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요구가 나오는 곳이 어디일까요? 제가 이렇게 몇 군데를 생각해 보니까 그 중에 대표적인 경우가 결혼식장이더라고요. 결혼식장에서 주례자가 신랑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마음을 다하여 옆에 있는 신부를 사랑하시겠습니까?" 이게 사실 별말 아닌 것처럼 들리지만 여러분, 하나하나 따져서 생각을 해보세요. 이렇게 굉장히 무서운 말이에요. 시간도 마음도 인생도 전부 다 걸라는 것이잖아요. 그 한 사람에게. 이게 계약서라면 거기에 사인할 사람 사실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도 그 신랑은 그 자리에서 단 1초도 망설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얼굴로 대답해요. "네!" 뒤따르는 인생을 생각하지 않은 채 그 행복에 겨워서 너무 기뻐서 "네!" 도장을 찍는 것이죠. 가장 무서운 요구에 가장 행복한 대답이 돌아오는 겁니다. 이상하지 않으세요? 똑같이 전부를 내어놓으라는 것인데, 어떤 요구는 너무 부담이 되고 어떤 요구는 이렇게 기쁨이 됩니다. 사실 이거에 비하면 "음식물 쓰레기 좀 버리고 와라, 빨리 수거 좀 해라" 이런 게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그냥 입이 다 나와서. 그 계약서를 생각하시라고요. "네!" 외치셨던 그것을 생각하시란 말이죠. 우리가 큐티로 묵상하고 있는 신명기, 특히 오늘 본문에도 이런 요구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것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거예요. 내용이 뭡니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지금 요구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왜 우리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요구하실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마음을 다한 사랑에 대해 세 가지로 같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행복입니다.
12절이에요.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요구라는 말을 듣는 순간 우리 머릿속은 바로 계산이 시작되죠. "뭘 달라는 거지? 돈을 달라는 건가? 시간을 달라는 건가? 도대체 뭘 더 내놓으라는 것이지?" 막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더구나 그 요구를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어떻겠어요? 마음이 더 복잡해지는 거예요. 거절할 수도 없고 말이죠. 부담 백배가 됩니다. 하나님 말씀이 청구서로 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예배도 큐티도 봉사도 전부 다 숙제처럼 하게 됩니다. 드리기만 하다가 지쳐가는 신앙생활이 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이 하나님의 요구를 제대로 들으려면 오늘 본문 12절 맨 앞에 있는 단어를 주목해야 됩니다. 우리 번역에는 그게 빠졌어요. 원문에 보면 12절의 맨 처음은 "이제"(וְעַתָּה, wə'attāh)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이제"가 어디에 붙는 말인가요?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그 이스라엘 백성 앞에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 돌판이 그 앞에서 깨져버린 그 이스라엘 백성 앞에 지금 "이제"가 붙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범죄하고 반역하고 배반한 그 백성을 멸하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돌판을 다시 만들어서 새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일으켜 세우셔서 다시 그 길, 가나안을 향한 길을 이어가게 하십니다. 바로 그 다음 말이 "이제"인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요구부터 하신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먼저 무너져 있는 백성을 살려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순종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야 되는 것이죠.
