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교회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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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7:1-10

추적하시는 하나님

김영수 목사조회 301
🌱 함께 만든 분들: 차치환 David Cha

사무엘하 17:1-10

1 아히도벨이 또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사람 만 이천 명을 택하게 하소서 오늘 밤에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추적하여 2 그가 곤하고 힘이 빠졌을 때에 기습하여 그를 무섭게 하면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하리니 내가 다윗 왕만 쳐죽이고 3 모든 백성이 당신께 돌아오게 하리니 모든 사람이 돌아오기는 왕이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그리하면 모든 백성이 평안하리이다 하니 4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그 말을 옳게 여기더라 5 압살롬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도 부르라 우리가 이제 그의 말도 듣자 하니라 6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매 압살롬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히도벨이 이러이러하게 말하니 우리가 그 말대로 행하랴 그렇지 아니하거든 너는 말하라 하니 7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번에는 아히도벨이 베푼 계략이 좋지 아니하니이다 하고 8 또 후새가 말하되 왕도 아시거니와 왕의 아버지와 그의 추종자들은 용사라 그들은 들에 있는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 같이 격분하였고 왕의 부친은 전쟁에 익숙한 사람인즉 백성과 함께 자지 아니하고 9 지금 그가 어느 굴에나 어느 곳에 숨어 있으리니 혹 무리 중에 몇이 먼저 엎드러지면 그 소문을 듣는 자가 말하기를 압살롬을 따르는 자 가운데에서 패함을 당하였다 할지라 10 비록 그가 사자 같은 마음을 가진 용사의 아들일지라도 낙심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무리가 왕의 아버지는 영웅이요 그의 추종자들도 용사인 줄 앎이니이다

오늘 본문은 사무엘하 17장 1절에서 10절까지 말씀입니다.

오늘 제가 양육을 통하여 무엇보다도 우리들에게 좋은 추억이 생겼습니다. 더불어서 무엇보다 이 말씀 앞에 하나님이 저의 삶을 자꾸 추적하시고 추궁하시고 제 자신과 직면하게 하신 사건을 경험하게 됐는데요. 오늘 본문은 바로 그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압살롬이 다윗을 추적하는 장면입니다. 모든 사건의 발단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거 여러분 아시죠? 밧세바를 본 사건부터 시작되었다는 거죠.

제가 영어 성경을 읽다가 재밌는 걸 하나 발견했는데 알려드릴까요 말까요? 밧세바가 영어 성경에 보면 이런 스펠링이 나옵니다. BATHSHEBA. 제가 분석해보니까 배스(Bath)가 목욕이죠, 쉬(She)가 여인이죠, 바(Ba)가 봐예요. "목욕하는 여인을 봐" 이래가지고 다윗이 밧세바를 보는 순간 문제가 생겼다, 영어를 알아야 이게 이해가 되는 줄 압니다. 물론 성경적으로 밧세바의 이름은 "맹세의 딸"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다윗은 그 맹세의 딸을 범하고 우리아를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됐죠. 그 죄에 대해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이 징계를 말씀하셨는데, "너희 집안에 칼이 떠나지 아니할 것이다." 오늘 본문은 그 말씀이 그대로 지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압살롬이 다윗을 추적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추적이 지금 시작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추적자가 하나님이시다.

1. 추적자가 하나님이십니다

자, 1절을 한번 보시죠.

아히도벨이 또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사람 만 이천 명을 택하게 하소서 오늘 밤에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추적하여

