인정했고, 얼마 전 큐티의 에스라도 자기 죄뿐 아니라 조상의 죄까지 자복했어요. 나의 잘못된 행동의 뿌리를 알지 못하면 고치기가 어려워요. 고통을 가져다 주는 많은 습관과 태도 뒤에는 몇 세대를 내려오는 동기와 형태가 있어요. 죄는 단지 학대, 살인, 거짓과 같은 외적인 타락을 일으킬 뿐 아니라 성격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오랫동안 습관화된 자신의 죄의 반복성으로 인해 고통을 경험하는 거예요. 그래서 집안의 역사와 나라의 역사를 정직하게 대면할 때 나를 알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가 있는 거예요.
요시야 — 율법책 발견 사건 (열왕기하 22장 13절/ 역대하 34장 21절)
"우리 열조가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진노가 크도다"
에스라 — 통혼 죄에 대한 중보 기도 (에스라 9장 7절)
"우리 조상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의 죄가 심하매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우리 왕들과 제사장들을 … 여러 나라 왕들의 손에 넘기셨더니"
그렇게 제가 평생 우리 식구들 얘기를 하다 보니까 저는 늘 기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이걸 세속사로 들으면 식구 흉을 본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우리 시부모님은 가정적으로 어떤 부모도 따라갈 수 없이 훌륭하신 점들이 많아요. 친정 부모님은 도리어 직무유기를 한 것이 많기 때문에 상처를 줬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오직 구원 때문에 초점을 맞춰서 오다 보니까 신실하신 하나님이 제 오픈을 책임지셔서 여기까지 오게 하셨어요. 해아래 별 인생 없는 인생을 위한 약재료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내게 대물림된 죄를 인정하는 건 이건 부모를 욕하는 게 아니고요. 우리도 부모님도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잖아요. 예수님 만나야 하잖아요. 이것이 진짜 부모 공경이고 형제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봐야 할 건 "저 암논 나쁜 놈"이 아니에요. 남편, 아내, 자녀, 부모를 향해 "암논 같다"고 할 게 아니고요. 이 암논이 바로 나라는 걸 봐야 돼요. 우리가 열등감, 피해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다. 내가 그 자리에 가면 똑같이 그렇게 한다. 내게 대물림된 죄의 삯이 무엇인지, 암논처럼 비뚤어진 나의 사랑이, 나의 연애가 무엇인지 봐야 합니다. 내가 다윗이고 요나답이고 암논이고 다말이라는 걸 늘 생각해봐야 합니다.
적용 질문이에요.
내가 병이 날 정도로 갖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핑계 대지만, 사실은 내가 스스로 붙들고 키우는 죄는 무엇입니까?
내가 욕하면서도 그대로 닮아 가는 부모의 모습 중에 다윗의 편애, 암논의 열등감으로 인한 충동, 요나답의 간교함 중에 무엇이 있어요?
오늘 장로님도 간증하셨지만 정말 여러분들은 사람을 이해해야 돼요. 남자들을 이해해야 돼요. 오늘 남자들을 좀 이해하려고... 한 목사님이 있어요.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났고 엘리트 사역자로 가장 뛰어난 신학 교육을 받은 분인데 이분의 세계가 완전히 뒤집어지는 일이 일어났는데, 이 목회자 세미나 중에 외도가 알려진 거예요. 20년 봉사해왔던 사역지로부터 곧바로 해고되었고 마침내 이혼을 당하고 가족을 잃어버리는 광야 시대가 시작이 되었어요. 이분은 패트릭 민즈 목사님이시고, 제가 구속사는 왜 그랬을까, 항상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으라고 했잖아요. 패트릭 목사가 이혼을 당한 후에 말하고 싶지 않은 아버지에 대해서 직면하게 되었어요. 