그러면 그렇게 살려놓으신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나요? 오늘 본문에서 잘 보시면 "경외하라, 행하라, 사랑하라, 섬기라, 지키라." 이 다섯 가지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를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다섯 명령은요 따로 노는 숙제가 아니에요. 다섯 숙제가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킵니다. 무엇입니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은 이 다섯 가지 행위가 아닌 거예요. 한 사람 한 사람의 온 마음, 한 사람의 전심을 하나님께서 구하고 있으신다. 온 마음으로 하나님께 속하는 것, 온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 온 마음으로 하나님께 딱 달라붙어서 거기서 떠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이 지금 요구하시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왜 굳이 이런 요구를 하실까요? 13절입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왜 지켜야 합니까? 의무이기 때문이에요? 그렇죠, 의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이라면 그 은혜를 기억하고 은혜에 맞게 살아야 되는 거 맞죠?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본문이 알려주는 이 요구의 이유는 뭐예요? 우리의 행복입니다. 행복. 말만 들어도 너무 좋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이 성경이 말하는 행복이 무엇일까요? 초대교회 교부인 어거스틴은 하나님 사랑의 계명이 두 가지를 가르친다고 설명했습니다.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 그리고 얼마나 사랑할 것인가? 누구를 사랑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죠. 얼마나 사랑합니까?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겁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하나님을, 하나님만을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해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최고의 선이시기 때문에, 가장 좋은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보다 더 좋은 분도, 더 좋은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문제는요, 사랑이 없는 게 아니에요. 사랑해야 될 대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우리 마음에 사랑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 사랑의 순서가, 그 질서가 뒤집혔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돈과 자녀와 안정과 성공, 여기에 우리가 더 많은 마음을 사실은 쏟고 살 때가 많죠. 물론 그런 것들 다 좋은 것이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보다 좋지는 않은 것이죠. 우상은 우리가 나쁜 것을 사랑할 때만 생기는 게 아니에요. 좋은 것이라도 그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여기면서 그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면서 살 때도 그것이 우상숭배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닌 것에 나의 온 마음을 걸면 어떻게 될까요? 한 집사님께서 평소에 주식할 때 단타도 하시고 베팅을 하듯 욕심을 부리면서 하셨대요. 그런데 최근에는 말씀이 들리셔서, "욕심 부리면 안 되겠다, 욕심이구나" 이런 걸 깨달으셔서 적용으로 딱 100만 원만 투자를 하셨답니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식이 상승세였잖아요. 그래서 100만 원 투자했는데 20만 원 수익을 보신 거예요. "그래, 이번에는 이렇게 말씀대로 했더니 이렇게 수익도 나는구나." 이렇게 이제 생각을 하신 것이죠. 그런데 바로 그때 아내 집사님이 어디선가 즉석 복권을 가져오셨답니다. 하나하나씩 봤더니 그냥 기절초풍할 뻔한 거예요. 다섯 장이 있었는데, 다섯 장에 글쎄 "20억 당첨"이라고 딱 써있던 겁니다. 여러분, 20억이 다섯 장이면 얼마예요? 100억이에요, 100억. 그래서 이분이 참 지혜로우신 것 같아요. 세금 딱 떼고, 이것저것 딱 떼고, 그래서 60억 부자다, 60억이 내 것이 됐다. 잠깐 동안 60억 부자로 꿈을 꾸셨습니다. 돈을 받으려고 사방에 전화를 했는데 아는 곳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구입한 곳에다 전화를 했더니, 아 글쎄 이 복권이 어르신들 기쁘게 해드리려고 만든 이벤트 상품이랬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꽝보다 더 심한 꽝인 것이죠. 꽝은 꽝이라고 써있기라도 하잖아요. 20억이라고 써있는데, 그게 그냥 종이였다니.
그런데 이 집사님께서 목장에서 이렇게 고백하셨어요. "몇 시간 동안 60억 부자로 살아봤다." 60억이 생긴다고 하니까 순간 너무 좋았지만, 오히려 마음에서 평안이 없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여러분, 한번 상상을 해보세요. 진짜로 그런 일이 생기면 사실 잠깐 기쁘지만 마음속에 얼마나 걱정과 계산이 많이 되겠습니까? 평안이 없어지는 거예요. 여러분 통장에는 아직 1원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벌써 생각만으로 그냥 평안이 도망을 가버린 거예요. "나는 욕심 안 부려." 우리가 이렇게 장담하고 깨달았다고 여기면서 살 수 있지만, 내 마음이 진짜로 어디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지는 이런 사건을 만나면 바로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돈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니에요. 문제는 하나님 아닌 어떤 것도 우리 온 마음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하더라도, 우리 온 마음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어요? 거기에 전부를 건다면, 그것이 흔들릴 때, 그것이 없어질 때, 우리 존재 또한 같이 흔들리고 같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 행복을 책임질 수 없는 것에게 내 행복을 맡겼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것이 아니라 온 마음을 요구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빼앗으려고 그러시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뒤틀린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아서 가장 좋은 분을 가장 사랑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인 거예요. 이것이 "네 행복을 위하여",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라는 이 말씀의 뜻이에요.
