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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 23:36-24:7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

담임목사조회 383

열왕기 23:36-24:7

36 여호야김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스비다라 루마 브다야의 딸이더라 37 여호야김이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을 따라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1 여호야김 시대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오매 여호야김이 삼 년간 섬기다가 돌아서 그를 배반하였더니 2 여호와께서 그의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갈대아의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모압의 부대와 암몬 자손의 부대를 여호야김에게로 보내 유다를 쳐 멸하려 하시니 3 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을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 때문이며 4 또 그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의 피가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 5 여호야김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6 여호야김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7 애굽 왕이 다시는 그 나라에서 나오지 못하였으니 이는 바벨론 왕이 애굽 강에서부터 유브라데 강까지 애굽 왕에게 속한 땅을 다 점령하였음이더라

인생에서 제일 급했던 날 하나님께 약속하셨던 일이 있잖아요. 무슨 약속을 하셨나요? 수술실 문 앞에서, 시험 결과를 기다리면서, 부도 직전에, "하나님 살려만 주시면" 하며 한 그 약속, 지금 어디 있나요?

지난주에는 유다가 애굽의 손에 넘어가는 걸 봤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형편을 따라 섬기다가 돌아서는 왕과 함께 새로운 이름이 등장해요. 그 유명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에요. 열왕기가 끝날 때까지 이 이름이 계속 나옵니다. 오늘 제목이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예요. 이상하죠? 무엇을 즐겨하지 아니하신다는 걸까요? 오늘 본문에서 가장 무서운 문장이 바로 이 말로 끝납니다. 그 답을 찾아가며 오늘은 우리가 말씀을 버리고 애굽을 붙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본문을 통해 세 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돌아서서 배반합니다

36절 37절이에요.

36 여호야김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스비다라 루마 브다야의 딸이더라

37 여호야김이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을 따라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여호야김이 25세에 왕이 되어 11년을 다스립니다. 지난주에 봤죠. 애굽 왕 바로 느고가 왕으로 세우고 이름까지 여호야김으로 고쳐줬어요. 출발부터 애굽의 손에 붙들린 왕이에요. 그런데 성경의 판정은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을 따라서, 동생 여호아하스와 똑같이 악한 조상들의 길을 따라갔다고 했어요. 백성의 선택으로 세워진 동생이나 애굽 왕의 선택으로 세워진 형이나, 말씀 앞에 서지 않으면 가는 길은 다 똑같다는 거예요.

애굽 왕 바로 느고는 나라와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낄 줄 아는 사람은 안 세워요. 자기밖에 모르는 어리석은 여호야김을 왕좌에 앉혀놓고 자신의 꼭두각시로 전락시키고 있는 거예요. 독재자는 항상 어리석은 자를 세워요. 똑똑하면 자기 자리를 빼앗을까봐 그러는 거죠.

그렇게 애굽이 세운 여호야김에게 무슨 일이 생깁니까? 24장 1절이에요.

여호야김 시대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오매 여호야김이 삼 년간 섬기다가 돌아서 그를 배반하였더니

새 이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옵니다. 앗수르를 무너뜨리고 새 강국으로 떠오른 바벨론이 유다까지 온 거예요. 다니엘 1장에 의하면 이때 바벨론은 다니엘을 비롯한 유다의 왕족과 귀족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성전의 기구까지도 탈취해 갔다고 하죠. 이것이 그 유명한 제1차 바벨론 침공이에요. 바벨론이 너무 세서 온 세상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어요. 그러니 아무리 친애굽이라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항복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3년간 섬겼습니다.

그런데 요시야가 히스기야 때부터 바벨론에 잡혀간다는 예언을 들어서 알고 있잖아요. 말씀에 바벨론에 잡혀간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요시야 같은 성군도 그게 싫어요. 잡혀간다는 게 인정하기도 싫어요. 그러니까 바벨론과 앗수르 싸움에 앗수르를 돕겠다는 애굽을 막았잖아요. 결국 여호야김도 바벨론을 3년 섬기다가 돌아서 그를 배반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바벨론과 애굽의 싸움에서 애굽이 사력을 다해 잠시 소강 상태를 이뤄냈어요. 애굽이 이긴 게 아니고 그냥 지켜냈어요. 그러니까 이 어리석은 여호야김이 "애굽이 역시 달라!" 하면서 바벨론을 배반하고 다시 애굽 편에 딱 붙은 거예요. 이게 결정적인 패착인 거예요. 바벨론 왕이 대노했죠. 오죽하면 느부갓네살 왕이 직접 대군을 데리고 쳐들어왔겠어요.

