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말 들어주는 서비스가 있더라고요. 24시간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채팅 서비스가 있고 훈련된 경청자와 연결해 준다는 플랫폼도 있어요. AI도 그래요. 사람들이 왜 이렇게 AI에게 많이 물어요. 이제 정답을 빨리 얻으려고도 하지만 사실은 내 말을 끊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계속 들어주는 것 같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들이 요새 외롭지 않지요. AI가 있어서 뭐든지 물어보면 답해주니까. 근데 참 이상해요. 우리는 그렇게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을 찾으면서 정작 하나님 말씀을 잘 듣지 않아요. "내 말 좀 들어주세요" 하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튕겨낼 때가 많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세요. 오늘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이보다 더 큰 위로가 또 있겠습니까? 제가 그냥 이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나더라고요.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말을 들어주시는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하하하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말을 들으실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서 함께 생각해 보겠는데요.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는, 하나님이 그 말을 들으시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고요.
첫째, 함께 여호와께 묻습니다.
12절 13절 다시 한번 읽을게요.
왕이 제사장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 미가야의 아들 악볼과 서기관 사반과 왕의 시종 아사야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진노가 크도다.
지난주 요시야가 율법책의 말을 듣자마자 어떻게 했죠? 어떻게 했죠? 옷을 찢었어요.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이 이어지는데요. 요시야는 가장 신임하는 다섯 명, 오인방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이 다섯 명 중에 보니까 누구의 아들이 두 번이고, 시종이 한 번 나왔어요. 그래서 일단은 믿음의 부모가 너무 중요하구나, 그다음에 종의 자리, 이게 또 중요하구나. 그리고 대제사장 힐기야와 율법학자 말씀으로 이제 정리를 하고 이렇게 배치하고 있더라고요. 괜히 유명한 사람 되는 게 아니고.
그리고 오인방에게 어떤 명령을 내렸나요? 이 말씀에 대해 여호와께 물으라고 해요. 명령이라고 하면 보통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이런 거 아니에요? 자기 힘을 보여줄 수 있는 뭔가를 시키죠. 그런데 요시야가 시킨 것은 묻는 거예요. 왕이면 자기가 답을 내릴 수 있잖아요. 알건 모르건 자기가 답을 내릴 수 있잖아요. 자기가 정할 수 있어요. 그게 권력 아니에요? 법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요시야는 하나님께 질문하라고 해요. 하나님께 답을 구합니다. 세상 왕은 답을 정하지만 회개한 왕은 하나님께 묻습니다. 권력은 명령하게 하지만 회개는 질문하게 해요. 요시야는 지금 "내가 왕이다" 하지 않고, "하나님 제게 답이 없습니다" 하면서 엎드리는 거예요.
그런데 더 중요한 게 있어요. 누구를 위해 여호와께 물으라고 하지요?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물으라고 하는 거예요. 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왕이잖아요. "나를 위하여 물으라" 그래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공동체를 위하여 물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회개한 사람의 특징이에요. 요시야가 말씀을 듣고 회개했잖아요. 내가 100% 죄인인 것을 알면 비로소 가족과 지체와 이웃을 위하게 돼요. 왜 그렇습니까? "당신이 나보다 옳더군요" 나보다 옳도다 인정하기 때문이에요. 그동안 "내가 더 옳다, 나만 옳다" 외치며 그들의 마음을 찢기 바빴던 자기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큐티하며 하나님께 물으며 답을 구하는 것은 물론 내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해요. 그러나 하나님의 답은 우리 자신만 살리고 끝나는 게 아니에요. 한 사람이 회개하고 말씀이 들리면, 우리의 죄의 고백과 나눔은 나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대안입니다. 지금은 모르나, 희미하나 여러분들의 이 목장, 이런 모든 것들이 지금은 모르는 분들 많아요. 희미하지만 후일에는 확실히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그래요. "큐티해서 남주냐?" 맞아요. 큐티하면 남주는 거 맞습니다. 왜냐하면 예배가 너무 소중하니까. 목장, 주일 예배 소중하니까. 가정도 교회도 나라가 없으면 예배를 못 드리니까 저절로 이타적인 기도가 나오는 거예요.
요시야의 명령을 들은 다섯 사람은 그 명령을 이행합니다. 14절이에요.
이에 제사장 힐기야와 또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가 여선지 훌다에게로 나아가니 그는 할하스의 손자 디과의 아들로서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주하였더라 그들이 그와 더불어 말하며.
