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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7:1-10

명령하는 이 명령

김성우 목사조회 103

신명기 27:1-10

1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이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명령을 너희는 다 지킬지니라 2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3 요단을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가 들어가기를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하리라 4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5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6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7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8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할지니라 9 모세와 레위 제사장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아 잠잠하여 들으라 오늘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 10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

추석 잘 보내셨나요? 이혼 안 하셨죠? 참 이게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아내와 이렇게 추석 때는 안 싸우고 너무 잘 지내다가 오늘 아침에 싸우고 나왔습니다. 새벽에 설교하러 가야 되는데 또 "내가 옳다, 니가 틀렸다" 하며 싸운 게 참, 이 가정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설교를 전하는 저도 하라, 하지 마라, 지키라 이 말씀 앞에 참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싶으신가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나요? 제가 오늘 그 비결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인격적 관계가 있어야 하는데, 제가 예전에 교제할 때 데이트를 하면 밥을 먹으러 가야 되잖아요. "뭐 먹으러 갈까?" 보통 자매분들이 어떻게 얘기하죠? "네가 먹고 싶은 거 먹자."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그러면 뭐 김밥 먹으러 갈까?" "싫대요." "라면 먹으러 갈까?" "싫대요." "그러면 뭐 쌀국수를 먹으러 갈까?" "싫대요." 계속 얘기하고 "그러면 도대체 뭐 먹고 싶냐?" "네가 먹고 싶은 거 먹자"고. 그래서 정말 헤어졌습니다. 어떻게 헤어졌냐면 "오빠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그 뜻을 알기가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 마음을 헤아리기가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런데 그 이후에 교제한 사람이 딱 저희 아내예요. 10살 연상 누나를 만났는데 "뭐 먹으러 갈까?" 이렇게 제가 물으면 "남산에 갈치 그 집에 가자." 클리어하게 딱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너무 편했습니다. "뭐 먹으러 갈까?" 이러면 "남양주에 거기 쌀국수 집에 가자." 너무 편했어요. 그 뜻을 알기가 너무 편했는데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말해주니까 클리어하게.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행하려면, 하나님은 비비꼬아서 얘기하지 않으십니다. 정확하게 말씀해주세요. 하라, 하지 마라, 지키라. 이것을 행할 때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가 있는 거죠.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이 훈련을 받았습니다. "어디로 가야 됩니까"가 아니라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을 받았어요. 구름이 뜨면 출발하고, 가라앉으면 멈추고, 불기둥이 서면 진을 치고, 싸우라 하면 싸우고, 멈추라 하면 멈추고. 이스라엘은 이 훈련을 40년 동안 받았고 그리고 오늘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에 이제 명령을 하시죠.

그런데 오늘 명령을 들을 때 우리 마음이 어떻습니까? 명령을 들으면 처음에 거부감이 듭니다. "왜 나에게 명령하지?" 우리도 그러잖아요. "청소해라" 이렇게 명령을 들으면 청소하려고 했는데 그 말 들으면 딱 하기 싫어집니다. 명령을 들으면 거부감이 들어요. 왜냐하면 이 명령이 억압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사정을 모르니까 가정을 지키라고 말씀하셔" 뭐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명령을 누구에게 하나요? 말을 알아듣는 사람에게 하는 거예요. 길가에 지렁이, 기어 다니는 개미, 개구리에게 명령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한다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과 동등한 인격적 존재로 여기신다는 겁니다. C.S. 루이스는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명령은 인간을 통제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격적 존재로 대하는 방식이다"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선택하고 응답할 수 있는 인격적 존재로 바라보는 극진한 존중이 명령입니다. "너는 선택해라, 거절할 수도 있다, 순종할 수도 있다." 명령하는 이 명령을 내리시는 것이죠. 명령은 나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의지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향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굉장히 단순하게, 클리어하게 말씀하세요. 십계명 보세요. 유치부 아이들도 알 정도로 너무 간단하게 얘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제로 끌고 갈 수 있는 전능자이시지만 우리를 너무 사랑하고 존중하시기에 명령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자발적인 화평으로 우리를 초청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본문은 원문으로 보면 "그리고 명령하다"로 시작을 합니다. 한글은 모세로부터 시작하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바예짜브"(וַיְצַו, wayyəṣaw), 곧 "그리고 명령하다"로 시작하는데 이 명령하는 이 명령을 다시 명령하시는 것이죠. 그렇다면 명령하는 이 명령을 우리가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 하나님이 이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 또 명령을 하십니다.

첫째, 명령하는 이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는 기록해야 합니다.

