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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3:15-23

연약한대로

김성우 목사조회 100

신명기 23:15-23

15 종이 그의 주인을 피하여 네게로 도망하거든 너는 그의 주인에게 돌려주지 말고 16 그가 네 성읍 중에서 원하는 곳을 택하는 대로 너와 함께 네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고 그를 압제하지 말지니라 17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남창이 있지 못할지니 18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19 네가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지니 곧 돈의 이자, 식물의 이자, 이자를 낼 만한 모든 것의 이자를 받지 말 것이라 20 타국인에게 네가 꾸어주면 이자를 받아도 되거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21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 22 네가 서원하지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리라 그러나 23 네 입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도록 유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

가을입니다. 여러분들 가을이면 뭐 하시나요? 저는 가을이면 설교를 합니다. 너무 행복합니다. 우리가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신명기 말씀이죠. 신명기 말씀을 우리가 쭉 큐티로 묵상하고 있는데 신명기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모세의 설교입니다. 오늘 본문 이후로 한두 달 뒤에 모세는 느보산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그래서 신명기는 모세의 고별 설교인 것이죠. 신명기 뜻이 뭐냐면 "거듭 말하다"라는 뜻입니다. 거듭 말할 신, 명령할 명, 기록할 기. 그럼 뭐죠? 다시 한번 말해줄게. 어떻게 보면 잔소리일 수도 있지만 다시 한번 말해주는 이유가 뭔가요? 우리가 자녀에게 다시 한번 말해주는 이유는 자녀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할 때 다시 말하죠. 이 사건을 너희가 해석하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이 출애굽 다음 세대에게 다시 다시 말해주는 겁니다.

그럼 출애굽 다음 세대가 왜 해석을 못할까 생각을 해보니까, 출애굽 다음 세대의 부모님들은 다 수치스럽더라고요. 우리가 다 읽었다시피 1세대들은 다 죽었어요. 어떻게 죽었죠? 광야에서 땅이 갈라져서 죽고, 뱀이 나와서 물려서 죽고, 우리 아버지는 이방 여인하고 음란을 행하다 죽임을 당하고, 모세에게 반란을 해서 죽임을 당하고. 모든 자녀들의 부모님들이 다 수치스럽게 죽었더라고요. 그럼 여호수아와 갈렙 두 명만 그 땅에 들어가는데, 여호수아의 자녀를 찾아보니까 여호수아의 자녀가 없더라고요. 여호수아는 자녀의 기록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 갈렙의 자녀들은 자랑스러웠을까요? 아니죠. 갈렙은 이방인 출신입니다. 자랑할 것 하나도 없는 이방 출신이었죠. 그러니 출애굽 2세대들은 아마 패배감과 수치와 열등감과 피해의식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 땅까지 우리가 왜 오게 되었는지 과거를 해석하지 못하는 상태였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더, 모세가 죽기 직전에 다시 한 번 더 설명해 주시는 겁니다. "내가 다시 말해줄게. 이 사건은 저주의 사건이 아니다. 너희를 향한 구원의 사건이다." 그들이 광야에서 죽고 또 죽고 또 죽었지만, 그 출애굽 1세대들이 광야를 돌고 돌아서 전진을 했잖아요. 하나님의 약속의 땅 앞까지 왔잖아요. 예수 그리스도 앞까지 우리를 인도해 주신 것이죠. 이것을 우리는 바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그 세월이 있었기 때문에, 그 광야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 약속의 땅 앞까지 오게 되었다. 그러니 너희는 이것을 들으라, 지키라.

제 삶 속에도 아버지께서 제가 고등학교 때 감옥에 가시고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그 사건이 해석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나요? "다시 얘기해 줄게. 이것은 저주가 아니다. 자, 잘 들어봐라. 다시 내가 설명해 줄게." 그게 신명기죠. 그래서 반복해서 들려줍니다. 언약한 대로 모세를 통해 전해주시는 하나님의 이 신명기 말씀은 결코 복잡하지 않습니다. 너무 명확하고 심플하죠. 뭔가요? 언약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라, 하지 마라, 지키라.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알 때 다시 내 삶이 해석되어지고, 신명기, 기록하다, 다시 내 삶이 쓰여지는 것이죠.

첫째, 하라 — 거주하게 하라

15절에서 16절 제가 읽겠습니다.