압살롬과 아히도벨은 만 이천 명의 추격대를 꾸려 다윗을 잡으려고 하죠. 여기서 "추적하다"라고 하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라다프(רָדַף, radaph)"인데, 맹수가 먹잇감을 잡으려고 뛰어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보면서 다윗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자기가 당한 상황을 생각하면서 아마 30년 전에 자기의 삶하고 이렇게 매치가 됐을 겁니다. 30년 전만 해도 그는 골리앗을 돌로 눕힌 영웅이었고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지만, 곧장 사울이 그를 추격하고 쫓아다니는 삶으로, 그는 스타이면서 왕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사울의 스토킹을 당하게 되었어요. 사울에게 쫓기고 광야에 나가게 되고 사막에 처하게 되는 그의 위급한 상황, 그 시간 동안 그가 어떻게 했을까요?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고 울부짖고 애통하면서 그 눈물과 그 간절한 소원들이 시편 곳곳에 녹아나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게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아도 고난이 있다는 거죠. 그런데 오늘의 고난은 좀 사뭇 다릅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죄 때문에 오는 징계의 고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히도벨을 사용하셔서 다윗의 죄를 지금 추궁하고 계신 장면이죠. 밧세바와 우리아에게 저지른 이 범죄, 시간이 지난다고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자녀들 사이에 근친상간이 벌어지고, 형제가 형제를 죽이고, 그리고 자기 아버지를 죽이려는 이런 패륜까지 등장하고 있는가 보면, 다윗은 집안이 오늘날 표현하면 막장 드라마, 콩가루 집안이 된 거죠. 이게 하나님의 징계였다는 거죠.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각을 뜨시고 깨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다윗 안에 두 가지 감정이 생겼을 게 분명합니다. 하나는 죄책감이에요, 또 하나는 수치감이에요. 죄책감은 "나는 잘못했다"라는 거고, 수치감은 "나는 잘못 살았구나"라는 거예요. 다윗이 밧세바 사건을 통해서 나단 선지자의 말씀을 듣는 동안 죄책감이 생겼을 겁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자녀들의 비극을 보면서 수치감을 느꼈을 거예요. "내가 잘못 살았구나. 내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자녀들에게 신앙의 교육도 믿음도 본이 되지 못했겠구나."

저는 이번 양육을 받으면서 이 두 가지 모두를 경험했습니다. 말씀 앞에서 "내가 잘못했구나" 그런 죄책감이 생겨났고요. 동시에 "내가 정말 이런 사람이었구나." 말씀을 듣다 보니까 성도들이 저에게 지적하는 경우는 없거든요. 근데 양육을 받으면서 권사님의 지적을 당하니까 쉽지 않더라고요. '아 이거 사단의 역사인가, 대적의 영인가', 뭐 이런 생각도 들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저를 겸손하게 이렇게 낮추시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제가 어느새 제 자신을 보게 되면서 제가 종교적인 꼰대가 되어 있었다는 거예요.

담임목회를 시작하고 약 3년 정도 동안 교회 사역자가 없고 교회는 막 부흥하는 거고, 어떻게 합니까? 제가 아내에게 피곤해서 새벽기도 못 간다고 하면 "여보 당신이 새벽기도 반주를 안 하면 누가 반주를 해? 새벽기도 가야지" 하면서 힘들어하는 아내를 억지로 깨워 새벽기도를 또 가기도 하고, 또 저녁에 아내가 집에 가 빨리 쉬고 싶다고 그러면 "여보 당신이 심방을 안 가면 나 혼자 어떻게 심방을 가?" 이러면서 그렇게 아내를 채근했는데, 저는 그게 헌신인 거라고만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2년 전에 암 진단을 받고 나서 보니까 하나님께서 제 눈을 열어주셨어요. 그제야 회개하게 됐어요. 내가 여전히 열심히 하고 있는, 우리들교회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가 "집탕"이었다는 거죠. 제 죄를 하나도 보지 못하고 열심만 한 거예요. 그런 하나님이 계속 저를 추적하고 계셨다는 사실이죠.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 계신가요? "나는 교회를 오래 다녔고 나는 신앙의 직분도 받았고, 또 나는 이 교회 오래 다녔던 사람 중에서도 좋은 신앙의 선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요 우리는 점점 종교적 꼰대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선배와 꼰대의 차이를 알고 계십니까?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배는 후배가 물어본 것만 말하는 사람이고, 꼰대는 안 물어봐도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러자 후배가 말합니다. "선배님, 그런데 저 안 물어봤는데요." 여러분은 안 물어보셨지만 제가 오늘 하나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화살을 과녁에 맞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먼저 과녁을 향하여 화살을 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화살을 쏜 다음에 그 자리에 과녁을 그리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죄를 "화살이 과녁을 벗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과녁을 향하여 정중앙에 맞추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런데 종교적인 사람은 좀 다르더라고요. 화살을 먼저 쏘고 거기에 가서 과녁을 그리더라는 거죠. 다시 말해 죄를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말을 한다는 거죠. "어쩔 수가 없었어. 남들도 다 그렇게 하잖아.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 가족을 위해서는 그래야지. 내가 남에게 피해 준 것도 아닌데. 나도 사람인데. 내가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니는데." 혹시 이런 말을 여러분이 자주 하신다면 내 죄를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방어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이 안 들리는 것이다. 자기애가 큰 것이다.