아버지는 어려서 15살 되기 전부터 막노동으로 일생을 살았어요. 카우보이, 트럭 운전, 목장주 등 남자 중의 남자였던 아버지에게서 책을 좋아하던 그는 아버지에게서 전혀 인정을 못 받고 자랐어요. 그래서 그런 상처로 인해 아버지는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배운 것 없는 그 아버지의 인정을 그리도 원한 거예요. 아버지는 그가 목사가 되어서도 30년 넘게 그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오직 육체적으로 강한 것만 인정하셨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준 상처를 성인 시절까지 가지고 왔고, 그것을 대신하기 위해 감정적으로 허약한 여자들에게 끌려 그들을 보호해주고자 하는 경향을 보였어요. 이렇게 아버지가 아들이 남자됨을 확증해주지 못할 때 그 아들은 건전하지 못한 방법으로 여자들에게서 자주 그런 확인/확증을 얻으려고 한다는 거예요. 사실 정답은 어느 여자도 그 남자들 안에 있는 아버지 형상의 빈자리를 채워주지는 못한다는 거예요. 여자에 대해 아무리 많은 관심을 가져도 그 한 남자의 상처 입은 남성성을 고칠 수는 없다는 거예요. 문제 있는 아버지는 학대하는 아버지, 부재중인 아버지, 비판적이거나 지배적인 아버지로 나눌 수 있다면, 암논의 아버지 다윗은 부재중 아버지고 무관심하고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였을 거예요. 그럼에도 남자들은 자기가 무관심한지 학대를 하는지 인생에서 커다란 타격을 입을 때까지는 그런 감정이 자기 안에 존재하는지도 알지 못해요. 여러분, 남자들의 재료가 먼지잖아요, 흙이잖아요. 그래서 그걸 깨닫지도 못한다는 거예요. 그 후회로 시작되는 부모의 상처를, 그러므로 이거 알아야 돼요. 자녀들에게 그대로 대물림하면 안 돼요. 옳고 그름의 이 땅에서 살 수 없는 부부들과 가정들이 이 하나님을 만나서 이 죄의 삯인 사랑을 직면해야 하는 거예요.
2. 끝을 보는 사랑입니다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랑)
연애하나, 이건 내 책임,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랑이에요. 대물림됐다고 핑계댈 수 없는 이유예요. 8절 9절에.
다말이 그 오라버니 암논의 집에 이르니 그가 누웠더라 다말이 밀가루를 가지고 반죽하여 그가 보는 데에서 과자를 만들고 그 과자를 굽고 그 냄비를 가져다 그 앞에 쏟아놓아도 암논이 먹기를 거절하고 암논이 이르되 모든 사람을 내게서 나가게 하라 하니 다 그를 떠나 나가니라
오라버니가 아프다니까 다말은 아무 의심 없이 가서 과자를 만듭니다. 그런데 암논은 뭘 하고 있습니까? 그가 보는 데에서, 지금 다말을 보고 있는 거예요. 암논의 정욕의 목표는 과자가 아니고 처음부터 다말을 노리고 있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다른 사람들을 다 내보내요. 여러분, 이게 죄의 본질이에요. 악은 빛을 미워해요. 사람을 다 내보내요. 공동체를 끊어요. 은밀한 방을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죄짓고 있는 사람들은 목장을 다 싫어해요. 이게 사단 역사를 하는 거예요. 이제 목장에 가서 내놓으면 이제 죄가 끊어질 거니까. 근데 요즘은 "모든 사람을 내게서 나가게 하라" 소리칠 필요도 없어요. 그냥 방문 닫고 스마트폰 켜면 돼요. 손바닥만 한 화면 안에 아무도 모르는 방이 열려있어요. 문빗장 지른 세계가 손 안에 있는 거예요. 이거는 음란만의 얘기가 아니죠. 중독적인 건 다 마찬가지예요. 존 브래드쇼는 중독을 두고 "외로움과 수치를 피하려고 무언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라고 했어요. 일 중독자는 일과, 알코올 중독자는 술과 연애하는 것처럼 산다는 거예요. 그러니 중독은 결국 연애하나...입니다. 사랑 같지만 나를, 아니 남을 사랑하지 못하고 혼자 잠근 방에서 더 깊어지는 죄예요. 치유되려면 빛으로 나와야 돼요. 말씀 앞으로 나오고 공동체 앞으로 나와야 돼요. 예수님 앞으로 나와야 해요.