15 종이 그의 주인을 피하여 네게로 도망하거든 너는 그의 주인에게 돌려주지 말고

16 그가 네 성읍 중에서 원하는 곳을 택하는 대로 너와 함께 네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고 그를 압제하지 말지니라

뭘 하라고 하나요? 거주하게 하라. 누구를? 종을. 그런데 이 종이 어떤 종입니까? 15절에 보니까 그 주인을 피하여 내게로 도망한 종이라고 합니다. 이 15절에 쓰인 "도망하거든"의 히브리어 원어는 나찰(נָצַר, nāṣar)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단순히 그냥 도망가다라는 뜻이 아니라,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치명적인 위기와 죽음의 벼랑 끝에서 피하다,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그 위험에서 피하다, 스스로 구원하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 종은 아무도 자기를 구원해 줄 자가 없는 절박함 속에서 생존을 위해 도망쳐 온 것이죠.

돌아보면 저희 어머니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삶의 존재를 뿌리째 흔드는 그 끔찍한 폭력 앞에서, 한 사람의 삶을 속여서 송두리째 삼키는 폭력 앞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녀인 저도 가정도 버린 채 갑자기 하루아침에 떠나버리신 것이죠.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머니가 집을 떠났던 그 나이를 제가 지금 훌쩍 넘었거든요. 훌쩍 넘은 지금에서야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아, 어머니가 정말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떠나셨구나. 이 종도 그랬어요.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왜 도망쳤는지 이 종을 탓하지 않으세요. 어떻게 말씀하시죠? 도망간 사람에게 쉴 곳을 제공해주라, 마련해주라, 이것을 하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도망한 종이 누구에게로 피했습니까? 15절에 너에게로. 나에게 말씀을 받는다면 나에게로 피한 것이죠. 16절에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네 성읍 중에서 원하는 곳을 택하는 대로 너와 함께 네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고 그를 압제하지 말지니라

너와 함께 내 가운데 거주하게 하라. 무슨 말이죠? 너와 함께 네 옆에, 네가 그 피해온 사람의 쉴 곳을 제공해주라, 하라라고 하는 거죠.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나의 집, 나의 영토, 나의 공간에 찾아온 이방인, 타자에게 조건 없이 자리를 주고 이 이방인을 마주 대하라는 행위를 환대라고 합니다. 내 옆에 자리를 내어주고 그 이방인을 마주하는 것을 환대라고 해요. 그래서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죠.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종이든 죄인이든 환자든 바람을 폈든 도박을 해서 망했든 알코올 중독자든 기득권이나 조건에 얽매이지 말고 도망쳐 내게로 온 타자의 입장을 온전히 수용하라고 하는 것이죠. 이것이 "너와 함께 내 가운데 거주하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지만 이게 쉽나요? 어렵습니다. 내 삶을 망치고 내 앞길을 방해하고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그 사람에게 선뜻 자리를 내어준다는 것이. 알코올 중독으로 내 삶을 완전히 망쳐버린 저희 아버지에게 내 삶의 자리를 내어준다는 것이 쉽지 않죠. 자리를 내어주면 뭘 해야 되나요? 먹여줘야 되고, 내가 벌어온 돈으로 밥도 줘야 되고, 또 피땀 흘려 마련한 내 장소에서 그 사람의 장소를 제공해 줘야 되고. 환대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이게 부부 사이에도 어렵죠. 내가 돈 벌어왔는데 집에서 청소도 안 하고, 이렇게 친정과 시댁을 피해서 도망온 아내, 남편 마련해 주는 게 쉽지 않아요. 막 생색이 올라옵니다.

저 역시 그랬어요. 평생 제 삶에는 제 부모님의 자리가 없었어요. 내 인생에 부모님의 자리는 아예 머무를 곳이 없었습니다. 감옥 다녀오신 이후 아버지는 제 삶에 머무를 자가 아니라 없어져야 할 존재였어요. 그가 없어지지 않는다면 제가 없어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술만 마시면 짐승으로 변해서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그런 아버지의 폭력 앞에, 하루는 너무 참기 힘들어서 아버지 손에 칼을 쥐어드리고 저를 이렇게 찌르게 했어요. 근데 아버지가 마지막에 힘을 딱 줘서 이 칼이 비껴나가서 벽을 치기는 했지만, 그만큼 아버지가 원망스럽고 증오스러웠습니다.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하루아침에 고3 때 집에 오니까 어머니가 안 계신 거예요. 어머니가 가정을 떠나버리셨고, 저 역시 이런 가정이 너무 지긋지긋해서 이 땅에 제가 머무를 자리가 없는 겁니다. 전 세계를 떠돌아다녔어요. 정말로 아프리카, 중국, 미국, 아시아, 유럽 이렇게 막 떠돌아다녔는데 그곳에도 제가 머무를 한 평의 땅이 없었습니다. 저를 환대해주는 어느 장소도 어느 사람도 없었습니다. 정말 날 낳고 자란 알코올 중독자 노숙자로 사신 아버지, 외도한 어머니. 이 세상은 우리에게 한 평의 땅도 허락해 주지 않았습니다. 외도해서 잘 살 줄 알았는데 어머니 역시, 훗날에 어머니를 찾아갔더니 어머니 역시 그 가정에서 새아버지와 또 그 자녀들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살고 계시더라고요. 마음이 참 찢어졌어요. 환대해줄 아무 곳이 없었던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아니라 너희가 너희가 함께 거주하게 자리를 내어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명령하세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명령하실까? 바로 이스라엘이 원래 종이었기 때문이죠. 이스라엘이 원래 종이었기 때문에 종으로 도망쳐온 그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주라고 합니다. 그들 역시 애굽의 종이었습니다. 세상의 종이었어요. 신명기의 환대에 대한 명령은 단순한 도덕적 친절이 아니라 구원의 기억에서 터져나오는 은혜인 것이죠.