14절은 너무 중요합니다. 그래서 다섯 사람의 이름을 조금 전에 언급했는데 똑같이 한 절 뒤에 똑같이 또 기록을 하는 거예요. 강조하는 거예요. 이 다섯 명이 왕의 명령을 함께 들었고 그것을 함께 수행했다는 걸 강조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다섯 명이 얼마나 중요하며, 이렇게 이 중요한 성경에 이 이름을 두 번이나 언급했을까(12, 14절). 그래서 제가 이름의 뜻을 좀 살펴봤는데, 힐기야는 "여호와의 분깃"이에요. 여기 14절에는 부모 이름이 빠졌어요. 개인으로만 언급을 했어요. 아히감은 "나의 형제가 도움을 준다", 아사야는 "여호와께서 만드셨다"는 뜻인데요. 악볼은 "들쥐"고, 사반은 "너구리"고, 훌다는 "두더지"라는 뜻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게 이름으로 생각을 해봤어요. 사람은 두더지 같고, 들쥐 같고, 너구리 같고, 평범하고 형제 같고 형편없지만 여호와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여호와의 분깃이요, 형제가 도움을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가 이 오인방의 이름의 뜻에서도 구속사가 나타나더라고요. 천국에서는 똑같이 만날 것인데, '요시야가 사람을 구원의 관점에서 차별하지 않고 등용했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 차별 없는 환경의 오인방이 이 땅에서 또다시 차별받을 만한 여선지 훌다에게 물으러 간 거예요. 당시엔 예레미야 선지자도 있었고 스바냐 선지자도 있었어요. 중요한 것은 왕도, 제사장도, 서기관도,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이면 다 함께 물으러 가야 한다는 가치관이 그들에게 함께 있었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 당시 훌다를 찾았다는 것은 중요한 메시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훌다는 이곳에서만 딱 등장을 해요. 그런데 14절에 남편이 나왔잖아요. 남편인 살룸은 오인방에게서도 언급되지 않았던 믿음의 3대가 14절에 오인방과 같이 나오는데 살룸만 3대의 조상이 언급이 되는 거예요. 할아버지 할하스는 "빛나는" 이라는 뜻이고, 아버지 디과는 "희망"이라는 뜻이고, 살룸은 "보상"이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직책은 예복 담당이었어요. 그런데 살룸의 직책이 열왕기하 10장 22절에 나오는 같은 예복이라도 바알의 예복 맡은 자의 직책과는 아주 비교가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 집은 독실한 집안으로 추정이 되요, 그건 맞는데. 그런데 이들이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살았다고 그래요. 우리는 또 행간을 생각해 봐야 되는 거예요. 다윗-솔로몬 시대에, 예루살렘이 첫째 구역이라면, 이곳은 BC 722년에 북이스라엘이 망하고 남유다로 내려온 수많은 피난민으로 인해 히스기야가 그냥 북쪽에 급하게 성벽을 쌓아서 신시가지를 형성한 곳이에요. 우리가 625 전쟁 때 이북에서 얼마나 많이 내려왔어요. 그런데 그때는 예수가 있어가지고 그 북쪽의 사람들을 남쪽이 지금처럼 탈북자로 보지를 않았어요. 제가 38따라지 아니에요? 그런데 남쪽이 북쪽 사람을 차별했다 이런 거를 느끼지 못했어요. 그래서 한국이 축복을 받았다는 거예요.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을. 그런데 그때는 다 같이 못 사니까 그게 가능했어요. 다 같이 못 살면 우리가 형제예요. 그런데 우리가 부자면 탈북민이에요. 참 그렇더라고요. 그러니까 열왕기하 20장 4절에 보면
이사야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처럼 그 당시 둘째 구역은 수도가 아니고 변두리에 속하고 난민촌에 가깝지만, 그 예복 담당은 아주 비천한 신분은 아니지만 왕실의 관리계층으로 그곳에도 공무원이 살아야 되잖아요. 난민촌에도 밑에 있으니까 살았다고 보여져요. 또 그러니 예복 담당은 대제사장 직속이에요. 왕에게 예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사원이 어떻게 사령관에게 저기를 하겠어요. 그러나 또 옷을 만지니까 왕과 직접 아뢸 수 있는 기회도 있었겠죠. 그러니까 나만 준비가 되면 어떤 형편이라도 이렇게 행운의 직책이라고 볼 수가 있어요. 우리가 나만 준비되면, 기현이가 이렇게 말씀으로 준비되는 거, 이거 굉장한 일입니다. 우리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모르잖아요.