2절에서 4절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2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3 요단을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가 들어가기를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하리라

4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바라고 바라던 요단을 건너게 되었어요. 광야 40년을 뺑뺑 돈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이 백성이 명령에 순종하나 안 하나를 훈련한 거예요. 40년이 끝나고 드디어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했던 그 약속의 땅으로 요단을 건너서 갑니다. 이 모압 평지와 요단 건너서 약속의 땅은 불과 하루도 안 걸리는 거리인데 드디어 건너가는 거예요. 건너갔을 때 뭘 해야 되나요? 거기에 여리고 성이 떡 버티고 있잖아요. 아이 성이 버티고 있잖아요. 수많은 민족들이 버티고 있잖아요. 자 이제 이 땅을 점령할 전략을 내가 알려줄게, 또 만나가 그쳤잖아요 먹고 살 방법을 내가 알려줄게, 어떻게 돈을 벌고 어떻게 영광을 돌리고 어떻게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갈지 알려줄게 라고 얘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첫 번째로 무엇을 명령하시냐면 내가 명령한 이것들을 기록하고 이 돌을 세우라는 명령을 제일 먼저 하세요.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 때, 이 땅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명령을 하십니다. 우리가 그 명령을 잘 들어야 돼요. 정말로 하나님이 가정을 주시고 기업을 주셨을 때 그 첫 발을 내딛었을 때 명령하는 이 명령을 지키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그 지키기 위해서 2절 3절에 뭐라고 하니까 내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제일 먼저 해야 될 게 뭐냐, 큰 돌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그리고 요단을 건넌 후에 이 율법 내가 지키라 하지 말라 하라 했던 이 명령의 모든 말씀을 먼저 그 위에 기록하라. 제일 먼저 명령하시는 게 기록하라입니다.

이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는 기록해야 되기 때문이에요. 기록이 너무 중요합니다. 우리는 기록하지 않으면 잊어버리는 존재예요. 이 명령 앞에 "오늘"이라는 단어가 붙어있습니다. 오늘 명령하는 이 명령을 우리는 기록해야 되죠. 아침에 눈을 뜨면 내게 주시는 그 본문 말씀에서 명령 찾고, 약속 찾고, 적용하고, 기록해야 되는 거예요.

담임 목사님 에스겔 24장 설교 너무 잘 아시죠? 에스겔 24장 18절에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말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으므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 아침에 받은 명령대로 내가 행했다. 에스겔 아내가 죽었는데 아침에 뭐라고 명령하냐면 너는 슬퍼하지 말라고 명령하세요. 이 사건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명령을 하시는 겁니다. 이것을 기록했기 때문에 담임 목사님이 이 말씀을 큐티하고 사부님께서 소천하셨을 때 이 은혜가 지금도 우리에게 흘러가는 것이에요. 왜요? 기록했기 때문에.

기록이 얼마나 중요하냐면 제가 이런 문제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1 더하기 1이 뭐죠? 바로 대답하시네요. 똑똑합니다. 그럼 23,424 더하기 94,587은 뭔가요? 누가 대답할 수 있나요? 11만 8,011입니다. 저는 어떻게 알았을까? 1 더하기 1은 2다, 이거는 단순하게 알 수 있는데 23,424 더하기 94,587 이거는 조금 생각을 해야 돼요.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알아요, 몰라요? 알아요. 언제 압니까? 쓸 때. 내가 기록하면 초등학생도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기록할 때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삶은 얼마나 복잡합니까? 인수분해, 미적분 뭐 이거 어마어마한 공식으로 우리의 삶이 꼬여 있고 관계, 관계, 관계 그걸 우리가 알 수 있을지 몰라요. 언제? 기록해야 되는 것이죠. 기록할 때 알 수 있습니다.

킨들린의 법칙이라는 법칙이 있는데 뭐냐면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반 이상 해결되었다라는 법칙이에요. 우리가 기록할 수 있는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록해야 돼요. 써서 큐티해야 됩니다. 오늘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너희에게 제일 먼저 말씀하시는 명령이 기록하라예요.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써서 큐티를 시작해야 됩니다. 그리고 설교를 기록해야 되죠. 이 문을 나서면 우리는 다 잊어버립니다. 기록해야 돼요. 잊어버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큰 돌을 세워서 누구나 볼 수 있게 기록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기록하지 않으려 해도 이미 기록되어 있는 존재예요. 우리의 기억에, 우리의 마음에, 우리의 세포에 지적설계로는 그렇게 얘기하죠. 거기에 뭔가가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DNA에, 우리의 삶에, 우리의 과거에 뭐가 기록되어 있죠? 우리의 상처, 아픔, 눈물, 슬픔, 수많은 기억들이 우리 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기록 때문에 하나님이 A라고 명령하는 것을 우리는 C라고 꼬아 듣기 때문이죠. 꼬아 들어요, 우리의 기록 때문에. 하나님 분명히 A라 명령했는데 "하나님, 뭐지?" 이러면서 C라고 알아들어요. 너무 단순하고 클리어한 명령임에도 불구하고 기록할 때 A라고 알아들을 수 있는 거예요.