자기 방 안에 다말과 단둘이 남은 암논이 어떻게 합니까? 그동안에는 압살롬의 누이라고 하더니 이 11절에 "나의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 합니다. 이 "나의 누이야"라는 말이 무서운 거예요. 아가서에서 신랑이 신부를 부르는 사랑의 언어거든요. 정욕은 가장 거룩한 말까지 훔쳐다가 자기 욕망의 포장지로 쓰는 거예요. 끝을 보려는 거예요. 12절, 13절 보면 이성을 잃은 오라버니를 말리며 다말은 애원합니다.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하지 못할 것이니 이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 말라 내가 이 수치를 지니고 어디로 가겠느냐 너도 이스라엘에서 어리석은 자 중의 하나가 되리라
어리석다는 말은요 머리가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리석음이에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만행을 저지르는 악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자기가 원하는 끝을 보려는 욕망이에요. 그래서 14절에서 암몬이 어떻게 합니까?
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그와 동침하니라
듣지 않는 게 얼마나 가장 큰 어리석음인지 몰라요. 지혜는 아이말도 듣는 마음이에요. 듣지 않으니 자기 힘만 의지합니다. 자기가 탐내는 것을 힘으로, 권세로, 학벌로 차지하려고 해요. 그리고 끔찍한 악을 저지르고 말아요. 이게 암논이 그렇게 마음을 태우고 계략을 짜고 연기까지 해서 보려 한 끝이에요. 그런데 한 끝이 더 남았어요. 더 충격적인 건데요. 15절입니다.
그리하고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마음이 전에 사랑하던 것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이건 사랑이 미움으로 변한 게 아니에요. 암논이 병 걸릴 정도로 품었던 그 연애의 실체가 드러난 거예요. 그건 상대를 향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를 향한 정욕이었던 거죠. 사람은 사랑을 만들 수도 지을 수도 없다. 그러니 바라는 끝을 보고 나니까 이제 더 심한 미움만 남는 거예요. 1절 개역한글 성경에 "연애하다"의 동사의 히브리어는 창세기 34장 3절에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연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연하며"와 같은 동사예요. 암논은 이 강렬한 사랑의 마음에 이끌려 마치 세겜이 디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충동적으로 그녀를 강제로 범했잖아요. 이방인 세겜은 비록 방법 면에서는 너무나도 잘못된 행동을 했지만 디나를 향한 그의 사랑의 마음만은 진실한 것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조상은요 이 불신자 이방인보다 못한 행동을 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이런 걸 보면 행위로 그래서 천국 갈 사람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계보가 이게 너무 중요한 거예요. 갖고 싶은 장난감 가지고 싶어서 난리를 치다가 일단 가지면 금세 싫증 내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암논만 그런 것이 아니고 악하고 음란한 우리들도 마찬가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가지고 싶은 충동을 사랑으로 착각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끝을 보는 사랑이에요. 듣지 않고 끝까지 가서 기어이 채우고 남는 건 싫증이고 미움뿐인 사랑이에요. 이 사랑은 삐뚤어진 사랑이에요. 정욕이고 탐욕이에요. 삐뚤어진 사랑은 늘 끝을 보려 해요. 그런데 참사랑은 끝을 남겨둬요.
우리들교회는 불신 결혼을 막고 결혼 전 순결을 외쳐요. 결혼 전의 성관계는 관계를 파괴해요. 결혼 안에서 이루어질 때만 그 관계를 아름답게 합니다. 같은 것 같지만 언제 하느냐가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우린 짐승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격적 존재이기 때문이에요. 연애하나, 끝을 남겨두지 않고 내 욕구대로 선을 넘어버리면 결국 더 심한 미움으로 끝나고 마는 거예요.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 질서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끝을 남겨두는 거예요. 그래야 "연애하나"가 아니라 "연애함으로"가 되어서 누리는 설렘도 있는 거고요, 훨씬 깊은 사랑을 하게 되고요, 참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대로 교제가 끝난다고 해도 훗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수가 있는 거예요. 젊은 날의 성욕을 참는 것은 극기의 길이고 십자가의 길이에요. 그걸 참을 수 있는 사람이 말로 결혼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에요. 결혼 전에 끝까지 가기를 거절했더니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하고 떠나는 사람은 떠나게 두세요. 그 사람이 바로 암논 같은 사람이에요. 인격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성품이에요. 어디까지, 언제까지 참을 수 있는가가 인격이고 영성이에요. 그래서 영적 진실성의 결론이 인내라고 하잖아요.