결국 이 오인방이 살룸의 아내를 찾아왔잖아요. 찾아왔어요. 이런 곳에 오인방이 찾아온 거예요. 이 난민촌에 찾아온 거예요. 결국 이 이름으로 다시 한번 해석을 해보면, 결국 빛나는 할하스 할아버지의 이 신앙으로 디과 아버지의 희망을 가지고 살다 보니까, 우리 훌다가 두더지라고 그랬잖아요. 두더지 같은 아내의 훌다를 주셔가지고 살룸에게 최고의 보상이 주어져서 찬란하게 성경에 언급이 되는 가문이 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요시야의 명령을 따라 함께 물으러 가는 사람들은 그냥 심부름꾼이 아니었어요. 함께 말씀 앞에 섰던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훌다가 어떻게 했다고 해요. 더불어 말하며. 함께 말씀으로 나누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특출해서가 아니라 왕의 명령에 복종해서 갔기에 말씀을 함께 묻고 함께 들은 그 자리가 나중에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는 자리로 이어진 거라는 거죠.
자, 어떻게 이어졌을까요. 대제사장 힐기야는 율법책을 발견한 사람이고요. 서기관 사반은 그 책을 읽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사반의 아들 아히감은 나중에 예레미야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구해주었어요. 그 아들은 바로 유다 멸망 후에 바벨론이 그 지역 총독으로 세운 그달리야예요. 그는 남은 백성이 그 땅을 떠나지 않고 살아가도록 이끌었어요. 그래서 그게 하나님의 뜻이었어요. 그러니까 사반의 집안이 이렇게 두고두고 말씀의 역사와 연결이 되고 있는 거예요. 서기관 사반이 그 가치를 제대로 모른 채 읽기만 한 것으로 시작된 말씀의 회복이 아들 손자에게 이어진 거예요.
오늘 오인방 중에 아사야는 이곳만 등장해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자였어요. 이런 사람도 있고 이런 사람도 있지만, 두더지 같은 훌다도 있고 들쥐 같은 악볼도 있고 이렇지만, 이 오인방은 역사에 남을 오인방이 된 거예요. 저는 큐티하는 이 공동체에서 역사에 남을 지도자들이 나올 줄 믿습니다. 아멘! 제가 예언을 합니다. 훌다의 예언을 듣고 행한 요시야가 성경 전체의 성군이 되었잖아요. 할렐루야!
제가 예언했어요. 왜죠? 훌다는요 평범한 아낙이고 예복 만드는 양복기술자 부인이에요. 근데 훌다는 아내의 역할이 먼저였기에 이렇게 남편의 직업부터 언급이 됐고, 훌다에 대해서 나온 게 없어요. 그냥 훌다는 이 두더지라는 뜻인데, 집에서 자기 역할만 잘하고 있어도 얼마든지 살룸의 아내로 생명책에 이름이 오르고 주의 일에 쓰임받을 수 있는 걸 보여줍니다. 이 성경 전체의 성군인 요시야가 대선지자 예레미야를 제치고 물어본 여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드보라, 미리암을 제치고 구약의 최고의 여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여성 안수를 주고 안 주고를 떠나서 복음을 전하는 데는요 아무도 차별이 없어요. 이런 데는 이제 성차별이 없는 거예요. 알았어요. 내가 복음을 전하는데 자기의 권익을 주장하려고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성경의 질서를 지켜야 돼요. 여성이라는 역할을 주셨으면 순종해야 되는 거예요. 여자의 머리가 남자이기 때문이에요. 남자와 비교하고 남자 위에 군림하려고 하면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거예요. 훌다의 적용이 "집에서는 남자 살리고, 교계에서는 남자 목사 살리자"가 주제니까, 훌다 옆에 오인방도 남자고 요시야도 남자고 근데 다 살려냈잖아요. 이것이 우리들교회 구속사 큐티 목회의 근간이에요. 남자가 살아야 여자가 사는 것이고 가정이 살아납니다. 왜냐? 남자가 머리기 때문이에요. 그렇다고 여자가 열등하다는 것은 아니다. 역할을 어기려고 하면 안 되요. 잘나고 못나고 머리기 때문이에요. 집에 머리가 둘이면, 뱀이 머리가 둘인 밤이 있었다고 그러잖아요. 금세 죽었다고 그래요. 연약해도 질서를 무시하면 그 가정과 그 조직은 살 수가 없어요. 요즘 이런 말을 듣지 못하니까 이 젊은 세대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합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 아이들 전도에서 가치관을 넣어줘야 돼요. 그래야 그 가정이 살고 나라가 사는 줄 믿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드보라, 미리암, 훌다 선지자 여성 세 명 있는데 드보라도 남편에게 순종을 했더니 이제 제사장, 선지자 되게 했는데 1만 명을 동원할 수 있는 군대장관 바락이 받쳐 주었잖아요. 남편한테 순종하면 딴 데서 돕는 거예요. 근데 히브리서에는 드보라를 도운 바락이 믿음장에 올라갔어요. 드보라가 올라가지 않았어요. 바락이 올라갔어요. 훌다도 살룸에게 순종했더니 요시야가 인정을 해주고 도리어 요시야가 성군으로 꼽히고 있어요. 우리는 사라가 유명해도 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해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사라와 리브가와 레아의 하나님이라고 안 그래요. 이렇게 질서에 순종한 드보라, 훌다를 인정한 바락과 요시야를 하나님은 도리어 더 높이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남자를 살려야 돼요. 남자들은 상사를 살리고 회사를 살려야 돼요. 이게 질서예요.