카레나 킬코인이라는 작가가 있는데, 대단히 성공한 변호사인데 이분이 이런 책을 썼습니다. 《생각이 인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인생을 바꾼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카레나 킬코인은 어렸을 때부터 "너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 아무도 널 원하지 않아" 태어날 때부터 엄마가 이 카레나 킬코인을 버렸어요. 12살 때 아빠가 교도소에 끌려갔습니다. 끔찍한 가정폭력과 뼈아픈 이혼을 겪으면서 겉으로는 굉장히 화려한 스타 변호사가 되었는데 매일 밤 공황발작과 자기 혐오의 소리를 들으며 살아야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저자가 이 원인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깊이 파헤쳐 봤어요. 성공은 했지만 내가 이토록 비참한 인생을 살아야 했던 이유가 뭐냐면, 우리 뇌가 만들어낸 거짓 서사 때문이다. 이 거짓 서사가 뭐냐면 과거에 큰 상처나 트라우마가 생기면 우리 뇌는 다시 그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거짓 서사를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어떻게 작동하냐면 "너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 아무도 널 원하지 않을 거야"라는 허구의 이야기를 스스로 써내려가면서 관계를 아예 원천 차단시켜버리는 겁니다. 옛날에 그렇게 했던 기억이 지금에 있는 관계에 그대로 적용해서 아예 차단을 시켜버리는 거죠. 왜요? 상처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뇌가 거짓 서사를 써내려가는 겁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것을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이야기는 왜곡되어 있다라고 얘기를 해요. 뇌가 트라우마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겠다며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지어낸 거짓 서사이다. 이것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이 저자가 얘기합니다. 감정은 결코 진실이 아닙니다. 감정은 당신이 처한 상황도 아니고, 정말로 감정은 왜곡되어 있다. 단지 삶과 부딪히면서 만들어내는 하나의 표현일 뿐이다. 감정은 충분히 느끼고 놓아져야 된다고 얘기를 해요. 그래서 이 거짓 서사를 알아차리는 중요한 비결이 뭐냐면 기록하는 것입니다. 기록함으로써 이것이 내 상처에서 비롯되고 내가 꼬아들은 거구나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 저자는 얘기를 해요. 기록할 때 뭐죠? 감정은 싹 없어집니다. 그리고 팩트만 남는 거죠. 기록에는 감정이 없죠. 그리고 그것을 말씀을 빗대어서 묵상하고 이제 어떻게 합니까? 이 일에서 적용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저자는 "생각이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사람을 바꾼다." 우리들교회 말로는 뭐라고 하나요? 큐티의 꽃은 적용이다. 이 기록을 한 뒤에 뭘 하나요? 여기서 내가 적용해야 될 점을 클리어하게 알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명령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요단 강을 건넌 후에 큰 돌을 세우라고 했죠. 이 큰 돌에는 수많은 기록들이 있을 거예요. 바람이 불었던 기록, 물이 흘렀던 기록, 짐승이 핥혔던 기록. 그 수많은 기록들 위에 그대로 세우라 하지 않고 오늘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2절에 "큰 돌을 세우고" 뭐라고 말씀하시죠? "석회를 바르라"고 하는 거예요. 4절에 다시 한번 얘기합니다. "요단을 건너거든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 위에 세우고" 뭐라고 하시나요? "석회를 바르고 기록하라"는 거예요.

석회를 발라야 됩니다. 그 전에 기록들을 지워야 됩니다. 석회를 바르는 것은 새로운 글을 쓰기 위해서예요. 그 새로운 글이 어떻게 써지냐. 하나님의 명령을 내가 순종함으로 내 삶에 새로운 기록들이 써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 돌이 어떤 모습이든, 석회를 바르기 이전에는 어떤 기록이 있든 상관없이, 상처를 받았든 부유하든 뭐든 아무 상관없이 그냥 석회를 바르면 처음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석회를 바르면 그 표면이 깨끗해지죠. 그러니 이때는 이 석회 위에다 글을 쓰면 더 클리어하게, 멀리서도 볼 수 있게 분명하게 새겨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들이 볼 수 있도록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기록하라. 선명하게 새겨질 뿐만이 아니라 오래 보존이 되죠.

이 석회를 바른다는 것이 뭘까? 우리 언제 말씀이 잘 기록되나요? 고난받았을 때. 이 고난이라는 석회가 우리 안에 있는 트라우마 위에 착 발라졌을 때, 그때 고난당했을 때 한 말씀을 적용할 때 새로운 기록이 우리 삶에 써내려가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리고 내가 적용한 말씀은 너무 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예전에 치리를 받았을 때 다른 사람들은 치리 내용이 좀 동일한데 제 치리는 좀 독특했습니다. 뭐냐면 하나가 추가됐어요. 말금지가 추가됐습니다. 말금지. 그래서 담임 목사님께 "제가 말을 왜 못하냐, 말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간사로 시켜달라" 이렇게 메일을 쓰기도 하는 아주 정말 버릇없었던 목사인데 말금지 치리를 받았을 때 너무 이해가 안 됐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큐티를 하게 하시면서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말금지 치리를 당했더라고요. 제가 그 본문을 가지고 이 수요예배 휘문 앞에서 설교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이게 기억이 나죠. 아, 본문을 읽으니 이 말금지 치리가 나를 죽이고 나를 망하게 하고 나를 오해하고 벌주는 것이 아니라, 사가랴가 그의 실수로 믿음 없음으로 말금지를 당했지만 이 말금지를 당함으로 누가 태어났죠?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세례 요한이 태어나는 거예요. 아, 이것은 내 삶에 하나님의 복음이 태어나기 위해서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구나. 새로운 기록이 써내려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내 생각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을 읽으니까.