신명기 5장 1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기억하라. 내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신명기 15장 15절에 "너는 애굽 땅에서 종되었던 것과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16장 12절에 "너는 애굽에서 종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24장 18절에 "너는 애굽에서 종되었던 일과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24장 22절에 "너는 애굽 땅에서 종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원래 종되었던 것을 기억해야 된다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설교를 통하여 반복해서 말씀하시며 이렇게 "하라"라고 명령하십니다. 너희가 본래 애굽의 종, 세상의 종이었다. 죽음을 피해온 또 다른 종에게 자리를 내어주라는 것이죠. 내가 죄인된 것을 깨닫고 내가 종되었던 것을 깨닫는 자만이 나와 같은 죄인들에게 자리를 내어줄 수 있는 것이죠. 너희가 종이었지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이 성읍에 살지 않느냐. 이제는 너희가 하라, 명령하십니다.

우리는 이 애굽의 종 이전에 어디였습니까? 에덴동산에서 죄의 종으로 쫓겨났죠. 우리도 쫓겨난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쫓겨난 죄인된 우리의 신분을 죄인으로 취급하지 않으시고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그 아들의 십자가 아래에 우리를 받아들여 주신 것이죠. 십자가 아래에 그 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냥 손님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로, 딸로, 모든 기업을 상속받을 자신의 자녀로 우리를 환대한 것이죠.

에베소서 2장 12절 1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참 많이 머물 곳이 없어서 떠돌아다녔던 것 같습니다. 사업도 했었어요. "목회 안 하겠다" 이렇게 하고 사업을 했는데 1년 만에 완전히 망했습니다. 배신도 당하고 거짓말도 하고. 또 이런 말 하면 좀 민망하지만 외모가 되잖아요. 웃어주셔서 감사해요. 여자 좋아하고 음란하고 방탕하고 얼마나 많이 그 여자 옆에 내 자리가 있나 해서 기웃거리고 사랑의 아픔도 많이 겪으면서, 하늘이 맑고 바람이 차가우니 흘러간 옛사랑이 기억납니다. 이렇게 사랑의 아픔도 많이 겪으면서 십자가 앞에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달으니, 정말 나 같은 쓰레기 같은 인생을 하나님께서 환대하시며 "너는 내 아들이다" 안아주시니, 이 환대의 경험을 하니 어떻습니까? 비로소 제 삶을 짓눌렀던 감옥 다녀온 아버지와 살기 위해 집을 나간 어머니를 제 삶에, 나와 함께 내 옆에 거주할 자리를 마련해주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죠.

무엇입니까? 내가 죄인인 걸 깨달으니까, 내가 종인 것을 기억하니 다른 사람을 환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교회에 와서 바람나서 집을 나간 분들이 꽤 있으시더라고요. 그분들의 간증을 들으면서 어머니가 이해가 됐어요. 그분들의 간증을 들으면서 제가 어머니를 이해하고 어머니에게 제 자리를 내어줄 수 있었습니다. 감옥 다녀오신 분들도 많고 알코올 중독자인 목자님들도 너무 많더라고요. 그분들의 간증을 들으면서 제 옆에 자리를 마련해줄 수 있었습니다.