유다는 근본적으로 신흥 강국 바벨론이 무시가 되는 거예요. 400년 노예를 했던 애굽에 대한 사대주의가 있는 거예요. 우리도 기독교가 안 들어왔으면 여전히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있었을 거예요. 우리 조선이 그렇게 조공을 바쳤잖아요. 피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끝까지 생각하는 거예요. 부도나면 외국 가고, 공부 못해도 외국 가고. 이런 길을 막아 놓아도 어떻게 해서든지 뚫어서 가려고 하면 나 때문에 그 길이 된 사람이 정말 망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23장 32절에 여호아하스의 죄로 바로 느고가 쓰이는 거고, 37절에 여호야김의 죄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쓰이는 거예요. 막힌 길을 찾아 뚫으려고 하니까 막혀가지고. 그런데 여호야김이 "돌아서다"는 말, 어디서 많이 들은 말 아닙니까? 슈브(שוב) 동사예요. 요시야를 두고도 슈브(שוב)를 썼어요. 이 돌이키다와 돌아서다가 똑같이 슈브(שוב) 동사인데, 방향이 달라요. 하나님께 돌이키면 회개지만 말씀에서 돌아서면 배반이에요. 중요한 것은 내가 무언가를 결단했다는 사실이 아니에요. 누구에게서 돌아서서 누구에게로 가고 있는가, 이 방향이 아주 중요한 거예요.

51대 49로 소속이 이쪽으로 바뀌었잖아요. 거룩의 여정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냥 그렇게 가다가 천국 가는 거잖아요. 우리가 완전치 못해요. 그러니까 요시야가 행위가 완전해서 "전에도 후에도 그런 왕이 없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가 하나님께로 돌이킨 방향이 세상 끝날까지 흔들림이 없었다는 거예요. 행위는 천국 갈 때까지 완전한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까 요시야도 그렇게 개혁을 하면서도 결정적인 패착인 애굽의 느고를 막아섰잖아요. 히스기야도 바벨론 사자에게 내탕고를 보여줘서 바벨론에 잡혀 간다. 행위를 보고 옳고 그름을 보고 매국노라고 하지 않는다. 국민을 생각해서 한 것이다. 생각을 거기까지밖에 하지 못한 것이다. 행위로 판단해서는안 된다. 관행을 좇아서 부인이 여러 명이네요. 케냐 목회자 세미나 가보니까 부인이 여러 명인 목사들이 막 은혜를 받으면서 참석하고 있더라고요. 그게 문화이다. 악의 평범성이 그래서 무서워요. 그 자녀들이 왕권을 노리고 시기 질투로 악을 행하기 쉽지 않았겠어요? 그래서 중요한 것은 행위가 아니고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체험하지 않으면 알 사람이 없다. 회개에 쓰라고 주신 돌이킴을 우리는 믿음의 분량대로 끝없이 배반해 갖다 쓰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호야김이 바벨론을 3년 동안 섬긴 것은 믿음의 순종이 아니에요. 힘이 무서워서 그런 거예요. 돌아설 때도 하나님께로 돌아온 게 아니에요. 애굽이 도와줄 것 같으니까 그쪽으로 돌아섰어요. 섬길 때도 계산하고 돌아설 때도 계산하고, 주인만 바뀌었지 말씀으로 돌아온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바벨론에서 애굽을 붙드는 순간 말씀에는 등을 돌린 거예요. 소속이 옮겨지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돌아서서 배반하는 건 여호야김에게만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 모두에게 있어요. 3년, 이게 우리 신앙의 주기 아닙니까? 눌릴 때는 섬겨요. 새벽마다 나오고 서원까지 해요. 그런데 형편이 풀리는 기미가 딱 보이면 돌아섭니다. 병이 나으니까 예배가 뒷전이 돼요. 문제가 해결되니까 큐티가 밀립니다. 그 사람, 남편과 아내가 돌아오니까 기도가 멎어요. 은혜는 그대로 있는데 내가 딱 돌아선 거예요. 금요일 큐티에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신명기 16장 12절에 "너는 애굽에서 종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늘 우리는 애굽에서 종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나를 건져주신 것을 기억하라는 거예요. 배반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는 게 아니에요. 건져주신 은혜를 잊는 자리에서 돌아섬이 시작되는 거예요. 구원의 기억을 잃으면 우리는 구원받은 자리에서도 다시 애굽을 찾아요.