부모에게서 대물림되었지만 이 죄의 삯은, 그러나 또 내가 책임져야 되는 것이라고 했는데요. 자꾸 핑계대잖아요, 이게 죄인 거예요. 아버지가 이랬으니까. 이 세상에 이걸 벗어날 자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자꾸 핑계대고 합리화시키는 거예요.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당하는 어머니가 결혼 생활에서 힘든 비밀을 아들에게 말하고 나니 '엄마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꼼짝없이 기쁨조 역할을 하는 것이 의무가 되어서 성인이 되어서도 남자보다 여자와 주로 말을 하는 것이 편하고 여자에게 강력히 끌리고, 직장에서 주로 여자 동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니까 일대일로 만나면서 결혼 생활의 좌절에 관해서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육체적인 관계를 갖지 않으니 결백해, 잘못된 일이 아니야.' 그래서 오픈도 열왕기하 22장 힐기야와 훌다 공동체 같은 곳에서 하는 것이 너무 중요해요. 그렇지 않으면 서로 죄의식도 없이 이것이 결국 말하다가 연애로 발전이 되고 드러나고 이혼까지 가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 장로님도 그 회사에서 만났어도 상대방이 이제 힘든 결혼 생활에 대해서 얘기하니까 얘기해 주다가 그게 이제 여자로부터 인정을 찾는 도가 지나친 남자들은 이제 결혼과 함께 불가피한 갈등을 겪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신을 인정해주는 또 다른 여자를 찾게 되는 거예요. 그게 성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쉽게 감정의 교감을 이루게 돼요. 시간과 정력, 결혼 생활의 친밀성을 이제 고갈시켜 버리는 거예요.
우리에게는 핑계가 너무나 많아요. 다섯 명 중에 한 사람은 크리스천이 된 이후 다른 여자와 간섭을 하고 감정적인 교감을 가졌다고 이렇게 얘기를 했다는 거죠. 그게 데이터라는 거죠. 물론 남자만 그러겠어요? 여자도 마찬가지죠. 그러니까 여자들의 인정에 의존하기를 포기하는 과정은 알코올 중독자가 알코올을 포기하는 과정만큼이나 무척 힘들다고 해요. 성적인 문제로 씨름하는 모든 남자들이 여자들의 인정을 추구하는 건 아니에요. 인정을 추구하지 않아도 이렇게 보는 것에 또 중독된 사람도 많아요. 이 땅이 악하고 음란한데 데이터를 보면 하여튼 그렇게 이제 헌신된 사람 이런 사람 이렇게 말씀이 없으면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거죠. 남자들이 이러한 은밀한 싸움터인 일 중독, 물질 중독, 성도착증, 혼외 정사의 한복판에 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거예요.
패트릭 민즈 목사는 이혼 후에 아버지를 직면하고 여자 문제로 인한 행동에 새로운 표준을 설정했어요. "결코 여자와 단둘이서 상담하는 일을 하지 않을 거다. 여자들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일에 있어서 신중할 거다. 여자와 교감을 나누는 일에 보다 조심할 것이다." 그런 내적인 작업을 계속 진행했는데, 충분히 훈련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양파 껍질 같아서 벗기고 나니까 또 여자에게 장난기 어린 눈 맞춤을 하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이 재혼한 부인과 또 싸우고 거기에 또 양파 껍질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고 해요. 중요한 문제는 그의 남자상에 상처가 있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끊임없이 인정을 받고자 했고 그것이 늘 약한 여자에게 향했다는 거예요. 회개하고 새로워졌는데도 끊임없이 핑계대는 반복되는 죄가 있다는 거예요. "칼이 내 집에서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죠. 영원히, 영원히.
적용 질문이에요.
사람을 내보내고 혼자 잠가 둔 은밀한 방은 무엇입니까?
듣지 않고 내 힘으로 끊어 버린 말은 무엇입니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소유하고 통제하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내 사랑은 끝을 보는 사랑입니까, 끝을 남겨놓는 사랑입니까?