하나 더 예를 들면 저희 아내가 11년 동안 스파게티 가게를 했는데 열심히 잘됐어요. 그런데 이제 출발을 하는데 뒤에 트럭이 부딪힌 겁니다. 차가 거의 많이 이렇게 되고 아내는 병원에 입원을 하게 돼서 결국은 스파게티 가게를 폐업을 했는데, 이 폐업을 할 때 "아 내가 하나님 나를 망하게 했구나. 왜 하나님, 열심히 했는데, 내가 주일 성수도 하고 열심히 했는데 왜 망하게 하냐."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던 순간에 하나님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때 말씀이 뭐였냐면 열왕기상 19장 21절에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리 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고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 수종들었더라

그러니 이 사건이 해석되어지는 거죠. 어떻게 해석되어집니까. 가게를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이 가게에 있는 모든 것을 이제는 불살라서 다 나눠주고 엘리야를 따라가게 하는 사건이구나. 새로운 기록이 써져 내려가는 겁니다. 어렸을 때 받았던 상처, 아픔들로 그것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 서사가 아니라 새로운 기록들로 써내려가야 되는 것이죠. 그리고 아내는 목자가 되고 이제 마을이 되고 정말 엘리야를 따라서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저희 가게에 있던 면, 치즈, 의자 할 것 없이 전부 다 주변의 목장 식구들, 주변 가게에 다 나눠줬어요. 이 엘리사가 소를 잡아가지고 나눠준 것처럼.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31장 33절에 언약을 깨뜨린 백성에게 이같이 말씀하세요.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적용할 때 내가 행동할 때 이것이 기록된다는 것. 우리가 이 말씀의 반응에 적용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무엇입니까?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서 우리 마음에 새 영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석회를 발라주셨어요. 그리고 이 말씀, 이 명령을 지킬 수 있는 새 영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을 적용해서 우리의 삶에 기록할 수 있는 것이죠.

추석 때 부모님들을 다 뵙고 오셨지만 저도 어머니를 뵙죠. 어머니를 뵙고 추석 당일에 어머니와 큐티를 하는데 저희 어머니도 치매라는 석회가 발라져서 싹 잊어버리십니다. 어제 일도 기억을 못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뭐죠? 어머니를 뵙고 계속 이 말씀을 기록할 수 있게끔 들려드리는 거예요. 추석 때 본문이 뭐였나요? 다들 예배 들이셨죠? "하나님이 주시는 이 소산, 이 땅도 너희는 정말 그 아람에 떠돌아다니는 그런 족속이었는데 이 땅을 하나님이 은혜로 주셨으니 이 땅이 나오는 이 소산물로 옆에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라.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함께 이것을 즐거워해라." 새싹 큐티를 읽어드리고 어머니에게 또 물었습니다. "어머니, 아들이 이렇게 왔는데 하나님이 모든 걸 다 주셨대요. 하나님이 어머니에게 뭘 주셨나요?" 이러니까 어머니가 띵크를 하시는 거예요. "뭘 주셨나요?" 이러니까 대뜸 하시는 말이 "아무것도 안 줬는데." 이러시더라고요. 참 어렵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손을 잡고 산책을 하면서 "어머니, 제가 설교합니다. 아들이 설교하는데 너무 두렵고 떨립니다. 기도해 주세요." 이랬더니 어머니가 또 하시는 말이 "저기 앞에 고구마 밭이 있네." 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어머니가 어머니의 기록에는 시골에서 살았을 때 고구마 밭 풍경 이런 것이 더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죠. 그럼에도 어떻게 해야 됩니까? 계속 함께 기록하고 큐티하면서, 제 사명은 이 어머니가 치매에 걸렸지만 석회가 또 발라지고 또 발라졌지만 전해야 하는 것이죠. 기록해야 하는 것입니다.

적용 질문 드립니다.

  • 우리가 지난주에 들었던 말씀, 명령은 심플합니다. 하라, 하지 마라, 지키라. 나에게 주신 명령이 뭔지 나눠봤으면 좋겠어요. 하나님 뭘 도대체 하라고 하냐, 말라고 하냐, 지키라고 하냐?

  • 기록하며 써서 큐티하십니까, 듣기만 하십니까?

  • 평생 내 삶에 기록되어 있는, 석회를 발라도 지워지지 않는 강한 트라우마는 무엇입니까? 그 트라우마가 말씀으로 새롭게 해석되어집니까?

  • 적용해서 기억나는 말씀이 있습니까? 미루어뒀던 적용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오늘 이 말씀 가지고 또 한 주 적용했으면 좋겠습니다.

둘째, 명령하는 이 명령을 에발 산 위에 세워야 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예요. 이 명령을 그냥 세우라는 것도 아니죠. 에발 산 위에 세우라고 하십니다. 우리 4절에서 8절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4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5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6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7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8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할지니라

8절에 보니까 내가 명령하는 이 명령을 뭐라고 하죠?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을 하라고 하시죠. 석회를 발라서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정확하게 기록을 해야 됩니다. 우리의 간증, 우리의 아픔을 말씀으로 해석해서 누구나 알 수 있게. 정말로 우리의 간증이 담임 목사님 필리핀도 다녀오시고 또 아프리카, 또 남미, 유럽, 우리의 간증의 기록이 누구나 알 수 있는 거죠. 아, 하나님이 이 삶에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이다. 누구나 알 수 있게 우리는 기록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 기록한 돌을 어떻게 해야 되냐면 독특한 명령이 있어요. 4절에 보니까 이 돌들을 에발 산 위에 세우라라고 합니다. 에발 산 위에. 이 에발 산이 어디냐면 북쪽으로는 단, 남쪽으로는 브엘세바, 그 정중앙에 세겜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 세겜은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이 처음 돌단을 쌓은 곳이에요. 야곱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택하여 돌아간 곳이며, 여호수아 24장에 "나와 내 집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겠다" 여호수아가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백성들에게 이 언약을 다시 기록하고 전파한 곳이 이 세겜입니다.