자, 여성 선지자 중에 세 명 중에 미리암은 최초로 여선지자 칭호를 받았지만 리더십, 또 가족, 모세를 비방해가지고 나병이 걸렸잖아요. 그러니까 그러므로 이 땅에서 위대한 것은 역할이고 질서예요. 능력대로 사는 회사, 가정은 지옥이예요. 요시야가 보낸 오인방이 이런 훌다와 더불어 말한 거예요. 훌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지만 높고 낮음이 없이 모두 요시야와 같은 반열에 다 올라간 거예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여러분, 진짜 묻는다는 건 뭐예요? 내가 모른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마음으로 묻는 거예요. 원하는 답을 이미 정해놓고 묻는 건 진짜 묻는 게 아니에요. 큐티도 그래요. 내 답을 정해놓고 말씀으로 확인받는 게 큐티가 아니에요. 내가 모르는 것, 내가 틀린 것을 인정하고 진짜 정답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게 큐티예요. Question Time이예요. 근데 우리가 혼자 있으면 어떻게 이런 묻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겠어요? 혼자 있으면 내가 옳다는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려서부터 함께하는 지체가 필요한 거예요. 목장 괜히 가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 혼자 질문하기 전에 함께 질문해야 돼요. 함께하는 것 자체가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 되는 거예요. 함께 물을 때 진짜 묻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고 진짜 듣는 마음이 준비되는 거예요. 이렇게 함께 여호와께 묻는 사람의 말을 하나님이 들어주십니다. 이럴 때 힐기야 오인방과 훌다의 구속사의 공동체는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네 말을 들었다 하려면 이런 공동체가 절대적인 것, 그것도 구속사 공동체가 중요한 거예요.
적용 질문이에요.
내가 요즘 가장 많이 묻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인터넷? AI?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물었던 적은 언제인가요?
함께 여호와께 묻는 지체가 있습니까? 사람을 차별해 가면서 묻지 않나요?
기도제목이 나를 위한 것입니까? 가정, 교회, 나라를 위한 것입니까?
이게 지난주 부부목장 나눔이에요. 목사님 설교 중에 법이라는 단어가 들리면서 차별금지법 기도 요청이 생각났어요. 그때는 그게 맞나 싶었거든요.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의 하나님인데 성소수자를 죄인으로 보실까, 아니면 사랑하는 자녀로 보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음지에서 티도 못 내고 하나님 믿는 성소수자들도 있을 텐데 그분들의 고난은 더 클 것 같고, 기도하면서 왜 저는 이런 존재로 태어났나? 라고 하는 분들도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여러 교단들이 동성애에 대해 입장이 조금씩 다르더라고요. 사귀는 것까지는 괜찮다, 결혼까지는 괜찮다, 관계 자체는 안 된다 등 다양한데 목사님이 그 법을 반대하게 해달라고 하셨을 때 그게 맞는 말씀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이게 40, 50대에 나오는 부부 목장의 나눔인데 기록을 안 했는지, 무서운지 목자님이 피드백을 안 하셨더라고요. 우리 이렇게, 제가 동성애자들 사랑하죠. 내 자녀 사랑해요. 그런데 성경에는 동성애는 죄라고 써있잖아요. 그리고 인구절벽 시대에 그냥 다른 거 다 떠나서 낙태와 동성애가, 동성애는 생명이 끊어지기 때문에 그냥 이 나라가 없어지기 때문에 다른 거 다 떠나서 이건 정치도 아니고. 그래서 온 교회가 기도하는 거는 다음 세대를 위함이잖아요. 그런데 그러니까 아까 기현이가 말씀이 너무 어려워서 게임만 했다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어려운 사람은 여기 와서 맨날 게임만 하시고 주식시장만 보시고 그러시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어렸을 때 도우니까 들리기 시작하지 않아요. 다음 세대를 위함인데 잘 모르겠다고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말씀이 들리는 거는,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해야 들리는지 모르겠어요.