반복되는 죄에 끌려다니는 것은 무엇이에요?
저는 날마다 외도하고 이런 거가 이게 얼마나 그럴 수밖에 없는 걸 오늘 다 이해를 하셔야 된다는, 오늘 너무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라서 제가 오늘 전도대회 하면서 간증을 안 한 적은 처음이거든요. 이제 간증만 들을 게 아니라 여러분들이 분석을 해서 다 선생님이 돼가지고 이거를 다 살려내야 되는 거예요.
3. 회초리 맞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사랑)
하나님께로 나가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로 나가지 않은 고칠 자가 없어요. 여러분, 암논의 사랑은 채워지자 미움이 됐어요. 근데 정반대의 사랑이 있어요. 주님의 사랑이죠. 우리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어요. 끝을 보는 사랑이 아니라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 이것이 우리가 받아 누려야 하는 사랑인 거예요.
16절, 17절에.
다말이 그에게 이르되 옳지 아니하다 나를 쫓아보내는 이 큰 악은 아까 내게 행한 그 악보다 더하다 하되 암논이 그를 듣지 아니하고 그가 부리는 종을 불러 이르되 이 계집을 내게서 내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라 하니
자기를 범한 것도 모자라 쫓아내려는 암논에게 다말이 더 악하다 했어요. 범한 악보다 버린 악이 더 큰 거예요. 왜죠?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버릴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결혼을 지켜야 하는 거예요. 남편이 괴롭힌다고, 아내가 힘들게 한다고 버리는 거 더 악한 일이에요. 하지만 암논은 또 듣지 않아요. 귀가 꽉 막혔어요. 이젠 이름도 안 불러요. 누이도 아니에요. "이 계집"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 계집.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줄 것 같이 그러더니만 욕구가 채워지니까 물건 취급합니다. 이게 인간적 사랑의 실체예요.
여러분, 남자와 여자의 재질이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왠지 같은 남자가 욕을 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마세요. 욕을 먹어봤는데 정말 기분이 참담하더라고요. 근데 그걸 이렇게 듣다가 보니까 지금 제가 욕을 잘 먹어요. 욕 한 번 먹었다고 죽지 않고요, 때린다고 죽지도 않아요. 여자들의 재료는 뼈인, bone에서 났잖아요. bone에서 난 아무리 욕을 먹어도 욕을 하면 안 돼요. 본차이나는 욕하는 게 신분에 어울리지가 않아요. 본에서 난 사람은 듣기만 하면 돼요. 저 열등감 많아서 그러는 거를, 그 열등감을 그냥 이겨보겠다고 여러분들의 신분이 본에서 났는데 열등감을 이겨먹겠다고 그러시면 안 되는 거예요. 18절. 결국 다말은 어떻게 돼요?
암논의 하인이 그를 끌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니라
악은 그냥 행하는데 얼마나 신속한지 몰라요. 이걸 옳고 그름으로 맨날 "저 인간이 틀렸어" 뭐 어쩌고 이러지 말라는 거예요.