여러분,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게 곧 거룩 아니겠어요? 가장 좋으신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 이게 가장 구별된 것이죠. 이게 거룩이란 말이에요. 목사님 말씀처럼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 아니라 거룩입니다. 이 말은 행복을 버리라는 뜻이 아니에요. 보세요,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네 행복을 위하여"라고 말씀해 주시잖아요. 그러니까 이 말은 "행복이냐 거룩이냐, 이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라" 이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순서를 말하는 것이죠.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행복을 가장 높은 자리에 놓으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우상이 되는 거예요. 왜냐? 하나님보다 높지 않거든요. 그러나 가장 좋으신 하나님을, 가장 높으신 분이신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이 거룩의 길이야말로 결국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인 거예요. 빼앗기지 않는 행복입니다. 행복은 나의 형편이 내 뜻대로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건 사실 욕심이죠. 우리는 행복 때문에 결혼했다가 행복 때문에 이혼하는 것이죠. 그런 행복을 추구해서는 진짜로 행복해질 수가 없다. 그러나 이 결혼을 통해서도 가장 좋은 분이신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그 순종으로 결혼생활을 이어가면,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는 거예요. 가장 좋은 분을 놓치지 않으니까, 내 형편이 아무리 흔들리고 내 상황이 아무리 변하고 무너져 내려도, 내 중심까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행복은 받고 싶은데 하나님의 요구는 듣기 싫죠. 순종은 거부하고 싶어요. 그게 또 우리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적용해 보세요.
요즘 내 마음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왜 그것이 내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아까워서 아직 미루고 있는 순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온 마음을 드리는 것이 손해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거래하는 게 아니에요.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삶이에요. 하나님을 중심으로 두는 것, 거룩이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마음을 다한 사랑, 바로 그 길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행복의 길인 거예요.
둘째는,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14절이에요.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 이건 히브리식으로 가장 크게 말한 겁니다. 그러니까 온 우주가, 온 우주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 것이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 아쉬운 게 없는 분이세요. 하나님은 그 자체로 완전하십니다. 스스로 완전하신 분이세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으세요. 우리에게 무엇을 받아내야만 채워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게 우상과 근본적인 차이인 거예요.
그런데 바로 그 다음 15절이 어떻게 시작하는지 보세요.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여호와께서 오직" 이렇게 시작합니다. 온 우주가 다 하나님 것인데, 그래서 그 어떤 것도 필요 없으신 분인데 하나님께 "오직"이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오직 딱 하나 진짜 신경 쓰시는 하나가 있다는 겁니다. 그게 누굽니까?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우리입니다. 게다가 이 백성을 어떻게 하신다고 그래요? 기뻐하셨다 그럽니다.
이 "기뻐하다"(חָשַׁק, ḥāšaq)라는 말을 보면, 이 같은 어근을 가진 단어가 성경에서 수레바퀴의 축과 바퀴 테를 잇는 그 바퀴살을 가리킬 때 쓰입니다. 그리고 성막을 만들 때, 천막을 칠 때, 여러 천들을 이어붙이는 그 이음쇠를 가리킬 때도 이 단어를 쓰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기뻐하셨다"라고 할 때, 이 기뻐함은 기분의 문제가 아닌 거예요. 감정의 문제가 아니에요. 이것은 존재의 문제고 행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이 백성을 향해서 같이 이어지고 싶어서, 같이 붙어있고 싶어 한다는 거예요. 다른 곳에서는 "연연한다, 연모한다"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연애하다가 왜 결혼합니까? "야, 우리 이렇게 좋아서 이제 떨어지기가 싫다. 우리 그냥 같이 살자." 그러면서 결혼을 이야기하잖아요. 떨어지기 싫은 마음, 붙어있고 싶은 마음, 같이 살고 싶어 하는 마음. 바로 그 마음이에요. 그 마음이 바로 이 "기뻐하셨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지금 그런 마음을 품고 계시다는 겁니다. 온 우주를 가지신 하나님이 그것도 오직, 오직 이 백성에게 이런 특별한 기쁨을 가지고 계신다는 거예요.