그러면 왜 세겜을 말했냐. 이 세겜을 중심으로 양쪽에 뭐가 있냐면 에발 산과 그리심 산이 있어요. 이 세겜이 단과 브엘세바 정중앙에 있는 도시인데, 어느 누구도 한 번에 볼 수 있는 그런 곳입니다.

에발 산은 하나님이 신명기의 말씀에 저주의 산입니다. 그리심산은 축복의 산이에요. 딱 봐도 알겠죠. 민둥민둥한 에발, 나무가 있는 그리심. 여러분들은 어디 올라가고 싶습니까? 여기 있는 사람 100%가 다 그리심으로 올라갈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늘 에발 산 위에 올라가라고 하세요. 에발 산 위에 세우라고 합니다. 신명기 11장 29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그리고 이 에발 산 위에 오르라 하면서, 에발 산 위에 뭘 하라고 합니까? 석회를 바르고 기록한 이 돌을, 큰 돌을 세우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에발 산 위에 세우라고 명령하셨을까?

우리가 이것을 기록하고서는 깨달아야 돼요. 우리는 원래 태어날 때부터 에발 산 위에 서 있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기록할 때 내 죄가 보여야 돼요. "아, 내가 죄인이구나"가 깨달아져야 됩니다. 나는 그리심 산이 아니구나.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는 그리심 산에 올라가고 아내는 에발 산 위에 올라가서 손가락질하면서 정죄하죠. "야, 그거 너 틀렸어." 그게 아니라 네가 에발 산 위에 올라가라. 기록한 너가 에발 산 위에 올라가라고 하는 것이죠. "왜 바람을 펴? 왜 거짓말해? 왜 그걸 못 끊어?" 이런 사람은 아직도 그리심 산에 있는 것입니다. 지적하는 거예요. 겸손한 환경만 있지 겸손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 알아야 돼요. "아, 나도 그 환경에 처했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구나."

제가 오래전에 상담한 어떤 집사님이 계셨는데 어렸을 때 모르고 10대 때에 돈을 벌기 위해서 어떤 유흥에 이렇게 발을 디뎠다가 평생 팔려갔다고 저한테 울면서 이렇게 상담을 하신 분이 계시더라고요. 그 얘기를 들으면서 "왜 그랬어, 왜 그랬어"가 아니라 나도 그 환경이었으면, 먹고 살 것이 없어서, 나도 그런 환경이었으면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나도 그랬다. 이게 에발 산 위에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이 기록한 말씀을 너희가 명령을 지키고 해서 "아 하나님 저 이거 다 지켰습니다"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뭐죠? 아무리 명령하고, 아무리 기록하고, 아무리 쓰고, 아무리 목장에서 함께 가도 "아, 주님 저는 이 명령을 지킬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거예요. "아 내가 하나님이 명령 지켰어요. 이제 나에게 축복 주세요"가 아닙니다. 이것을 기록하고 에발 산 위에 기록하고 또 기록하고 또 결단해도 내가 내 옆에 있는 한 사람도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이구나. "내가 이 명령을 지켰어요" 해도 이 한 사람도 환대할 수 없는 죄인이구나. 이 에발 산 위에서 우리는 철저히 깨달아야 되는 것이죠.

오늘 적용할게요. 다짐하고 또 다짐해도 우리는 명령을 지킬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깨닫는 것이 나를 에발 산 위에 두는 거예요. 이렇게 설교를 해도 아침에 아내와 싸우고 오는 제가 에발 산 위에 서 있는 것이죠.

그런데 에발 산에 이 석회를 바른 이 기록만 있나요? 아니죠. 에발 산 위에 또 다른 것을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세우라고 하십니다. 뭐냐면 5절부터 7절이에요.

5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6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7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이 석회를 바른 큰 돌 옆에 뭘 하라고 하죠? 제단을 쌓으라고 합니다. 돌단이 하나 있어요. 이 돌단이 뭐냐, 제단,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제단이에요. "아 내가 이 명령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이구나. 아 내가 이 한 말씀조차도 하나님 앞에서 지킬 수 없구나." 십계명 1계명부터 걸리기 시작하는 것이죠. "아 내가 정말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길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을 너무 좋아하는 존재이군요." 그때 뭐가 보입니까? 이 큰 돌 옆에 뭐가 있죠? 번제단이 보이는 거예요. 이 내 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 번제물로 그 죄의 삯으로 죽임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보이는 것이죠.

번제가 뭡니까? 내 죄를 대신해서 짐승이, 제물이 온전히 하나님께 태워지는 것이죠. 그리고 그 죄의 값을 치르는 것이 번제입니다. 그런데 이 번제만 있는 게 아니에요. 번제만 해서 "네 죄의 값을 치러줬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화목제단이에요. 그냥 죄 없다가 아니라, 이 죄 없는 존재에서 "너는 내 아들이다" 화목제. 원수된 너와 내가 이제는 화목이 되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화목제단으로 정말 명령을 지킬 수 없는 이 백성을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아들로 딸로 삼아주시는 것이죠. 멸망받아 마땅한 사람이구나가 인정이 될 때, 이것이 내 공로가 아니라 내 옆에 놓여진 번제단과 화목제단이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에발 산 위에 서 있는 것, 그 출발조차 내가 죄인이구나. 그때 번제단과 화목제단이 보이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번제단, 원수된 나를 자녀로 삼아주신 화목제단.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화목제단 옆에서 먹고 마시래요. 오늘 말씀을 보니까 함께 먹으라고 합니다. 이게 뭐죠? 죄인들이 에발 산 위에서 함께 먹습니다. 목장 공동체죠.