다말이 채색옷을 입었으니 출가하지 않은 공주는 이런 옷으로 단장하는 법이라 다말이 재를 자기의 머리에 덮어쓰고 그의 채색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가서 크게 울부짖으니라
다말이 암논의 집에서 쫓겨나죠. 그러니까 이혼을 당해서 쫓겨나는 거는, 그건 그때부터 내가 삶을 지키고 사명의 자리로 가야 하니까 쫓겨나는 거예요. 이건 마지막까지 가정을 지켜야 하지만, 그리고 암논은 문을 걸어 잠근 거예요. 정말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이러는, 또 남편들도 많아요.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그런데 다말은 재를 머리에 덮어쓰고 옷을 찢고 크게 울부짖었다고 해요. 이것은 그냥 슬퍼한 게 아니에요. 자기 잘못 때문에 수치를 당했다는 말이 아니에요. 이 사건의 죄는 암논의 죄예요. 그러나 다말은 그 수치를 숨기지 않고 하나님 앞에 들고 나아가는 거예요. 자기 몸으로 진실을 드러내요. 다 오픈한 거예요. 억울함만 붙들며 죽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회개의 자리로 간 거예요. 요시야가 말씀 앞에서 옷을 찢었잖아요. 오늘 다말도 채색옷을 찢습니다. 옷을 찢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지는 거예요. 이 신분의 표시인 채색옷을 찢고 자신이 처녀가 아닌 것을 온 곳에 금세 나타낸 것이죠. 인격과 명예가 더럽혀지는 수치를 당했다는 표시에 모든 사건을 오픈한 거예요. 그렇게 자신의 전적 무능을 고백하며 울부짖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길거리를 지나가는 거예요. 내 삶의 아픈 현장을 들고 가면서 지금 사명을 감당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다말의 울부짖음을 성경에 기록하셨어요. 그 모든 외침을 빼지 않고 다 기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말의 기도와 외침을 다 보고 듣고 아시고 통치하고 계셨어요. 그리고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잊지 않으셨다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암논은 잠가서 죽고 다말은 열어서 살았어요. 모든 걸 피해자는 다말이에요. 암논이 성폭행한 거잖아요. 그러나 회개한 것은 암논이 아니라 다말이에요. 믿음이 없는 사람은 어떤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아요. 그러나 어떤 상황에도 내가 회개하는 사람이 승리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재앙을 해석을 잘하면 평안이라고 그러잖아요. 해석을 못하면 죽을 때까지 열등감, 피해의식, 그거 아주 무서워요. "용서했다고" 그렇지만인지 생각해 보세요. 용서했다고, 무조건 지금 암논을 용서해도 그 사람 달라지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오픈하잖아요. 그러니까 암논을 뭐라고 욕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가 이 죄를 뒤집어쓰고 회개하는데, 그러니까 용서했다고 무조건 덮는 거와 이렇게 오픈하는 거, 경우에 따라서 다 달라요.
어떤 것이 진짜 용서하는 것인지 궁금하시죠. 한 여성이 청년 네 명에게 납치가 되어서 모텔에서 집단 성폭행을 당했어요. 그런데 그 여성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의 신분과 얼굴을 대중 앞에 당당히 공개하며 가해자들을 고소했어요. 그런데 이 가해자들은 권력을 이용해서 회유와 무서운 협박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1967년인데 그래서 경찰의 도움을 받아서 숨어 살아야 할 정도였고, 그 당시 통념으로 성폭행 피해 여성에게 낙인이 찍히던 시기였기 때문에 배우를 내려놨어요. 결국 네 명의 가해 청년들은 모두 사형을 당했어요. 그러니까 여성들의 보호에 분수령적인 사건이 되었는데요. 그들을 용서할 수도 있었어요, 그죠? 그러나 그들이 회개를 끝까지 안 했어요. 마지막까지. 그런데 막강한 그들을 신고하지 안 하면 그들은 그것을 빌미로 아마 이 여성을 평생 괴롭혔을 거라고 생각해요. "네가 한번 버린 몸 아니냐" 이러면서. 그러니까 이 돈과 명성을 내려놓고 앞으로 필리핀에서 그런 일이 또 있을 것임을 지금 온몸으로 막은 거잖아요. 다말같은 적용을 한 것이에요. 이 막강 권력에 대항한 사법부의 유명한 정의의 판결이라고 유명하더라고요. 이거는 불신자의 적용이었어요. 그러니까 자기가 모든 걸 내려놨잖아요.
다말도 다 내려놨잖아요. 그런데 다말의 적용은 이건 또 믿는 자의 적용이니까 오라버니의 일이니까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빠를 대신해서 회개했다는 거예요. 그러나 3천 년이 넘도록 성경에 기록된 영광이 된 거예요. 다말은 인생이 참 짧잖아요, 그죠? 한 뼘 같은 인생에 참 그 매기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억울함의 자리에 떨어진 사람이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요. 남의 죄가 억울함으로 죽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자기 인생을 다시 보게 돼요. 해석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깨닫습니다. 그리고 "내가 당한 이 고난보다 내 죄가 더 크다"고 죄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고백하는 거예요. 그 더 큰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미 다 덮으셨어요. 그러니 내 죄보다 작은 이 고난은 더는 나를 가두지 못해요. 그래서 일방적으로 당한 그 사건, 너무 억울한 그 사건이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가 되고, 하나님을 만나면 내 상처는 별이 되고 고난은 축복이자 약재료가 되는 거예요.