하나님이 애굽에서 건져내주셨는데 조금 먹고 살만하니까 "애굽이 나를 살려줄 구원자였냐?" 하면서 다시 붙들어요. 애굽은 장소만이 아니에요. 하나님 없이도 나를 살릴 수 있다고 믿는 돈과 사람과 권력이 다 나의 애굽인 거예요. 이번 주 나눔에 어떤 목사님의 주례사에서 "황씨는 김씨를 만나야 한다. 그래야 황금이 된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 기억에 남는다, 이런 나눔이 있었어요. 맞아요. 우리는 돈 좋아하죠.

힘든 애굽 친정에서 탈출하려고 더 강해 보이는 바벨론 시댁으로 시집을 갔는데 가보니까 더 힘든 사로잡힘이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도 내 몸에 오랫동안 익은 게 있는 거예요. 익은 게 있어서 환상을 가지고 다시 의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시기마다 익숙한 육의 애굽이 있고 훈련받아야 하는 영적인 바벨론이 있더라고요. 내가 학창 시절이 너무 힘들었잖아요. 힘들었는데도 그 덕수궁 돌담길을 가면 너무나 그냥 막 향수에 젖는 거예요. 내가 너무 힘들었는데 또 대학교 가봐도 내가 고학을 했는데 그냥 괜히 과거는 자꾸 환상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혼하고 나서도, 남편이 가고 나서도, 아무리 무시를 당했어도 남편 가고 없으니 누군가 나를 무시하려고 하면 "그래도 내 결혼 생활은 도우미와 기사가 있었다" 이러면서 애굽의 삶이 그립고. 게다가 과부라고 무시하면 "내 남편은 원장이었다. 나밖에 몰랐다. 사랑해줬다" 이러면서. 그러니까 우리는 무시당해도 종되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고기만 기억이 나는 거예요.

저는 일생에 제가 결혼하면서 가장 감사한 것이 친정이 망했다는 거예요. 안 그랬으면 저는 100% 이혼했을 거예요. 제가 코앞에 서울예고가 있는데 내가 걸레질 하면서 살아야 되겠어요. 거기 나갈 수 있는데 있을 수가 없는 일이죠. 우리 친정이 그냥 쫄딱 망해가지고. 그러니까 오늘 종되었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규례를 지키라고 그러잖아요. 규례. 원칙.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원칙과 규례를 지키라는 거예요. 지키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자랑을 못한다. 그런데 우리는 규례를 모르니깐 늘 옳고 그름으로 판단한다. 늘 배반을 한다.

마약을 끊어서 건져내 주었는데 조금 힘들어지면 다시 그것이 구원자인 양 붙드는 사람이 많다는 거예요. 한 번도 안 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한 사람은 없다고 하죠. 알코올 중독도 끊기가 너무 어렵지만 그보다 천 배 어려운 것이 동성애이고, 그보다 천 배 어려운 것이 마약이라는 얘기를 한 의사 선생님한테 들었어요. 그러니까 웬만한 믿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 동성애고 마약이에요. 우리들교회에도 동성애와 마약의 청년이 때마다 고백하면서 너무 힘들어하는 걸 보고 있어요. 우리들교회 청년들은 이게 죄라는 것을 안다. 중학교 때도 커밍아웃, 고등학교도 커밍아웃, 대학교도 커밍아웃, 직장에서도 커밍아웃. 그래도 이게 힘들다는 거예요. 그런데 권세가 있으면 믿음과 상관없이 "난 하고 싶은 거 하고 죽겠다." 그게 그들의 지론이에요. 옛날에 우리가 가난할 때는 이런 거 없어요. 동성애자 없어요. 마약도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은 돌이키실 수가 있다는 거예요.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 식구가 우리 집에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 식구가 우리의 바벨론이죠. 순종하기 너무 어렵죠. 그러나 그 사람에게 순종하다 보면 세상은 상상할 수 없는, 창조주가 말을 걸어주시는 엄청난 축복을 주시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냥 "내가 기도했으면 마약이 끊어지고 동성애가 끊어지고" 이것밖에 모르는 거예요. 이거를 조두라고 불러요. 세 조, 머리 두.