그런데 이 번제단과 화목제단을 조금 유심히 살펴보면 6절에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이 단을 쌓고." 하나님께서는 이 6절 앞에도 나와 있죠. "연장을 쓰지 말고" 5절에 "연장을 대지 말고, 다듬지 않은 돌." 그러니까 이 번제단이 어떻게 세워졌나요? 매끄러운 돌, 잘난 돌, 아름다운 돌, 탁월한 돌이 아니라 옆에 굴러다니는 모난 돌, 정말 바람을 많이 피워가지고 바람을 많이 맞아서 뾰족한 돌, 알코올 중독에 절은 돌. 그걸 다듬지 말래요. 다듬지 말래요. 그 돌들이 이렇게 생긴 것과 저렇게 생긴 것이 연합이 되는 거죠. 다듬지 말래요. 그런데 이 다듬지 않은 돌을 원어로 살펴보면 "온전한 상태의 돌"이라고 표현이 되었습니다. 굉장히 의미가 달라지죠. 이 다듬지 않은 돌(אֲבָנִים שְׁלֵמוֹת, 'ăbānîm šəlēmôt)의 원어의 뜻이 뭐냐면 온전한 상태의 돌. 그러니까 "하나님 이거 좀 다듬어주세요" 했던 그 돌이 온전한 상태입니다. 내 구원을 이루기 위해 온전한 상태라는 겁니다. 홀로 있으면 깨진 돌, 버려진 돌, 쓸모없는 돌이지만 이것이 모이고 모이니까 뭐죠? 번제단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내 옆에 아내, 내 옆에 남편 정말 울퉁불퉁하고 못생기고 이런 돌이 왜 있냐. 정말 아내를 볼 때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아내가 밥을 너무 잘 사주는 거예요. 결혼했을 때도 밥을 너무 잘 사주는 거예요. 개념이 없어요. 개념이. 먹자 하면 그냥 무조건 먹죠. 생각도 안 하고 너무 잘 사주는 거예요. "아 이것 좀 다듬어줬으면 좋겠어" 했던 돌이 아니라 온전한 상태라는 겁니다. 이 돌들을 버려서도 안 돼요. 그냥 물리쳐서도 안 돼요. 이것이 모여야 됩니다. 결혼으로, 가정으로, 공동체로, 목장으로 모일 때 이것이 뭐가 된다? 온전한 돌, 번제단이 되는 것이죠.

파스칼은 인간이 끊임없이 자신을 장식하고 포장하는 이유를 "자기 비참함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라 말합니다. 그래서 종교에서조차 자기를 포장하고 치장하고 다듬으려고 해요. 그런데 하나님 "그거 아니다, 온전한 상태로 너희는 나아와라." 이 돌들로 내가 번제단을 쌓고, 이 번제단 옆에는 뭐가 있나요? 기록된 말씀이 있죠. 내 죄인됨을 깨달을 때 이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그 번제단에 오신다는 것이죠.

적용질문 드립니다.

  • 내가 저주받은 에발 산 위에 서 있는 존재임이 인정이 되십니까?

  • 내 옆에 돌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버리고 싶지는 않나요? 내 옆에 있는 돌이 온전한 모습입니까, 아픈 모습입니까?

  • 공동체 앞에서 내가 이렇게 다듬어가지고 예쁜 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모습은 무엇입니까? 아직도 드러내지 못한 내 모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그 모습 그대로 나오라고 하세요. 그리고 그 돌들이 쌓여서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잠잠하여 들어야 합니다.

9절과 10절 제가 읽겠습니다.

9 모세와 레위 제사장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아 잠잠하여 들으라 오늘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

10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

기록하라, 이 기록한 것을 에발 산 위에 세우라. 이렇게 명령하신 마지막으로 이제 10절 오늘 본문 마지막에 "잠잠하여 들으라"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잠잠하라"라는 이 단어는 원어로 신구약 전체에 딱 한 번 쓰인 아주 희귀한 단어입니다. 한 번 쓰인 이런 단어를 하팍스 레고메논(ἅπαξ λεγόμενον, hapax legomenon)이라고 하는데 이 "잠잠하여"(הַסְכֵּת, haskēt)의 뜻이 뭐냐면 우리는 뭐 "잠잠하라,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고, 조용히 하라, 침묵하라" 이런 많은 뜻이 있는데, 여기에서 잠잠하여는 "듣기 위해 잠잠하라"이런 뜻입니다. 그냥 조용하라가 아니라 목적이 있는 것이죠. 듣기 위하여. 듣기 위해 조용히 해라. 그러니까 뭘 해야 되냐면 우리가 명령하는 이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는 듣기 위해 잠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전에 유치부를 담당한 적이 있어요. 저기 휘문 유치부가 유화부를 담당하는 4세, 5세 반입니다. 아침에 이렇게 가면 아이들이 와 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엄마가 그냥 버리고 가요. 문 앞에 혼자 가방 메고 있어요. 제가 가서 문을 열어주면 신나게 뛰어서 들어갑니다. 들어가서 제일 인기 있었던 게 자동차였는데, 애들이 서로 타려고 싸우고 뭐 이제 장난감 들고 뭐 하여튼 뒤에 장난감 쌓은 곳에서 다 어지러워하는데, 예배가 딱 시작할 때 이 아이들이 잠잠합니다. 어떻게 잠잠하냐면 "야 조용히 해, 들어" 이렇게가 아니라 노래를 불러요. "모두 제자리, 모두 제자리, 모두 모두 제자리." 이 노래를 부르면 애들이 장난감을 놓기 시작합니다. 자기 자리로 찾아가요. 잠잠하여 듣는 것이죠.