나의 수치와 아픔을 나누는 간증이 무엇입니까? 내 간증 속에 저 사람의 아픔이 머물 공간을 내어주는 것이죠. 이 간증을 통하여서 그 사람을 환대하는 것입니다. "너와 함께 내 가운데 거주하라"는 말은 너의 간증 속에 그 사람의 아픔이 함께 머물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내 수치와 아픔을 나눌 수 있습니까? 내가 종이었던 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내가 죄인이었을 때 먼저 우리 주님이 나를 환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타인이 나에게 찾아온다는 것은 내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세계가 깨어지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철학자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타인의 얼굴에 우리는 책임을 져야 한다. 타인이 나에게 왔을 때 그 존재에 나는 책임이 있다"라고 합니다. 타인이 나에게 찾아왔기에 내 중심적인 자아가 깨어지면서 지경이 넓어지는 것이죠.

배우자의 바람으로 눈물 흘리는 사람은 갈 곳이 없습니다. 가정에도 사회에도 심지어 교회에도 "어떻게 외도할 수 있어" 하며 매도하는 것이 이 세상이에요. 그런 사람에게 어떻습니까? "우리들교회는 나도 바람 피었다, 내 남편도 바람 피었다, 내 아내도 바람 피었다" 간증하며 나눠주는 것이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에요. 갈 곳이 없는 죽음밖에 없는 이 땅에서, 정말로 도망쳐 내게로 온 종에게 환란당하고 빚지고 원통한 우리들이 그 사람을 환대할 때 그 사람 역시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것이죠.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15절에 "도망하거든"의 히브리어 원어 나찰(נָצַר, nāṣar), 아까 말씀했듯이 이 나찰이라는 동사는 "도망하다"라는 뜻보다 "구원하다, 건져내다"라는 뜻이 더 많이 쓰인 단어입니다. 창세기 32장의 얍복강에서 야곱이 에서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그 순간에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라고 할 때 이 "건져내다"가 나찰이에요. 그리고 출애굽기 3장 11절에 애굽의 압제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내가 내려가서 내 백성을 건져내겠다, 구원하겠다"라고 하신 말씀이 이 나찰 동사가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15절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거죠. "종이 그의 주인을 피하여 구원을 위해 너에게로 갔거든." 즉 나의 구원을 위해서 나에게로 온 것입니다. 왜 하필 나에게 왔나? 나의 구원을 위해 온 것이죠. 내 옆에 거주하게 된 그 사람, 내가 자리를 내어준 것 같은데, 알고 보니까 나의 구원을 위해서 온 것이에요. 아들 준우가 나의 구원을 위해서 내게 온 것입니다. 다시 해석하는 것이죠. 거듭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게 신명기예요. "자, 너의 과거를 이제 내가 다시 읽어 내려갈 거야. 다시 해석해 줄 거야."

16절에 보니까 "그가 택하는 대로"라고 합니다. 내가 택한 게 아니에요. 종이 택했다고 합니다. 종이 그가 피한, 그가 나를 택하고 나의 성읍을 택하고 머물기를 택했어요. 왜요? 나의 구원을 위해서. 그가 온 것은 도망쳐온 것 같은데, 사실은 구원을 위해서 나에게 온 것이죠. 피해온 것 같은데 나를 택해서 건져내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가 나에게 오므로 뭐가 생각이 납니까? 나의 종됨이 생각이 납니다. 아, 나도 당신과 다를 바 없는 종이었습니다. 나도 죄인이었습니다. 나를 택하여 온 그를 통하여 내 죄가 보이고, 나의 종되었던 시절이 이제는 해석되기 시작하니까 다시 쓰여지기 시작하니까, 고등학교 때 바람나 집을 나간 어머니가 이제 치매가 걸려서 저에게 오신 거예요. 감옥 갔다 알코올 중독에 빠져 평생 노숙자처럼 살던 아버지가 온몸이 망가져서 모든 것을 다 잃고 저에게로 온 거예요. 근데 이게 왜 온 거다? 나의 구원을 위해서. 아버지가 왔을 때 아버지와 큐티하며 대화하며, 어머니가 오셨을 때 어머니와 큐티하며 대화하며, 나의 과거가 다시 해석되어지기 시작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 다시 설명해 줄게." 이게 신명기예요. 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내 성중에 함께 거하게 해주셨구나. 나를 건져내기 위해서 이 사람이 나에게 왔구나. 짐인 줄 알았는데 축복인 것이죠. 내가 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택해서 왔다고 해요.

나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내 목장에 내 가정에 온 사람을 내어쳐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람이 병자라고 압제하며 내어쳐서는 안 돼요. 자리를 내어줘야 합니다. "저 사람 아픈 사람이야"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주님이 죄인된 나를 환대해 주신 그 은혜를 깨달았다면, 나의 과거가 다시 쓰여지기 시작한다면, 이제는 그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줘야 되는 것이죠.