적용 질문이에요.

  • 형편이 어려울 때 하나님께 드렸지만, 형편이 풀린 뒤 잊거나 미루고 있는 약속은 무엇입니까?

  • 요즘 내가 죽어라고 말씀보다 더 믿고 붙드는 애굽은 무엇입니까? 알콜중독, 동성애, 마약?

  • 내 옆에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을 붙들면서 예배와 큐티와 기도에서 어떻게 멀어지고 있습니까?

둘째, 하나님은 말씀대로 물리치십니다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갈대아의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모압 부대와 암몬 자손의 부대를 여호야김에게로 보내 유다를 쳐 멸하려 하시니

유다에 쳐들어온 것이 갈대아, 아람, 모압, 암몬, 즉 느부갓네살이 부리는 부대들이에요. 겉으로 보면 배반당한 바벨론 왕이 응징하러 보낸 거죠. 이른바 바벨론의 2차 침공이에요. 그런데 본문은 그들을 보내신 분이 여호와께서라고 밝혀요. 말씀에서 돌아선 유다에게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거예요. 세상 손이 내 손목을 붙들어도 그 손까지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다고 했죠. 우리 집에 동성애자, 마약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도 다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거예요. 거기에 순종하셔야 돼요.

오늘 한 걸음 더 갑니다. 그 말씀이 심판의 부대들을 움직여요. 우리가 돌아선 그 배반의 자리에서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일어서십니다. 그런데 온 것을 보세요. 대군이 온 게 아니에요. 부대들이에요. 국경을 들락거리며 반복해서 치는 소규모 약탈 떼들이에요. 심판이 어떻게 옵니까? 유수속보처럼 한 방에만 오는 게 아니고요. 일상이 조금씩 뜯기는 것으로 옵니다. 발이 뜯기고 마을이 털리고 어제 같던 오늘이 조금씩 무너져요. 그러니까 여러분 내 일상이 흔들릴 때 "이게 무슨 죄 때문이지?" 하고 기복적으로 계산부터 하지 마시고요. 물을 것은 "이 사건이 지금 나를 어떤 말씀 앞에 세우고 있는가?" 쉽게 말하면 이 사건이 와서 "자, 오늘 말씀이 뭐지?" THINK하는 것이에요. 이 큐티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그런데 이 친구는 갑자기 온 게 아니에요. 2절에 뭐라고 합니까? "그의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이게 므낫세 때 이미 들었어요. "내가 이제 예루살렘과 유다에 재앙을 내리리니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그 말씀이 오늘 움직이는 거예요. 예레미야도 그 시대를 이렇게 증언해요.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내었으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고 또 보내셨다고 해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거기다 더 나가서 부대를 보내셨다고 그러잖아요. 선지자를 보내시던 그 손이 부대를 보내시는 거예요. 구체적으로 갈대아 부대, 아람의 부대, 모압 부대, 암몬 자손의 부대. 이 부대를 보내시는 분도 같은 하나님이에요. 유다가 선지자를 통해 주신 말씀을 끝내 거절하자 그 말씀으로 경고하신 심판이 부대로 온 거예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3절이에요.

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을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 때문이며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리고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이 물리치다, 이 말도 처음이 아니죠.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지난주에 봤던 말씀이죠. 물리치겠다는 선언이었는데 드디어 오늘은 집행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말씀하신 거 반드시 이루신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므낫세가 지은 모든 죄 때문이며" 그런데 이게 므낫세 한 사람의 탓이에요? 아니죠. 백성이 그의 꾀임을 받아 함께 악을 행하고 그 길을 버리지 않았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므낫세는 온 유다의 죄에 붙은 이름이에요. 남의 이름을 손가락질할 자리가 아니에요. 므낫세 이름이 쓰인 그 자리에 내 이름을 넣어야 돼요. 국제정세, 나라정세가 어찌 되었건 내 죄 때문입니다. 이것이 말씀 앞에 선 사람의 고백이에요.