우리는 잠잠하여 듣기 위해서 내 자리로 가야 됩니다. 아내는 아내의 자리, 남편은 남편의 자리, 학생은 학생의 자리. 모두 제자리, 모두 제자리. 참 이 찬양을 부르면 가끔 눈물이 나요. 저희 어머니는 이제 자리를 버리고 가시고, 아버지도 아버지의 자리를 버리고 가시고. 그래서 제가 들리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 거짓 서사에 오랫동안 매여 있어서 이것이 꼬여 있으니.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는 "듣기 위해서 잠잠하여 제자리 찾아가라. 모두 제자리." 우리 수많은 상처 이런 것들을 기록하면서 그 위에 석회를 발라주시고 들으라 얘기하시는 것이죠.

잠잠해지니 하나님께서 명령하십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듣는 자리, 조용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Quiet time이면서 Question time인 것이죠. 담임 목사님들 얘기합니다. 우리가 잠잠하지 못하는 이유는 불안하기 때문이에요. 불안한 내가 불안한 너를 만나 함께 불안해지는 거죠. 홀로 있어야 됩니다. 홀로 있는 잠잠한 시간, 고독하는 시간. 우리는 고독을 견디지 못해서 불행한 관계로 들어가죠. 그리고 타인의 시선이라는 감옥 속에 살아갑니다. 이 감옥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미움받을 용기와 잠잠히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이에요. 타인의 마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채지 못해서 불행해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잠잠할 수 있는 시간 가운데 내 마음에 어떤 움직임이 있는지를 살피지 않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불행해집니다.

잠잠하라는 명령 앞에 우리는 들어야 돼요. 그런데 하나님 뭐라 말씀하시나요? "잠잠하여 들으라" 하시면서 9절에 뭐라고 합니까? "오늘 내가 내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다"라고 말씀을 하세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면 "네가 명령을 지켜서 내 백성이다"가 아니에요. 이 명령을 지켜서 네가 내 아들과 딸이 된 것도 아니에요. 잠잠하여 들어봐라. 내가 너를 이 명령을 지키지 못할 때부터 너를 불렀다. 네가 내 백성이 되었다. 그러니 뭡니까? 이 사랑에 감격해서 우리는 명령을 지키는 것. 이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는 우리의 손에 있는 것들을, 장난감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랑입니까? 정말로 번제단 위에서, 에발 산 위에 있는 나를 위해 죽으신 그 사랑. 그러니 명령해서 백성이 된 게 아닙니다. 이미 땅도 정복도 안 했어요. 그런데 먼저 말씀하세요. "잠잠하여 들어봐라. 이 말씀을 묵상해봐라. 너의 그 모습 그대로를 내가 사랑한다. 네가 내 백성이 되었다"라고 말씀을 하세요.

오늘 청년부 출신 부부 간증을 들었는데, 또 이 부부도 청년부 출신입니다. 이 남편이 어릴 때부터 너무 많은 부모로부터 폭력을 당하고 어머니의 가출, 폭력 이렇게 당하니까 결혼을 해서 내가 정말로 보고 배웠던 것이 있어서 내가 내 뜻대로 부릴 수 있는 아내를 맞아야겠다 그래서 담임 목사님 말씀처럼 거짓으로 위장을 하고 이렇게 결혼을 한 거예요. 결혼을 하니까 옛날에 기록들이 다 올라와서 싸우는데 싸울 때 그냥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머리채를 잡고 안방에서 현관까지 끌고 가고 뺨을 때리고 이런 것들을 이렇게 했다고 해요. 그러니 아내는 어떻습니까? 얼마나 비참합니까? 정말로 이렇게 매를 맞고 뺨을 맞고 머리채를 끌고 가는 비인격적인 상황에서 자기도 정말 죽고 싶었던 것이죠. 죽고 싶고 이 결혼을 지켜야 되냐. 하나님의 명령 굉장히 심플하죠. 지키라. 이것이 창조인데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나를 몰라" 하면서 이걸 지켜야 되냐 말아야 되냐, 이것을 깨야 되냐 수없이 고민하는데 담임 목사님 말씀이 들려서 이 가정을 지키는데 어떤 말씀이 들렸냐면 자기 죄가 보였다고 해요. 자기 죄가. 목사님 말씀을 꾸준히 듣고 오다 보니까 아 내가 내 멋대로, 내 입맛대로 원했던 이 아내도 어렸을 때의 그 아버지에 대한 어마어마한 기록과 상처가 있으니까 이런 남자는 만나지 말아야겠다 해서 내 입맛에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이 남편을 만났다. 이제 자기는 선택했다고 했는데 매를 맞으면서 자기 죄가 깨달아진 것이 뭐냐면 아 내가 남편에게 복종의 언어를 쓰지 않고 정말로 내 마음대로 남편을 바꾸려 했구나. 이게 깨달아졌다고 합니다.