적용 질문

  • 내 옆에 자리를 내어주고 환대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 나의 구원을 위해 그가 온 것이 믿어지나요?

  • 그를 통해 세상의 종이었던 내 죄가 보이나요? 아니면 내게 온 그 사람의 죄만 보이고 있나요?

  • 내 옆에 자리를 내어줄 나의 간증은 무엇입니까?

  • 결혼으로 도망쳐 내게 온 배우자를 내어쫓지는 않나요?

둘째, 하지 마라 — 음란과 돈거래를 하지 마라

17절에서 20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17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남창이 있지 못할지니

18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19 네가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지니 곧 돈의 이자, 식물의 이자, 이자를 낼 만한 모든 것의 이자를 받지 말 것이라

20 타국인에게 네가 꾸어주면 이자를 받아도 되거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하라가 있다면 하지 마라가 있죠. 뭘 하지 마라고 합니까? 음란과 돈거래. 자리를 내어준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받아줘선 안 됩니다. 어떤 목자님은 정말 알코올 중독에 자신의 삶을 토로하는 그 사람을 받았어요. 자리를 내어주고 받았어요. 근데 그 목자님이 뭘 했냐면 그 사람이 술을 마시자 해서 같이 술을 마시면서 들어준 거예요. 하지만 음란과 돈거래는 받지 말아야 됩니다. 분명히 우리는 경계를 둬야 돼요. 특별히 경계를 두는 것이 음란과 돈입니다. 왜냐하면 이 음란과 돈은 관계를 깨뜨리기 때문이에요. 공동체를 깨뜨리기 때문입니다. 이 공동체를 통해서 구속사가 해석되어지고 다른 사람의 간증을 통해 우리가 예수를 만나는데, 이 공동체를 완전히 와해시키는 제일 치명적인 무기가 음란과 돈이에요.

17절에서 창기와 남창은 일반적인 성매매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에요. 히브리어 원어로 창기는 케데샤(קְדֵשָׁה), 그리고 남창은 카데시(קָדֵשׁ). 놀랍게도 이 단어들은 "거룩하다" 카다시(קָדוֹשׁ)라는 단어에서 유래됐어요. 너무 놀랍지 않나요? 제일 거룩과 먼 것 같은 창기와 남창이 거룩한 단어에서 유래된 것이죠. 그래서 이방 가나안 종교에서는 신전에서의 성적 행위를 벌이는 신전 창기들을 "거룩한 자"라는 뜻의 케데샤라고 부르며 포장한 것입니다. 자기의 욕망과 번영을 거룩한 척 모방을 하는 것, 이것이 음란이에요. 타인의 몸과 영혼을 숭배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욕망과 번영을 거룩한 척 모방을 하는 것. 이것은 가증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하나님을 위한, 신을 위한 거룩한 일이다" 포장을 하는 겁니다.

결국 거룩한 척 모방하며 욕망을 채우는 일이 창기와 같은 일이라고 말씀하세요. 어떻게 거룩한 척 모방을 하나요? 18절에 보니까 여호와의 전에 가져온다고 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기 위해서 이런 일들을 했어. 이것이 바로 음란이라는 거예요.