유다를 짓밟은 장본인도 바벨론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하셨어요. 다만 바벨론을 그 도구로 사용하셨을 뿐이에요. 내 인생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셨어요. 하나님보다 더 높은 건 이 땅에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이미 수차례 유다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셨어요. 그런데 우리는 바벨론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어요. 여호야김도 결국 바벨론에 의해서 쇠사슬에 결박되어 끌려갔잖아요(역대하 36장). 하나님이 아닌 것을 의지하는 삶의 결론은 패망뿐이에요. 그런데 우리의 애굽은 너무나 대단해서 믿으면서도 문제만 생기면 애굽으로 가고 싶기 때문에 결국 나 때문에 내가 가고 싶은 그 애굽을 완전히 망하게 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슬픔이 있어요.

이어서 4절 보세요.

또 그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의 피가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

므낫세가 흘린 그 무죄한 자의 피, 기억나시죠? 이사야를 톱으로 썰어 죽였다. 21장 16절에서 므낫세는 우상을 숭배했을 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을 마구 죽였어요. 그런데 여호야김도 똑같이 죽이고 있어요. 우리야라는 선지자가 예레미야와 같은 말씀을 전했다가 애굽으로 도망했는데 붙잡혀 와서 여호야김의 칼에 죽었어요. 예레미야 26장에 보면. 왜 죽였겠어요? 여호야김에게 전하는 선지자들의 말씀이 자기를 찔렀기 때문이죠. 말씀을 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무엇이에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끊는 거죠. 왕이니까 죽이는 거죠.

우리도 말씀을 대놓고 죽이지는 않아요. 대신 그 말씀을 전한 사람을 아주 미워해요. 그래서 목사가 싫고, 목자가 싫고, 목자가 싫으니까 목장이 싫고, 배우자가 싫어서 이혼해버리고, 부모가 싫어서 절연하고, 안 보고 살고, 관계를 끊어버리면 그 말씀도 안 들어도 될 것 같으니까. 그런데 사람을 밀어냈다고 말씀이 사라지는 건 아니죠. 선지자 입을 막아도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그대로 남는 거예요. 고양이가 막 쫓아오는데 쥐들이 머리만 딱 구멍에 박았다고 고양이가 물러갑니까? 그런데 우리는 듣기 싫어서 구덩이에 머리만 딱 박아요. 그래서 심판이 오는 거죠.

그런데 이 판결이 갑자기 떨어진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바로 이 시대에 예레미야를 통해서 두루마리를 쓰게 하셨어요. 당시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야김에게 바벨론을 섬기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했어요. 바벨론이 믿음이 좋아서 섬기라고 했겠습니까? 유다의 구원을 위해서는 바벨론 포로 생활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에요. 그 목적이 뭐라고 하십니까? 예레미야 36장 3절에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리니 그리하면 내가 그 악과 죄를 용서하리라" 용서하시려고 가서 포로 생활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인 거예요. 이 결혼 생활을 끝내고 생명을 끝내려고 하는 것은 반역이에요. 우리도 그래요. 싫어도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면 해야 돼요.

그런데 여호야김은 그 두루마리를 베어서 화로 불에 태워버렸어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다시 쓰게 하셨어요. 태워도 태워도 다시 쓰시는 하나님. 어떤 집사님의 가까운 친척 중에 성경책을 찢어서 화장실에서 화장지로 쓰다가 돌아가셨다는 분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집이 믿는 집인 거예요. 아주 잘 믿는 집인 거예요. 여기 여호야김이 있죠? 여호야김이 집집마다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저 인간이 미쳤나, 어떻게 성경책을 화장지로 쓰나?" 놀라지 말고, 여호야김이죠. 유다의 왕이 그랬잖아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말씀을 또다시 쓰게 하시는 거예요. 여기까지 하나님이 참으신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합니까? 마침내 가장 무서운 문장이 나오는 거예요.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