진 에드워드가 《세 왕의 이야기》를 썼는데요, 그 책의 내용을 보면 말 그대로 사울, 다윗, 압살롬이 등장합니다. 결국 다윗과 주변 사람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책을 읽다 보면요, 나중에 알게 돼요. 한 사람의 이야기예요. 누굽니까? 다윗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다윗 안에 사울도 있고 압살롬도 있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다윗처럼 정말 멋있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고 신앙생활 열심히 한 사람이지만 내 안에 뭐가 있어요? 내 안에 사울도 있다는 거예요. 내 안에 압살롬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추적하고 계신 거예요.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고 회개시키고 구원하시고 살리려는 거죠. 시편 139편 7절에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결국 하나님이 다윗을 추적하는 것은 살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추적이었다는 겁니다.

기독교 변증가 C. S. 루이스도 《예기치 못한 기쁨》에서 이런 말을 하죠. "내가 가장 만나기 싫었던 그분이, 하나님이 한 걸음 한 걸음 내게 다가오셨다. 결국 나는 항복했고 하나님이 하나님되심을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 하나님이 추적하시면 항복하는 것이 은혜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추적하고 계세요. 낚시에 걸린 물고기를 바로 끌어올리지 않듯이 서서히 우리의 힘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계시는지도 모릅니다. 조금 더 도망가려면 멀리 가도록 풀어주고 계시죠. 그러나 하나님의 타이밍에, 하나님의 순간에 그 줄을 감아올릴 때, 여러분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적용 질문을 드립니다.

  •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고난은 말씀을 지키다가 받는 고난입니까, 아니면 죄의 결과로 오는 고난입니까?

  • 내 인생의 화살은 정말 하나님의 과녁을 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쏜 화살에 나중에 과녁을 그리고 있습니까?

  • 나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방어를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기반성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추적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우리가 안다면 그분은 단순히 추적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2.추적자가 인도하십니다

5절을 보면요

압살롬이 이르되 아랫사람 후새도 부르라

라고 합니다. 여기서 반전이 일어나죠. 후새는 사실 다윗이 미리 남겨둔 신복입니다. 압살롬 편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다윗을 돕는 사람이었지만 왕궁에 압살롬이 들어오자 "왕이여 만세" 하고 대환영을 하고, 여기에 사람이 금방 속는 거예요. "아 이 사람도 내 사람이구나" 그러니까 확 믿어버리죠. 후새가 압살롬의 신임을 얻은 뒤 계속 다윗에게 정보를 전해주는, 오늘날 말하면 스파이 같은 역할을 지금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뭘까요? 그게 기만이라고 하는 무기입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믿게 만드는 거예요. 사실은 그렇지 않은 거죠. 압살롬은 누구의 말을 듣습니까? 아히도벨의 말을 듣습니다. 또 후새의 말을 듣습니다. 사람의 의견을 듣죠.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께 물었다는 내용은 눈 씻고 찾아봐도 성경에는 없다는 거죠. 압살롬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사람은 많이 의지하는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다윗은 어떻습니까? 사무엘하 16장에 보면 시므이가 돌을 던지고 욕해도 억울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셨다. 하나님이 하도록 내버려 두라" 라고 얘기하죠. 왜 그렇습니까?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다루고 계시다는 것을 그가 알았던 겁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그가 바라본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사건이 하나님의 십계명의 율법대로 본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죽이지 않으셨어요. 나단 선지자를 보내 오히려 징계하시지만 그를 살려두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징계의 목적이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죠. 이게 하나님의 추적이에요.