오래전에 한 분이 저에게 상담을 했습니다. 자기가 유부남과 바람을 폈는데, 그 유부남을 교회로 데려왔다고 해요. 그런데 교회에서 이제는 깨닫고 처방을 받고 완전히 관계를 정리했는데, 구원을 위해서 이 유부남을 데려와야 되지 않냐. "나 아니면 이 사람은 교회에 안 다닌다." 거룩을 위해 포장한 것입니다. 제가 처방을 했죠. "절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제가 왜 이렇게 단호하게 처방을 한 줄 아시나요? 제가 여전히 그랬거든요. 제가 이제 교제가 끝났는데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위한다면서 연락을 했습니다. "구원을 위해서, 내가 이 사람을 교회에 데려왔으니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게 뭐죠? 제가 바로 이 창기, 이 남창이었던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이 구원으로 포장되어 있는 모든 것들을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구원으로 포장하면 참 포장하기 쉽습니다. 심지어 자녀를 키우는 일, 헌금하는 것, 선교하는 것, 나의 욕망 뒤에, 심지어 목회하는 목회자도 나의 욕망 뒤에 이것을 구원으로 포장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뭐라고 하십니까?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는 것을 가증하게 여기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일로 역사하지 않으세요. 하나님은 그런 나의 어떠함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냥 애통하고 회개하며 기다리고 기도해야 되는 것이죠.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돈거래를 금하십니다. 19절에서 20절. 형제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 그리고 20절에는 타국인에게 이자를 받으라. 무슨 말인가요? 이자를 받지 말라. 형제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말합니다. 이 당시 돈을 빌리는 사람들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돈을 빌리는 게 아니었어요. 그때 당시 고대 근동에 돈을 빌리는 사람들은 다 생존과 직결되어 있었습니다. 정말 이 돈이 없으면 굶어 죽는 거예요. 그러니 그런 사람들, 그 형제들에게는 빌려줘라. 그런데 이자를 받지 말라. 왜? 이자를 받으면 이제 그 형제를 볼 때마다 이자 생각이 나는 거예요. 구원 생각이 나는 것이 아니라 돈 생각이 나는 거예요. "언제 갚을래? 이거 얼마 할래?" 이러면서 관계가 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네셰크(נֶשֶׁךְ)는 "물어 뜯다, 뱀이 물다"라는 뜻의 나샤크(נָשַׁךְ)에서 유래했어요. 그러니 그 형제에게 선한 목적으로 돈을 빌려줬는데 이자를 받으려면, 이게 뭐죠? 그 형제의 생명을 물어 뜯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물어 뜯으니 관계가 깨어집니다.

그런데 20절에 타국인에게는 빌려줘라. 이 타국인이 뭐냐? 그때 당시 타국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냐면 장사하기 위해 온 사람들입니다. 그때 당시에는 타국인은 장사하기 위해서나 아니면 용병들, 그러니까 먹고 사는 문제로 돈을 빌리는 사람들이 아닌 사업을 위해 빌리는 사람들에게는 이자를 받아도 된다고 하나님이 허용하셨습니다. 그런데 공동체 안에서는 뭡니까? 돈거래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담임 목사님의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금식하고, 죽으면 천국 가자." 정말 이 공동체를 깨뜨리는 모든 돈거래에는 우리는 오늘 이 말씀 앞에 "하지 말라"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적용 질문

  • 거룩으로 포장하며 내 욕심을 취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 있으면 먹고 없으면 금식하고 죽으면 천국 가시나요?

  • 형제를 통해 내 이익을 챙기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 언약대로 내가 하지 말아야 할 것, 이 음란과 돈거래 말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셋째, 지키라 — 서원을 지키라

마지막으로 지키라입니다. 뭘 지켜야 되냐? 21절에서 23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21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

22 네가 서원하지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리라 그러나

23 네 입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도록 유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

이 서원을 지키라고 합니다. 여러분들 어떤 서원을 하셨나요?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어떤 서원을 했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중학교 때 수련회 가서 하나님 앞에 번쩍 손을 들고 "선교사가 되겠습니다" 서원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서원을 지키게 해주셔서 정말로 사역자로 하나님이 저를 세워주신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이 서원이 성경에서 제일 먼저 어디에 쓰였을까? 누가 하나님께 서원했을까? 혹시 아시나요? 야곱이 한 거예요. 창세기 28장 20절에서 22절 제가 읽어보면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20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21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얼마 전에 신명기 14장에서 십일조 말씀이 나와서 우리 온 교육국 미취학부터 청소년부까지 이 십일조 말씀을 전했는데, 우리 아이들이 이 말씀을 딱 듣고 지난주에 어떤 친구가 고깃집에서 알바한 그 돈을 십일조로 낸 것을 저한테 이체해서 보여주더라고요. 이 십일조가 뭔지를 이제 깨달았다고 아이들이 나누기 시작하더라고요.

이 야곱의 서원. 그런데 이 서원이 야곱이 대단해서, 믿음이 좋아서 "내가 이 서원을 지킬 수 있습니다" 해서 한 서원이 아닙니다. 이 서원을 하기 전을 봐야 돼요. 야곱이 서원을 하기 전에 어떤 상황이었냐면, 야곱이 에서에게 사기치고 등쳐먹어서 에서가 자기를 죽이려고 하니까, 형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니까, 지팡이 하나 들고 도망가는 거예요. 도망가다가 갈 곳이 없어서 뭘 합니까? 돌베개 베고 잠을 잡니다. 돌베개 베고 잠을 자는데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세요.