우리들교회도 큰 수치를 당하고 온 분들이 적지 않아요. 그러나 다 와서 자기가 회개를 하는 거예요. 왜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런 분들을 하나님이 얼마나 후대해 주시는지를 우리는 보고 있어요. 오히려 더 잘 살아요. 다 오픈하고 가는데 더 잘 살아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거예요. 저는 그냥 지금 우리들교회를 그냥 허허 불어 주신다는 생각이 너무 들어요. 사실은 암논도 일종의 피해자잖아요. 부재중 아버지, 편애하는 아버지에게 상처받은 사람이. 그런데 암논은 평생 피해만 부르짖었어요. 상처만 부르짖다가 거기서 끝났어요. 회개하지 않는 인생의 결말이에요. 이 사건은 범죄한 다윗 집을 치시는 하나님의 회초리예요. 버린 자식을 때리는 부모가 없어요. 아들이니까 때리는 거예요. 회초리가 너무 아프지만 그것이 언약 안에 있다는 증거예요. 다윗의 집은 이 엄청난 사건으로 사실상 무너졌어요. 무너진 거예요. 한 나라의 왕이 자기 딸 하나를 지키지 못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무너진 집을 버리지 않으셨어요. 바로 이 무너진 왕의 집을 통해 진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야 했어요. 넘어지는 왕의 집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 언약의 성취로 오신 예수님은 암논과 정반대세요. 암논은 힘이 세서 약한 동생을 짓밟았는데 예수님은 약함으로 자기를 내어주셨어요. 암논은 채워지자 사랑보다 더 큰 미움으로 돌변했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셨어요. 암논은 "이 계집"이라 부르며 버렸지만 예수님은 우리 이름을 부르시며 찾아오십니다. 암논은 문빗장을 질러 다말을 가뒀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성소 휘장을 찢으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여셨어요. 그러니까 그 여성도 진짜 휘장을 찢은 거하고, 예수님은 그 길을 여셨어요. 모든 여성들이 나아갈 수 있는 그 길을 열어놨어요. 그게 1967년의 일이니까 대단한 거 아니에요? 그 당시 청년들이 와서 그렇게 돌아가면서 폭행을 했는데 그걸 누가 그 여자를 구해줄 수가 있었겠어요. 그런데 모든 배우를 다 내려놓고, 불신자로서는 할 수 있는 최고의 적용을 사실 했다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여셨어요. 그때 그 막강한 가문을, 그 이길 사람은 그때 없어요. 필리핀 여자 중에서 아무도 없어요. 그러므로 오늘 연애하는 사람은요, 그 하나의 답은 예수님 안에 있어요. 사람의 문장은 연애하나 하고 사랑으로 시작해도 미움으로 끝나지만, 하나님의 문장은 거꾸로예요. 수치를 당하였으나 해도 결국 구원으로, 사랑으로 끝납니다.
오늘 여러분 삶에 많은 하나들이 있을 거예요. 사랑하나, 수고하나, 용서하나 등등 많은 하나들이 있어요. 우리 안에는 이런 기막힌 반전에 대한 답이 없어요. 오직 우리 삶의 답이 있어요. 삶을 구원으로 역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답이 있습니다. 우리 대신 모든 회초리를 맞아주신 예수님, 십자가를 대신 지신 예수님이 오늘 여러분을 불러주시는 거예요. 주님이 맞아주셨기에 우리가 나음을 받았어요.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어떤 억울함과 슬픔과 아픔도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구원이 됩니다. 자식을 봐도 부모를 봐도 말이 안 나온다고 "너는 왜 그러느냐"고 하지 말고, 여러분이 죄를 무릅쓰고 크게 부르짖으며 회개하세요. 죄를 모르는 사람에게 회개하기를 뭘 기대를 하겠어요. 우리는 내 죄만 회개하면 돼요. 이렇게 회개해도 죄의 반복된 고리에 다윗이 주인공으로 있는 것처럼 "영원히 칼이 내 집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의 고통을 다윗은 맛봐야 되니까, 우리는 예수를 믿었어도 슬프고 외로워요. 그래서 패트릭 목사님이 드디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더라. 그냥 계속 죄를 믿고 죄를 고백하는 것밖에 없더라." 이걸 누가 가르쳐줘요? 시편 139편에서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는 말씀에 이제 확신을 얻어서 "나의 남자다움을 완성하기 위해 여자들로부터 무언가를 얻으려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오직 주님에 의해 양파 껍질이 벗겨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 처음으로 자유함을 느끼게 되었대요.