여기에 아주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17장 1절에 "추적하다"는 단어를, 다윗이 자기가 고백했던 유명한 시편 23편 6절에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요.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여기서 "따르리니"입니다. 히브리어로 "라다프"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자,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따라간다." 여러분 신앙생활 그렇게 해왔을 거예요. 그런데 다윗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따라오신다." 도망가는 나를, 실패한 나를, 죄 가운데 있는 나를 끝까지 추적해서 찾아오시는 주님의 모습이죠. 여러분 이게 역설입니다.

주님이 왜 우리를 따라오실까요? 우리가 수많은 문제를 다 펼쳐놨다는 거예요. 주님이 수습하러 따라오시는 거예요. 돌보시러 따라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이 고백하잖아요. "여호와는 선하시다." 선하다는 게 하나님이 우리를 좋게 보시는 거예요. 나는 그렇지 않은데. 이게 그런 뜻이에요. 여러분 "인자"가 무슨 말인지 아세요? 하나님이 나를 그냥 조건 없이 불쌍히 여기시는 거예요. 자격도 없는데 끝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이죠.

그래서 우리가 꼭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모르면 내 인생이 해석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엄하신 분, 무서운 분, 혹독하게 하시는 분 아니죠. 하나님은 나를 붙드시는 분, 나를 좋게 보시는 분, 나를 지금도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 그래서 다윗을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그를 좋게 보시려고 은혜 베푸시려고 끝까지 따라오신 하나님의 모습.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요 우리의 자격을 보고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죄를 지어도 그분의 은혜가 더 큽니다. 내가 부족해도 그분의 은혜는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평생에 하나님의 은혜에 추적을 당하며 살았어요.

우리 김양재 목사님께서는 늘 이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100% 옳으신 분이기에 내게 온 어떤 사건도 우연이 아닙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다윗의 인생은 우연이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인생을 뒤따라온 것이죠. 결국 그 인생을 하나님은 끝까지 인도하신 겁니다.

여러분 종교개혁자 존 칼빈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이것을 저항할 수 없는 은혜다." 여러분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없습니다. 도망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붙잡게 된 것,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붙잡아 주신 것, 그래서 구원은요 꼭 이것과 같아요. 내가 여기 있고 하나님이 여기 계세요. 하나님과 손을 맞잡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손목을 잡으신 거예요. 내가 아무리 손을 놔도 하나님은 놓지 않는 것이 저항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선하시고 인자하시게, 우리를 추적하고 계시죠.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려고 구원하시려고 끝까지 따라오시는데.

여러분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또 성자다 이렇게 칭호를 받는 사람을 한 사람 꼽는다면, 성경과 버금가는 사람을 꼽는다면 어떤 교회사 인물이 생각나십니까? 대체적으로 교회의 많은 역사학자들은요 어거스틴을 꼽습니다. 어거스틴은요 5세기경 초대 교구인데요, 그는 그 당시에 마니교라는 이단에 빠져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되었고, 또 젊은 나이에 여인과 동거를 해서 사생아를 낳는 그 당시 보면 참 불순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당시가 다 기독교 배경이 한참 시작되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좀 알아가는가 봐요. 평소에 이런 기도를 잘했다고 합니다. "주님 저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그러나 오늘은 아닙니다." 혹시 그런 기도 드리는 분 계시나요? "제가 우리들교회에 왔습니다. 주여 이 시간 은혜를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오늘은 아닙니다." "우리들교회 열심히 다닙니다. 양육을 받겠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추적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를 끝까지 붙잡고 그를 회심시키고, 결국은 그는 초대 교회의 교부로서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되죠. 그런 그가 자신의 생애의 죄의 고백을 담은 책을 썼는데 그게 《고백록》입니다. 혹시 들어보셨어요? 제가 이 책을 읽다가 또 큐티인과 말씀을 묵상하다가 다시 이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다가 하나님이 한 부분에서 제가 멈추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들교회가 큐티인을 하고 간증을 하고 이렇게 고백을 하는지. 어거스틴이 이런 얘기를 했어요. 자기가 이 책을 왜 썼는지 설명을 합니다.