더 놀라운 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마지못해 택하신 게 아니에요. 우리는 신앙생활 하다 보면 우리의 연약함과 죄악이 드러날 때면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래도 나를 버리시지는 않을 거야.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데리고 가시느라고 얼마나 힘드실까. 얼마나 답답하실까. 겨우 참아주시니까 내가 그냥 이렇게 가고 있구나." 우리 죄를 보면 이렇게 생각할 때 있어요. 맞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봐주시면서 억지로 어쩔 수 없이 그러시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신다고요? 기뻐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사랑하실까요? 이 백성이 사랑스러워서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신명기가 이미 다 말해줬어요. 7장에서 보면 "너희 수효가 많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러셨고요, 앞서 9장에서도 뭐라고 그랬습니까? "너희의 공의로 말미암아도 아니다. 너희가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백성의 자격이 아닙니다. 백성이 매력적이어서 그런 것도 아니에요. 하나님 사랑의 이유가 우리 안에 있지 않아요. 이유는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이게 왜 복음일까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이유를 내 안에서 찾기 시작하면 결론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면, 내가 잘한다고 생각하면 금세 교만해지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면, 내가 잘 못한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됩니까? 금세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교만과 절망은 반대처럼 보이지만 뿌리는 같아요. 둘 다 하나님 사랑의 이유를 나 자신 안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15절은 이 둘 다를 무너뜨리는 거예요. 잘해서 사랑받는 게 아니니까 자랑할 것도 없는 것이고요, 내가 부족하다고 그 사랑에서 탈락하는 것이 아니니까 절망하거나 낙심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기뻐하시고 사랑하시고 그 다음에 뭐예요?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습니다." 모세는 조상들에게 시작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지금 모세의 말을 듣고 있는 그 백성들의 오늘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고요, 더 나아가서 이 기록된 말씀을 오늘 읽으면서 같이 묵상하고 있는 저와 여러분의 오늘 앞으로 끌어다 놓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는 옛날 옛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오늘인 거예요.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적용해 보세요.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신다는 말이 믿기 어려웠던 때는 언제입니까? 그때 나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런 나를 그래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지금 믿으십니까?
한 목자님 나눔이에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아주 열심히 성실히 잘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런 생각이 올라오셨대요. "내가 받을 상급이 크겠구나." 이렇게 신앙생활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살았으니 내가 나중에 받을 상급이 크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셨답니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면서 사춘기가 되면서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탈선하기 시작했어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마음에서 전혀 다른 말이 올라왔답니다. "내 신앙이 부정당한 것 같다. 그동안 내가 열심히 했던 그 신앙이 이제 부정당한 것 같다." 이런 생각이 올라왔다는 거예요. 한쪽에서는 나는 이만큼 잘했으니 받을 것이 있다고 생각한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자녀가 무너지자 자기 신앙까지 함께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자랄 때도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이고요, 무너질 때도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이죠. 하나님 사랑의 이유를 계속해서 자기 자신에게서 찾고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이게 이분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저의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또 여러분의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목자님 고백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아이가 이렇게 다 깨뜨려주고 제가 별 볼일 없는 것을 보고 나니까 그제서야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구나 이게 깨달아졌다"고 나누시더라고요. "내가 아이를 미워해서 그렇지, 사실 보면 하나님께서 아이들을 선물로 보내주셨더라고요." 이렇게 나누셨습니다. 여러분, 자격이 깨지고 나니까 비로소 은혜로 붙들어오신 그 하나님의 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죠. 믿는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깨지지 않으면 우리의 시선은 늘 우리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사람과 사건을 우리에게 보내시는 것이죠. 우리의 자격을 깨뜨려주시고, 우리의 높아진 마음을 깨뜨려주시는 겁니다. 왜요? 나에게서 돌려서 은혜로 붙들어주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시려고 그런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앞서 읽었던 12절과 15절을 다시 한번 나란히 보세요. 놀라운 순서가 보입니다. 12절에서 뭐라고 그러셨어요?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죠. 근데 15절에 와보니 이 명령보다 먼저 있었던 일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고 계셨다는 거예요. 기뻐하시고 사랑하사 택하셨다. 우리 자격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래서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4장 19절에서 이것을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아멘.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요, <마음을 다한 사랑>이에요. 지금까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사랑 그거 생각하셨을 겁니다. 맞아요. 우리의 사랑이 마음을 다한 사랑이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마음을 다하신 분이 계신 거예요. 예레미야 32장 41절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이 백성이 지금 듣는 백성은 순종하고 있는 백성이 아닙니다. 요시야 이후에 다 악을 저지르다가 심판을 받아서 이제 바벨론으로 끌려가기 직전의, 심판을 돌이킬 수 없는 그 상태의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언인 거예요. 자격을 다 잃어버린, 심판 앞에 놓인 백성 앞에서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세요?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서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기쁨으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만 마음을 다하라고 요구하시는 줄 알고 살았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하나님께서 먼저 마음을 다하셨던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두셨던 거예요.