오늘 제목이에요. 이게 아주 무서운 얘기예요. 내가 심판하겠다는 뜻이거든요.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돼요. 즐겨하다는 기분이나 취향이 아니에요. "원하다"라는 뜻이에요. 성경에서 이건 거절의 문장으로 쓰이는데, 사람들은 무엇을 원하지 않았습니까? 말씀 듣기를 원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의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해치는 쪽에 이 말로 아니하셨어요. 여섯 구절이나 "아니"를 말씀하세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은 백성을 멸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어요. 왜냐하면 다윗 때문에, 언약 때문에. 저주를 원하지 않으셨어요. 발람의 저주를 듣기조차 원하지 않으셨어요. 그러니까 여섯 구절 내내 "백성을 해칠 수가 없어" 하시는 거예요. 그랬던 하나님이 신명기 29장에서 딱 한 번 경고하셨어요. 그 경고가 오늘 실행이 된 거예요. 신명기 29장 19절 20절에 "저주의 말씀을 듣고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 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사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원문은 똑같이 "사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와 같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여섯 번이나 비슷하게, 하나님은 아무리 못되게 해도 끝까지 참으셨어요. 참으셨는데 신명기에서 딱 경고, "내가 사하지 아니하리라." 그 말씀을 오늘 열왕기에서 집행하는 거예요. 우리가 평생 하나님께 아니요 했던 그 말이 마침내 하나님의 입에서 우리에게 돌아온 거예요.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 다른 역본들은 이걸 "쉽게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이제 너희는 하나님의 용서가 끝났다"고 표현하는데, 아주 무서운 얘기가 나온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는 붙들어야 하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용서를 싫어하셨다는 뜻이 아니고요, 끝까지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용서의 문이 닫혔다는 말이 아니에요. 용서하시려고 선지자를 보내고 또 보내셨는데 그 말씀을 끝까지 거절한 유다에 내린 심판을 더 이상 거두지 않으셨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하도 말씀에 아니요 하니까 하나님도 참다가 드디어 "나도 너희를 아니라"고 하셨다는 거예요.

요아스도, 여호아하스도, 여호야김도 끝까지 기회를 줬는데도 회개하지 않았어요. 이게 문제예요. 끝까지 기회를 줬는데, 선지자를 보내고, 예레미야를 보내고, 이사야를 보내고. 그 선지자들을 죽였잖아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는데, 그러니까 마지막에 회개하는 게 예수 믿고 가는 거잖아요. 예수를 믿느냐 이 말 한마디. 마지막에 회개하지 않는 게 즐겨하지 않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니라는 거예요. 이런 왕에게는 당신이 틀렸다는 말을 절대로 못 들어요. 절대 독재. 그러니 이렇게 말씀을 찢고 선지자를 죽이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믿음과 행위에 대해서 정말 정립을 하셔야 돼요. 마지막에 회개해야 되는 거예요. 마지막에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사함을 받지 못한 자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지막에 내가 회개하고 가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런데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사랑하니까 누가 천국 가게 됐다 그러면 다 몰려와서 영접기도를 받아내려고 하잖아요. 그분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 때문이기도 해요. 우리 부모님이 안 믿고 가면, 우리 식구들이 안 믿고 가면 내가 살 수가 없는 거라. 지금은 모르나 후에는 알게 돼요. 저를 보세요, 믿고 갔기 때문에 이렇게 살잖아요.

적용 질문이에요.

  • 최근 나를 가장 찌른 말씀은 무엇입니까? 나는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까, 아니면 말씀을 전해 준 사람을 미워하고 피했습니까?

  •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아직 괜찮다"로 여기며 미루고 있는 회개는 무엇입니까?

셋째, 애굽은 끝내 구하지 못합니다

5절 6절이에요.

여호야김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여호야김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이게 다예요. 11년 다스린 왕의 마지막이 이 한 문장이에요. 유다 왕들의 마지막에는 보통 장사 기록이 붙어요. 아버지 요시야는 "그의 무덤에 장사하니"라고 하는데, 아들에게는 무덤 문장 자체가 없어요. 예레미야는 여호야김 왕의 마지막을 이렇게 예고했어요. "그가 끌려 예루살렘 문 밖에 던져지고 나귀같이 매장을 당하리라." 그 예언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성경이 설명하진 않아요. 그런데 열왕기는 장사도, 애굽도, 무덤도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은 채 침묵하는 거예요. 그 바쁘게 살았던 11년은 어디로 가고, 모든 일은 역대지략으로 넘어갔어요. 열왕기의 짧은 기록에 남은 것은 두 가지뿐이에요. 배반과 심판당했다. 왕이면 뭐해요. 예수 믿고 천국 가야지. 여러분 내 인생이 한 단락으로 기록된다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여호야김이 그렇게 의지하려 했던 애굽은 어떻게 되었나요? 7절입니다.