내가 과거의 죄를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 죄에서 떠나기 바라는 것이며, 변화된 삶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기 위함이라.

여러분 우리의 간증이 그렇게 사용될 줄 믿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내 죄를 숨기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증거하는 사람으로 바꾸고자 하나님은 우리를 오늘도 지금 추적하고 계신 거예요. 내 실패, 내 눈물, 내 회개가 누군가를 살리는 약재료가 될 수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인생에 고백록을 써가고 계시다는 거예요. 여러분의 인생에 고백록을 한번 들려보십시오. 여러분, 그것이 우리 삶에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 증거가 아닐까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있는 간증이 되고 살아있는 큐티인이 되고 살아있는 복음이 된다면, 여러분 많은 영혼이 우리를 통하여 죽음에서 돌아올 줄 믿습니다.

적용 질문 드립니다.

  • 지금 나는 무엇에 쫓기며 살고 있습니까? 돈입니까? 성공입니까? 자녀입니까? 건강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추적하고 있음을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 하나님께서 언젠가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사용하실 나의 고백록은 무엇입니까?

이 고백록을 써가도록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이런 고난이 닥치면 그냥 인도하시는 것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우리 삶에 말씀하시는데, 여러분 우리 삶에 그 순간에 기도를 하면요 그분이 기도에 응답을 하고 계시다는 거예요.

3. 추적자가 응답하십니다

자, 7절을 보면요.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번에는 아히도벨의 계략이 좋지 아니하니이다" 라고 등장하며 이야기합니다. 사실은요 아히도벨의 계략은 완벽했습니다. 만 이천 명을 데리고 다윗을 추적하는 것은 기습하면 그냥 끝나는 거예요. 전쟁이 길어지지 않습니다. 군사적으로 최고의 전략이지만, 그때 때마침 후새가 나서서 "이번 계략은 좋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후새는 설득합니다. "왕의 아버지는 전쟁에 능한 사람이고, 지금쯤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고, 섣불리 공격했다가 실패하면 백성들의 마음이 떠날 것입니다." 결국 압살롬은 후새의 말을 선택하죠.

겉으로 보면요 회의를 해서 결정한 상황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그 뒤에 하나님이 계셨다. 사람의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장면이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거죠. 이미 사무엘하 15장 31절에 다윗이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호와여 원하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막아달라고 기도를 했어요. 그래서 생각해보면 참 짧고 급한 기도였는데 하나님은 그 짧은 문장의 기도를, "여호와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얼마나 간절히 부르짖고 그럴 상황도 아니었을 것 같아요. 도망가고 있으니까. 지금 이 징계를 받고 있잖아요. 하나님께 혼나고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 또 기도를 해요. 사실 염치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들어주시옵소서."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차마 그렇게 못할 것 같아요. 그런데 다윗이 기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징계도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이에요. 회복도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가 없어요.