셋째는, 언약의 성취입니다.
16절이에요.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의 할례를 행해야만 하나님의 백성 삼아주시겠다?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예요. 신명기는 그 전부터 계속 "네 하나님 여호와,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계속해서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이 불순종하는 백성, 계속해서 잊어버리는 백성을 향해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 너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해 주십니다. 기뻐하시고 사랑하시고 택하셨으므로, 그러므로 이제 마음까지 하나님께 속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내가 너희에게 먼저 마음을 두고 너희를 기뻐하고 사랑하고 택하였으니, 이제 너희도 무늬만 그렇게 살지 말고 마음으로 나에게 속하거라." 이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왜 하필 피가 흐르는 고통이 있는 이 할례를 쓰셨을까요? 15절에 조상이 나오고 후손이 나오는데요, 창세기 17장의 아브라함 언약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말씀하시면서 그 언약의 표로 주신 것이 바로 이 할례인 거예요. 그래서 할례는 "나는 이제 언약의 하나님께 속했다. 나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다" 라는 증표, 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표를 어디에다 하라고 합니까? 몸이 아니라 마음에 하라고 하죠. 언약의 표가 몸에만 남아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몸의 표가 잘못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직분이 잘못이 아니에요. 신앙 경력이 잘못된 게 아니에요. 모태신앙이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그러한 모습들이 우리 마음의 순종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마음의 할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밀어내고 하나님의 말씀에 맞서고 있는 나의 완악함을 잘라내는 겁니다.
따라서 이 마음의 할례의 반대가 뭘까요? 그 반대는 목이 곧은 것이죠. 목이 곧다는 것은 주인이 멍에를 씌우려고 하는데 그 멍에가 싫어서 목을 빳빳하게 쳐드는, 숙이지 않고 쳐드는 그 소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목이 곧은 사람은 고개를 못 숙이는 게 아니에요. 목이 다쳐서 지금 목을 못 숙이는 게 아닙니다. 고개를 지금 안 숙이는 거예요. 언제 그렇습니까? 말씀이 나의 계산과 나의 이익과 나의 판단과 부딪힌다고 생각할 때 맞서는 것이죠. 배우자의 말이 듣기 싫고 목장의 권면이 거슬리는 그 순간입니다. 말씀이 나를 읽어야 되는데 그래서 변해야 하는데, 내가 말씀을 읽으면서 판정을 내리는 것, 그것이 목이 곧은 거예요.
지난주 말씀에서 요시아도 옷은 바꿨지만 변장은 했지만 길은 못 바꾸지 않았잖아요. 그러니까 어제 순종했다고 그래도 오늘도 내 판단이 맞는 게 아닌 것이죠. 어제의 순종을 오늘 정답처럼 여기는 것, 그것 자체가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기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우리도 매일 큐티하고 목장에서 적용하고 사람 살리느라고 손과 발을 움직여서 수고하고 TT도 가서 섬기고 이렇게 하지만, 우리가 안 된다는 거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굳은 마음을 잘라내려고 우리가 애를 쓰지만 그 굳은 마음이 잠깐 잘라지는 것 같다가도 자고 일어나면 다시 도로 있는 것을 우리가 매일 경험하지 않아요? 이를 악문다고 미움이 없어집니까? 조금만 지나면 다시 내 마음속에 미움과 분노와 불평과 원망이 올라와서 나를 삼키는 그 경험들을 우리는 늘 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 손으로는 벨 수 없습니다. 그 완악함의 뿌리까지는 우리가 못 베는 거예요.