창세기 28장 12절에 이 환상입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이걸 보고 나서 야곱이 서원을 한 겁니다. 그러니 뭐냐. 내가 하나님 앞에 서원하겠습니다, 내 힘으로 우리는 서원을 할 수가 없어요. 먼저 하나님이 하늘을 여시고 나에게 부어주셔야 서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8장 12절. 여기 보면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근데 뭐가 닿았나요?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이 번역을 또 다르게 번역할 수 있더라고요. 이 "땅 위에"가 전치사의 방향을 나타내는 용법으로 쓰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어떻게 쓰이냐면 "땅을 향하여 사닥다리가 놓여져 있다." 사다리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거예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데, 이 성경을 찬찬히 원문을 분석해 보면 "땅을 향하여" 그러니까 하늘에서 땅을 향하여 사닥다리가 놓여있다는 것이죠. 하늘에서 하나님이 먼저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먼저 이 야곱에게 사닥다리를 내려서,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야 그래야 우리가 서원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에요.

모든 종교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라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인본주의도 그렇고 불교도 그렇죠. 네가 부처가 돼야 된다, 네가 잘 돼야 된다, 네가 멋지게 인성이 좋아야 된다. 아니에요. 사기치고 등쳐먹고 도망가는 그 야곱, 그 야곱을 향하여서 하나님이 먼저 내려오셨어요. 먼저 찾아오셨어요. 그런데 어떻게 찾아오십니까? 하늘의 은혜가 땅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게 뭐죠? 큐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이 하나님의 말씀이 땅인 내 삶에 들어오는 거예요. 사닥다리를 통해서 들어올 때, 이 말씀이 내 삶에 들어올 때 우리는 뭘 할 수 있다? 서원을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서원을 합니다. 여기서 서원을 안 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무슨 서원을 하나요? 제가 어제 결혼식 주례를 했는데 하나님 앞에서 결혼 약속을 하죠. 이것이 우리의 가장 큰 서원입니다. 내가 이 아내를, 내가 이 남편을 내 한 몸으로, 이 존재를 내 삶 속에 하나가 되게 하나님 앞에서 약속을 합니다. 그런데 이 약속을 지킬 수가 있나요? 못 지키죠. 정말로 우리가 약속을 하고 서원을 했지만, 하늘로부터 하나님이 문을 열으셔서 이 말씀이 내 삶 속에 사닥다리를 타고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며 내 삶에 닿지 않는 한 우리는 이 서원을 지킬 수 없는 죄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에서 천사들이 와서 말씀을 물어주고 해석해주고 간증을 해야 우리는 비로소 지킬 수 있는 것이죠.

어떤 집사님의 간증입니다. 이 집사님이 32살에 조기 폐경이 되었다고 해요. 폐경이 되어서 이제는 자기가 결혼도 못하고 여자로서 정말 자존감도 상하고, 어릴 때 많은 상처가 있었는데. 그런데 코로나 때 어떤 형제가 눈에 확 들어온다는 겁니다. 마스크를 꼈는데 좀 잘생겨 보였다고 해요. 그런데 코로나가 끝나고 마스크를 벗으니 더 잘생겨 보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형제도 자기의 조기 폐경이 된 것을 이해해주고 결혼을 했다고 해요. 그런데 결혼을 했는데 혼인신고 7일 뒤에 이 형제가 뭘 했냐면, 결혼식에 왔던 모든 축하금과 결혼패물 이 모든 것을 다 팔아가지고 도박을 했다는 겁니다. 거기다가 친정 장인 다 돈을 끌어들이고 심지어 회사 돈까지 횡령을 해서 도박으로 다 날렸다는 거예요.

결혼을 지켜야 돼요? 말아야 돼요? 이 서원을 지킬 수 있나요? 못 지키죠. 못 지키죠. 어떻게 지켜요? 이제 결혼 막 했는데 못 지킵니다. 모든 것이 다 무너져내리고 자기가 모았던 모든 것들을 도박으로 탕진하는데 어떻게 이 결혼을 지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는 뭐가 있죠? 오르락내리락하는 천사들이 있잖아요. 목장에서 이 집사님을 불러가지고 우리 목자님이 자기도 이제 결혼을 깨려고 했다고 간증하고, 권찰님이 "나도 중독이었다"라고 간증하고. 그리고 이 목자님이 이 남자 집사님을 도박 병원에 입원시켰는데, 또 이 집사님이 정말 은혜를 받아서 그 병원에서 담임 목사님 저서를 전부 다 읽고 설교를 녹취하고. 그리고 우리들교회 도박 전문 목자님이 그 병원에 찾아가서 면회 시간마다 일대일 양육을 했다고 합니다.