애굽 왕이 다시는 그 나라에서 나오지 못하였으니 이는 바벨론 왕이 애굽 강에서부터 유브라데 강까지 애굽 왕에게 속한 땅을 다 점령하였음이더라

완전 망했죠. 유다가 바벨론에게 뜯기는 동안 애굽은 구하러 오기는커녕 국경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어요. 그 이유를 보세요. 애굽 강에서부터 유브라데 강까지 애굽 왕에게 속한 땅을 다 점령하였음이더라. 여러분, 이 지도가 어디를 떠올리게 합니까? 열왕기하 4장에 유브라데까지는 솔로몬 시대에 유다가 누리던 지경이었어요. 솔로몬의 영광을 그리던 지도가 이제는 바벨론의 점령 지도가 된 거예요. 말씀을 버린 시대에는 축복의 지도가 남의 나라 지도가 되는 거예요. 이사야가 진작 경고했습니다. 이사야 31장에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지인저." 사람을 신처럼 붙들면 어떻게 되는지 오늘 본문까지 오면서 다 봤어요. 우리아도 애굽에서 잡혀왔고, 여호아하스도 애굽에서 죽었어요. 여호야김이 도움을 기대할 때 애굽은 나오지도 못했어요. 그들이 붙든 애굽은 아무도 구해내지 못했어요.

그런데 착각하면 안 돼요. 애굽이 물러났다고 유다가 풀려난 게 아니에요. 회개하지 않은 유다에게는 애굽이 다친 그 자리에 더 큰 제국 바벨론이 딱 들어앉은 거예요. 의지하던 대상이 무너졌다고 저절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건 아니에요. 한 귀신 물러가고 일곱 귀신이 들어와서 앉는 거예요. 회개하지 않으면 애굽의 손에서 벗어나도 바벨론의 손에 붙들리는 거예요. 이혼한다고 좋은 남편이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고 일곱 배 더 어려운 남편, 아내가 기다리는 거예요. 우린 계속 인간에 대해서, 믿지도 않는 남자에게 환상을 가져요. 사람은 신이 아니고 사람이라고 그러는데. 이혼한다고 하나님께 돌아온 건 아니라는 거예요.

너무 의지하는 친정이 이렇게 애굽처럼 잘 살게 되면 조금만 힘들어도 기웃거리는 거예요. 그래서 딸 하나밖에 없으니까 아이도 안 낳게 하고 결혼도 안 하게 하고. 조금만 힘들면 친정으로 달려가요. 내가 친정을 의지해가지고 친정도 나도 다 망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 때문에 친정이 망할 수밖에 없다는 이 사실을 미리 여러분이 알고 계세요.

여러분, 내가 붙든 그 통장과 사람과 실력이 내 죄와 죽음 앞에서 무엇을 해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대신 붙든 것은 죄와 죽음 앞에서 국경 밖으로 아무것도 나오지 못했어요. 여호야김을 세워준 애굽이 그랬어요. 내가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고 의지해온 그 애굽도 내 죄와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못해요. 죽음 앞에서는 나오지 못합니다.

그럼 우리가 어디로 가요? 오늘 본문이 보여준 세 장면 끝에 우리가 서 있어요. 우리는 돌아서서 배반해요. 하나님은 말씀대로 물리치세요. 그런데 그 애굽은 나를 끝내 구하지 못해요. 우리 앞에는 이 판결만 남는 거예요.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 이 판결이 우리에게 마지막이라면 우리에겐 소망이 없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여기서 끝나지 않죠. 애굽은 우리를 구하지 못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그의 피로써 화목제물로 세우셨어요. 로마서 3장 25절 26절이 십자가를 설명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요한일서 1장 9절 이렇게 약속을 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하나님은 죄를 눈감아줘서 사하신 게 아니고요. 그리스도의 피로 공의를 이루시고 그리스도를 믿고 자백하는 죄인을 용서하십니다. 사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사함받는 줄을 믿습니다.

적용 질문

  • 힘든 일이 생길 때 하나님보다 먼저 찾는 것은 무엇입니까?

  • 내가 믿던 것이 무너졌을 때 하나님께 돌아왔습니까, 아니면 또 다른 애굽을 찾았습니까?

  • 하나님이 사하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내가 아직 숨기고 있는 죄는 무엇입니까?

  • 여러분은 마지막에 회개하고 천국에 갈 자신이 있습니까?

우리는 늘 돌아서서 배반을 해요. 하나님은 말씀대로 물리치십니다. 애굽은 우리를 끝내 구해주지 못해요. 우리는 늘 주님을 배반하나 주님의 마음은 여전히 우리를 위해서 늘 빌고 계시다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