그런데 바로 이 한계의 자리에서, 우리가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이 한계의 자리에서 신명기 30장 6절 말씀이 열립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여러분, 바로 이것이 언약의 성취인 거예요. 우리에게 온 마음을 요구하신 하나님께서 그 마음 자체를 친히 새롭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해주시는 거예요. 오늘 본문 10장에서는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 이렇게 명령하셨잖아요. 그런데 30장 가면 어떻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가 너희 마음의 할례를 베풀겠다." 내가 베풀겠다. 하나님이 베풀겠다고 약속해주시는 거예요. 명령이 약속으로 깊어지는 것이죠. 은혜가 우리의 순종을 없애는 게 아닙니다. 은혜는 순종할 마음을 새롭게 주시는 거예요. 거룩이 우리의 행복을 없애는 게 아닙니다. 거룩은 우리가 진짜로 행복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시는 거예요.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 내 힘으로 끝까지 사랑할 수 없어요. 배우자도 사랑 못합니다. 자녀 끝까지 사랑할 수 없어요. 하물며 하나님을 마음 다해 사랑하는 그 마음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스스로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뭐라고 그럽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다." 우리 손으로는 만들 수도 없는 그 사랑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다는 거예요. 그 마른 땅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다는 거예요. 사랑하라고만 명령하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부어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할 마음을 받을 수 있도록 선물로 그 마음을 주시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말씀의 수술대 위에 올라갑니다. 내가 고칠 수 없는 이 굳은 마음을 하나님께 내어놓는 것이죠. 골로새서 2장은 이것을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라고 불러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는 그 신비한 연합 안에서, 우리 손으로는 할 수 없는 이 마음의 할례를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 새 마음, 그렇게 새롭게 된 새 마음은 반드시 사람을 향하게 되어 있어요. 오늘 큐티인 본문이지만 설교에서 다루지 않았습니다만 17절 이후에 보시면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시고 나그네를 사랑하시며, 그리고 이 말씀을 듣고 있는 백성을 향해서 뭐라고 그러세요? "너희도 나그네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마음의 할례는요 우리 마음 안에서 끝나는 게 아니에요. 받은 그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다른 사람을 향해서 사랑하는 것이 사랑받는 그 사람에게만 유익이 아닙니다. 사람을 만나야 내 마음의 실체가 드러나기 때문에 나에게도 유익인 거예요. 혼자 있을 땐 우리 실체를 볼 수 없습니다. 지체들과 가족들과 이웃들과 어울려서 부딪히면서 살아갈 때 나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죠. 왜 드러납니까? 하나님께서 드러내셔서 다루어 가시는 거예요. 거룩하게 빚어 가시는 겁니다.
이번 주에도 그런 고백이 있었습니다. 한 목자님이 최근 권찰님 앞에 무릎을 꿇고서 회개를 하셨대요. 자신의 의가 너무 강해가지고 옆에 있는 가족들이 너무너무 힘들었겠구나라는 것이 진짜 깨달아지셔가지고, 그 모든 잘못을 사죄하는 마음으로 권찰님께 무릎을 꿇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회개를 하면 마음의 평안과 기쁨이 있기를 우리가 기대하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회개를 하고 무릎까지 꿇었는데, 이상하게 그 이후부터 기운이 더 빠지더라는 거예요. 더 무기력해지더라는 거예요. 이상하잖아요. 왜 그럴까? 그래서 이제 또 생각을 해보시는 것이죠. 그랬더니 그제서야 자기 자신을 평생 움직여왔던 힘이 무엇인지 보게 되셨답니다. "내가 나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었구나.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잘했어요", "괜찮아요," 이렇게 인정받는 것이 내 삶의 에너지였구나. 결국 내가 나를 우상으로 삼아서 살고 있었구나.' 이것을 이제 생각하신 것이죠.