이 남자 집사님이 왜 이 도박에 빠졌냐면 라스베이거스에서 유학을 갔다가 라스베이거스에서 한 번 크게 땄대요. 그 뒤부터 이 도박에 빠지기 시작했는데, 그 뒤에 자기 혼자 상담심리도 하고 공부도 하고 별의별 걸 다 해봤는데 이 도박이 끊어지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공동체에서 어떻습니까? 하늘에서 사닥다리가 내려와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목자님이, 권찰님이, 도박 중독 목자님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니 지금은 완전히 끊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깨질 수밖에 없는 이 가정이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먼저 부어주시는 은혜로 이 서원이 지켜진 것이죠. 이 가정이 지켜진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이 남자 집사님이 병원에서 퇴원을 하고 잘렸던 그 회사에서 다시 연락이 와서 다시 복직이 되었다고 해요.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이 집사님이 이렇게 가정을 지키려고 결단을 하니까, 이 아내 집사님이 조기 폐경이 되었는데 이것이 다시 생리가 시작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추석 다음 날 병원에 가서 임신을 위한 치료를 받는데, 그때 우리 온 교회가 좀 기도해 줬으면 좋겠어요. 이 가정을 지킨 이 가정에 정말 육적인 후사가 태어날 수 있도록 어떻게 기도를 하냐면 건강한 난포가 생성되어져서 정말 잘 임신이 될 수 있도록 이 집사님을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서원을 지킬 수가 없어요. 내가 서원을 지킬 수 없음을 고백하는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와 공동체를 붙들고 서원을 지켜나갈 수가 있습니다.

21절에 "내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여기에서 "갚다"라는 단어가 살람(שָׁלַם, šālam)입니다. 이 "갚다"라는 것은 어떤 돈을 지불하다, 이 뜻이 아니라 "완성하다, 완전한 상태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서원을 완수해서 어떻습니까? 결핍이 없는, 완전한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 살람의 같은 어근이 뭐냐면 화평, 샬롬(שָׁלוֹם, šālôm)입니다. 그래서 이 서원을 지킨다는 것, 이 가정을 지킨다는 것은 결핍 많은 내가 상처 많은 내가 어떻습니까? 하나님과의 샬롬으로 완전한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상태로 회복되어간다는 것. 결혼의 목적이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거룩이에요. 이 결혼을 통하여서 말도 안 되는 이 사람을 통해 내가 나의 결핍이 채워져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샬롬의 상태로 조금씩 조금씩 완성되어져간다. 이것이 뭐냐면 갚다예요. 그러니 결혼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께 갚는 겁니다. 결혼을 이행하고 있다는 거예요. 결혼 생활을 통해서 나의 결핍이 채워지고 하나님께 더 가까워진다는 것이죠. 이것이 샬롬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렇게 얘기하죠. "이혼한 사람은 어떻게 해요?" 이혼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아까 뭐라 했나요? 천사들처럼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자신의 간증으로 가정을 지키는 한 사람을 위해 사명을 감당해야 되는 것이죠.

이제 곧 추석입니다. 참 싸울 준비가 되셨죠? 결혼을 지키길 바랍니다. 추석이 끝나고 목장에서 우리가 싸우면서 오르락내리락하며, 하나님이 하늘에 창을 여시고 그 위에서 사닥다리를 땅 위에 걸치셔서 내려주시는 이 은혜로 우리가 이 결혼을 지킬 때, 이것이 뭐다? 하나님께 서원을 갚는 것이에요.

적용 질문

  • 나의 십일조 생활은 어떤가요?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있나요?

  • 하나님 앞에서 서원한 결혼을 지키기에 더디하나요? 목숨을 걸고 가정을 지키고 있나요?

  • 하나님께 갚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무척 심플해요. 하라, 말라, 지키라. 우리 힘으로는 할 수가 없죠. "하나님 제 힘으로는 이 서원을 지킬 힘이 없습니다." 십일조조차도 들고 와서 하나님과 돈이 싸워 겨루어 이겨서 하나님이 이길 때 드릴 수 있는 신앙 고백이 십일조에요. 이 돈 앞에서도 우리는 서원을 지킬 수 없는 연약한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공동체를 허락해주세요. 이 공동체를 통하여 "네가 종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이 자리를 내어주세요. 피할 곳 없는 나에게 자리를 내어주시고, 그 십자가 아래로 피했던 그 은혜에 감격하여, 먼저 하나님이 하늘에 문을 열어주시고 성령을 부어주셔야만 우리가 이 언약을 지킬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이제 우리가 바로 그 땅 앞에서 신명기를 지나 요단강을 건너 그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이 언약, 이 서원을 지키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