이혼을 해야 하나, 목숨을 끊어야 하나 이때 정말로 친정아버지와 다른 남편상, 거기에 맞춰 남편에게 잔소리했던 자기 죄가 보이고, 그리고 이 부부가 자녀가 없었는데 이때 또 말씀이 들린 거죠. 사무엘상 1장 10절에 큐티할 때 한나가 자녀가 없어서 통곡하는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아, 내가 내 자녀가 없어서 통곡했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없어서 통곡하는 그 한나의 기도처럼 내가 다른 사람의 자녀를 위해 통곡해야겠다." 이게 뭐죠? 적용이죠. 그 기록 위에 새로운 것을 다시 덮어입힌 것입니다. 그리고 적용한 것이 뭐냐면 중등부 교사로 섬기기 시작한 거예요.

그리고 이 남편은 막 이렇게 때리고 뭐 던지고 막 하는데 목장을 굉장히 무시했답니다. 뭐라고 무시했냐면 "비전문가 아줌마 아저씨 집단"이라고 했대요. 그러니까 이 돌들이 모여있는 거죠. "비전문가 아줌마 아저씨 집단"이라고 하면서 목장을 굉장히 무시했어요. 청년부 출신인데. 그런데 이 남편도 이제 직장 고난이 오고, 고난이 오니까 말씀이 들려서, 잘리고 이러니까 들리나 봐요. 그리고 목장의 처방대로 하니까 드디어 이 남편이 이제는 폭력을 그치게 되고 이 아내와 가정을 지키게 된 것이죠. 참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게 그냥 말씀대로 우리가 그 명령대로 또 이 목장에서 우리가 함께 내 죄인됨을 고백하며 나누며 그 명령을 지키다 보니까 하나님이 하나씩 둘씩 회복시켜주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게 우리 청년부 출신도 너무 대단해요. 도박 중독도 있고 이 폭력도 있는데 가정을 깨지 않고 이렇게 지키며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 우리의 인생이 다 똑같죠. 우리 상처가 똑같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석회를 발라드리고 새로운 명령으로 내가 매를 맞는 순간에 그 사건을 다르게 석회를 발라서 해석해 주시고 또 말씀해 주시면서 창조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이 창조는 언제 일어납니까? 내가 적용할 때. 이 석회에 내가 말씀 적용으로 기록할 때. 그래서 10절의 내용, 10절 오늘 보면 마지막에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

이 말이 뭐냐면 1절의 명령이 다시 한 번 반복되는 거예요. 명령하는 그 명령. 다시 한 번 명령해서 1절에 했던 이야기가 10절에 한 번 더 나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명령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절과 조금 다른 게 있어요. 1절에는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명령"이라고 하면 10절에는 "내게 명령하는 이 명령"이라고. 그러니까 너희에게, 설교를 들으면서 너희에게 하는 명령을 우리가 듣고 어떻게 해야 됩니까? 돌아가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죠. 너희에서 나에게로 가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이 명령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 명령하는 이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는 오늘 9절의 마지막에 "잠잠하라." 우리 이것을 들으라. 잠잠하여 듣는 이 시간이 있어야만 우리가 지킬 수 있는데 이 잠잠하여 듣는 그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는 내 백성이다. 너는 내 자녀다. 어길지언정 또 잘못할지언정 그것 때문에 너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 가는데 거기에 와라." 초청하는 것이 명령인 것이죠.

잠잠하여 우리는 들어야 됩니다. 그때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습니까? 듣는 그 순간, 내가 이것을 적용하지 못할지라도, 잠잠하여 듣는 그 순간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시고 새 영을 부어주십니다. 새 마음과 새 영을 부어주셔서 이 명령을 지킬 힘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성령으로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 뭐라 얘기합니까? "나를 믿는 자는 내 말을 지키는 자다" 말씀을 하세요.

적용질문 드립니다.

  • 이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것을 한다 만다 그 이전에 잠잠하여 듣는 시간이 있어야 됩니다. 듣기 위해 조용한 시간, 예배의 시간, 목장의 시간, 큐티의 시간을 우리는 확보해야 돼요.

  •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명령이 있습니까? 어기고 있는 명령은 뭡니까?

  • 잠잠하여 오늘 하시는 명령을 듣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듣는 조용한 시간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세요. 그런데 이 말씀을 우리가 꼬여있기 때문에 듣지 못하기 때문에 가장 명료한, 가장 기본적인, 클리어한 상태로 명령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세요. 그런데 누구나 알 수 있게끔 하나님이 명령하시는데 이것을 우리가 듣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꼬여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기록하라. 그리고 에발 산 위의 죄인임을 깨달아라. 그거 다 못한다면 그저 잠잠하여 잠잠한 시간을 가져라. 잠잠하여 좀 들어라. 네가 내 백성인 것을 좀 알아라." 아들이면 아들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그 창조로 우리를 초청하는 것이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실 거예요. 이 요단 강을 건너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이 요단 강에서부터가 시작이에요. 정말로 내 모든 죄성을 꺾고 이 명령을 지키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 함께 찬양하며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