그래서 권찰님하고도 얘기를 나누는데 권찰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거예요. "당신은 진짜 자신을 너무 사랑하는 것 같아." 여러분, 회개를 했어요.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평생 나를 사랑하는 게 문제였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러면 옆에 같이 사는 아내가 "당신은 정말 당신만 사랑하는 것 같아." 이렇게 얘기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머리로는 우리가 알아요. 머리로는 "아, 그렇지, 회개했고 하나님 앞에 고백했고 했는데." 그런데 아내가 "너만 사랑하는 사람이야" 하면, "예, 맞아요, 그렇습니다." 머리로는 아는데 그게 안 되는 거예요. 그냥 자존심이 확 상하는 거죠. 그냥 짜증이 확 올라오면서 화가 났다는 거예요. 얼마나 이게 우리 모습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 다음날, 주일 설교 말씀을 듣는데 그 말이 딱 생각이 났다는 거예요. 희한하게 우리가 꼭 듣기 싫은 말이 설교 들을 때 생각나시죠? 듣기 싫은, 상처 입은 마음이 말씀 들을 때 생각나서 눈물이 나오고 그러는데, 여러분,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굳은 목을 치료하시는 순간인 줄 믿습니다. 생각나게 하시는 것이 그게 은혜인 거예요. 그리고 말씀을 들으시면서 다시 생각하시면서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분명히 깨닫고 회개까지 했는데 옛사람의 습관이 정말로 질기게 남아있습니다.' 정말 그러시죠? 하나님이 제 상급이 되시고 기쁨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큐티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런 삶, 이런 경험에 우리는 반복인 거예요. 이 땅에서 완벽한 그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안 되는 게 다 있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내 상급이 되고 기쁨이 되어 주옵소서" 이렇게 구하면서 말씀으로 회개하면서 적용하면서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자 목자 모임에서 초원님이 이렇게 권면을 하시더라고요. "내 안에서 세상 열심이 빠져나간 그 빈자리를 또 다른 우상으로 채우지 마시고 말씀으로 채우십시오." 어떤 사람은 한순간에 바뀌지만 어떤 사람은 하나씩 하나씩 바뀌더라고요. 여러분, 한순간에 바뀌는 사람 퍼센트로 따지면 1%도 안 될 거예요. 99%는 하나씩 하나씩, 아니 하나라고 할 수도 없죠. 0.0001씩 그렇게 하루하루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가는 것이 우리 인생인 겁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가는 게 중요한 거예요. 큐티하면서 가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 한번 했다고 옛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듣기 싫은 말씀 앞에서 또 우리의 목이 곧아집니다. 그때 다시 말씀과 공동체 앞에 그 마음을 내어놓는 거예요. 수술대 앞에 내어놓는 겁니다. 빠져나간 우상의 빈자리를 또 다른 우상으로 채우지 않고 말씀으로 채우면서, "하나님만이 나의 상급이 되시고, 하나님만이 나의 기쁨이 되어 주옵소서" 이렇게 구하는 것입니다.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최근 누구의 어떤 말이 가장 듣기 싫었습니까? 그 말 앞에 드러난 나의 고집은 무엇입니까?
이번 주 공동체에서 어떤 완악함을 내어놓고 "제가 못 벱니다. 베어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 같이 기도하겠습니까?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 하신 하나님께서 마침내 마음의 할례를 행해주십니다. 베풀어주시는 거예요. 마음을 다한 사랑은 마침내 우리 마음을 다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인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사랑이 아니에요. 우리는 마음을 다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가족도 마음 다해 사랑하지 못하잖아요. 어떻게 하나님을 마음 다해 사랑하겠어요. 마음을 다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인 거예요. 사랑할 수도 없는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마음과 정성을 다하시는 우리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음을 다하신 것. 이제 그 사랑 앞에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드리면서 "주님 사랑한다" 우리의 사랑을 찬양으로 고백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