종교개혁자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이런 말을 해요. "사람은 스스로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행동을 자신의 뜻 가운데 주관하신다." 여러분 우리가 하는 말 실수, 연약함, 모든 걸요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얘기죠.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면 그분이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어거스틴이 어떻게 회심한지 아십니까? 어머니 모니카가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면서 눈물로 기도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모니카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하나님 우리 아들을 돌이켜 주옵소서, 살려 주옵소서." 하루 이틀이 아니었어요. 수년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외면하지 않고 결국 어거스틴이 돌아오게 되고, "눈물로 기도하는 자녀는 망하지 않는다"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그가 체험하게 된 겁니다. 눈물로 기도하는 자녀는 여러분 망하지 않습니다. 눈물로 기도하는 배우자는 버려지지 않습니다. 눈물로 기도하는 가정은 하나님께서 오늘도 붙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고난 가운데 있어도 징계 가운데 있어도 기도는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저에게 잊지 못할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사는 동네에 테니스 코트가 있는데 혼자 운동을 하다가 한국에서 온 한 청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 이야기를 이렇게 도란도란 시작을 했는데 그 청년은 "목사님 저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지금은 안 다닙니다. 목사님 저에게 어떤 얘기를 해도 저는 교회 안 갈 겁니다. 저는 교회에 대한 불만과 상처가 많습니다." 저는 그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형제님, 그래도 제가 목사니까 형제를 위해서 기도해드려도 될까요?" 놀랍게도 그는 기도를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기도를 했는데, 그 기도하는 순간 "하나님 아버지 이 영혼을 불쌍히 여겨주소서"라고 기도하는데요, 제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지더라고요. 말할 수 없는 성령의 탄식이었던 것 같아요. 그 후 그 청년을 보지 못했습니다. 한동안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이사를 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날 때마다 기도를 했어요. 근데 1년쯤 지났을 때 어느 주일 예배 시간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습니다. 바로 그 청년이었습니다. 너무 반가워 새가정 모임에 들어오게 하고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마스크를 쓰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때는 코로나도 끝난 기간이었기 때문에 "왜 마스크를 쓰고 있느냐?" 그 청년이 말하기를 "목사님, 제가 급성 백혈병에 걸렸습니다. 진단을 받아서 하나님께 항복하고 돌아왔습니다." 병은 너무 안타까웠지만 저는 그 영혼을 불쌍히 여겨주신 하나님께서 제 기도에 응답하셨다라고 저는 감사했습니다. 더 놀란 건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치료가 잘 되었고요. 완전한 완치 판정을 받게 되면서, 그 사이에 겨우 결혼을 하게 됐는데 불신 결혼이었어요. 그런데 남편이 아프니 아내도 따라 나오고, 그 사이에 아이도 태어났어요.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아내는요 세례를 받게 되었고 아이는 유아 세례를 받는, 가정의 구속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1년쯤 뒤에 그 어머니가 저희 교회에 방문하셨는데, 제가 어머니를 만나면서 "어머니, 아들이 교회에 나오신 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쭈었더니 그분은 권사님이셨어요. "목사님 저는 우리 아들이 죽기로 돌아오기를 매일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저는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고 계시는구나.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기억하고 계시는구나.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받아주고 계시는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누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까? 혹시 가족 가운데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이 계십니까? 자녀입니까? 배우자입니까? 부모님입니까?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오늘 응답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의 눈물을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때 응답하십니다. 치유의 은혜를 주시고, 회복의 은혜를 주시고, 무엇보다도 구원의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가정 살려주시고 우리 교회 살려주시고 우리 민족 살려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있기에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추적하고 계세요. 주님이 따라오실 때 붙잡히세요. 주님이 여러분 붙잡을 때 뿌리치지 마세요. 그리고 그분 앞에 안기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우리 인생 가운데 인도하십니다. "나는 기도할 줄 몰라. 하나님 나와 상관없지" 아니에요. 여러분 주님께 한마디라도 기도해보세요. 입을 열어 "도와주세요. 인도해주세요. 지켜주세요. 살려주세요. 고쳐주세요." 하나님은요 선하신 분이에요. 좋으신 분이에요. 여러분에게 인자를 베풀기를 원하세요. 그래서 하나님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 주실 겁니다. 다윗이 그랬고요, 어거스틴이 그랬고요,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똑같습니다. 저는 바랍니다. 끝까지 추적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우리를 끝까지 인도하실 것을 믿습니다.

적용 질문 드립니다.

  • 나는 고난을 만나면 먼저 하나님께 기도합니까? 아니면 사람의 도움만 바라보고 있습니까?

  • 우리 가정에 하나님의 구속사가 이루어지도록 나는 지금 누구를 위해, 어떤 눈물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