남자들은 남자상에 있는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되는데요. 우리들 목장은 최고의 그 자리입니다. 그래서 목장 한 번만 오라고. 우리가 상처를 보여줘야 되는 거예요. 수술을 해야 되는 거예요. 보여주면 죄가 힘을 잃는 거예요. 그것도 날마다, 매 주일 고백해야 돼요. 앞으로 미치는 것 같아도 우리가 이렇게 뒤로 남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상처를 보여줘야 되는 거예요. 우리들교회 23주년, 너무나 많은 과정이 살아났어요. 패트릭 목사님은 철저한 회개와 깨어짐의 과정을 통과하며 《남자들의 은밀한 전쟁》이라는 책을 냈고요. 그리고 이제 거기서 교회에서 쫓겨났지만 자신의 수치스러운 실패와 회복 과정을 숨기지 않고 간증하며 자신과 비슷한 위기에 처한 전 세계의 목회자들과 남성들을 치유하고 그들의 삶을 회복시키는 사역에 평생을 헌신해서 아직도 살아계세요. 그러니까 이게 근데 그분은 그렇게 얘기를 했지만 이게 그런 공동체가 없잖아요. 고백할 공동체가 없잖아요. 그분은 그걸 만들어서 하신 것 같은데, 그냥 우리들교회 얘기를 대표적인 모델로 해주시는 것 같아서.
적용 질문이에요.
평생 내 죄인 줄 알고 숨겼던 수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내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기억하신다는 것이 믿어집니까?
회개하고또짓는 죄는 무엇이에요?
인간의 힘으로는요 이 죄의 반복된 고리를 끊을 자가 없어요. 오늘 장로님 간증을 통해서 그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우리가 들었잖아요. 그래서 오기를 싫어해요. 죄가 끊어지잖아요. 그러니까 사단이 무서워하는 거죠. "우리들교회 가자"는 걸. 그런데 우리가 어떤 외도를 막고 이런 거는, 남편이 "그래, 알아서 다시는 안 그럴게" 그래서 끊어지는 게 아니에요. 그 예배가 회복돼야 되는 거예요. 이해를 해야 되는 거예요.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를 이해를 해야 되죠. 바람 한 번 피었다고 이혼하는 게 결혼이 아니에요. 이 얘기를 제가 그냥 입이 없어서 이제 말을 못하는 건데.
연애하나. 그 연애는 죄 삯인 사랑인 거예요. 누구도 부모로부터 죄가 물려져서 끝을 보는 사랑, 이거는 그래서 내가 절 안 가지면 안 돼. 그냥 뭐든지 다 중독이 됐어요. 연애하는 게 세상이 아니에요. 세상에 너무 많아요. 여자만 연애하는 게 아니에요. 뭐 술도, 그냥 뭐 일도. 그래서 하나님 회초리 맞는 사랑으로 외도가 드러나고 부도가 드러나고, 이때 이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사랑인 거예요. 우리는 멀리멀리 갈 수밖에 없는데 날마다 이렇게 얼마나 슬픈지 몰라요. "내가 주님을 믿는데 왜 이렇게 주님을 믿는데 왜 죄에 이렇게 중독이 되어 있는가." 끊을 자가 없는 거예요. 우리는 너무 슬퍼요. 마음이 아파요. 쓸쓸해요. 그래서 우리가 찬양을 하면서 우리의 고백을 해보자. "예수만 믿으면 다다"가 아닌 거예요. 우리의 목장에 날마다 나와서 고백을 하는 것만이 길이에요. "예수만 믿으면 다다"가 아닌 거예요. 설교 한 번 들었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내 얘기를 고백을 해야 되는 거예요. 누구도 예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