하나님이 그 말을 들으시는 사람은 첫째 함께 여호와께 묻는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둘째는 장차 내릴 재앙을 들어요.
둘째, 장차 내릴 재앙을 듣습니다.
물었으니까 하나님이 장차 내릴 재앙을 말씀하시니까 들어요. 잘 묻는 사람은 재앙의 얘기를 잘 들어요. 15절에서 17절입니다.
훌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곳과 그 주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이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하리니 이는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들의 손의 모든 행위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곳을 향하여 내린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여러분, 요시야가 그렇게 옷을 찢고 그렇게 간절히 물었잖아요.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뭡니까? 재앙이에요. 진노예요. 누구의 진노죠? 하나님의 진노예요. 하나님이 내리실 재앙이에요. 훌다는 지금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할 뿐이에요. 하나님은 이 재앙을 요시야가 읽은 그 율법책에 기록된 말씀대로 내리겠다고 하세요. 그러니까 모세 때 기록된 그 율법책은 그냥 역사책이 아닌 거예요. 모세가 신명기 설교를 할 때도, 그것이 처음 기록된 때도, 이제 다시 발견돼 요시야 귀에 들렸을 때도, 지금 훌다 선지자가 예언을 할 때도 그 율법책은 똑같이 살아있고 활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늘 이루어지는 거예요. 성경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왜 재앙입니까? 그건 우연이 아니에요. 하나님 뭐라고 하세요? 이 백성이 나를 버렸기 때문이라고 하세요. 잘 보세요. 조상이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여기에 있는 이 백성이 문제예요. 이 백성이 다른 신에게 분향했기 때문이라고 하세요. 이 백성이 그들의 모든 행위로 나를 격노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하세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인데 그들이 그 자리를 버리고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시겠다고 하신 거예요.
우리가 얼마 전에도 읽었지만 이 재앙을 내리겠다는 표현은 딱 세 명의 왕에게만 쓰였어요.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과 아합과 남유다의 55년 집권한 므낫세예요. 그러니까 북이스라엘, 남유다의 악한 왕이 똑같이 있어요. 믿는다고 악한 사람이 없는 게 아니에요. 더 악할 수도 있어요. 행위를 보면 그래요. 다윗과 반대되는 가장 악한 왕들이에요. 그런데 이런 재앙이 이제 옷을 찢는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 물은 요시야에게도 이 재앙이 선언되는 거예요. 그것도 이번엔 그 진노가 꺼지지 않으리라 하시며 지울 수 없는 마침표를 딱 찍으십니다. 뭐라고요? "재앙은 반드시 임할 거예요. 확정이에요. 돌이킬 수 없어요" 이러는 거예요.
요시야는 이렇게 장차 반드시 임할 재앙에 관한 말씀을 들었어요. 이미 율법책에서 읽은 재앙입니다. 그것에 대해 어찌할 바를 모르니 하나님께 물었어요. 답 주시기를 기대했을 겁니다. 그런데 돌아온 답이 뭐였어요? "답이 없다. 재앙은 온다. 못 돌이킨다. 못 피한다" 이것이 요시야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에요. 그럼 옷을 찢는 회개를 한 요시야라도 이 말씀 듣기가 어려웠을 것 같아요. 절망 가운데 하나님께 묻는 것이 더 절망하기 위한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도 절망에서는 벗어날 해결책을 기대하면서 말씀도 보고 기도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요시야도 마찬가지였겠죠. 그런데 이 절망에 마침표를 찍어주시니 너무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만이 100% 옳으세요. 이걸 인정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것이라도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을 수가 있어요. 반대로 응답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말씀이 있다면, 그건 내가 아직 하나님이 100% 옳으시다는 고백을 못하는 거예요. 믿음의 분량만큼만 들을 수가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봅시다. 하나님은 왜 요시야에게 이 장차 임할 재앙을 말씀해 주실까요? 하나님은 침묵하실 수도 있었어요. 또 위로와 소망의 말씀만 주실 수도 있었어요. 요시야 보세요. 사실 아버지가 2년 만에 살해당했잖아요. 얼마나 불쌍해요. 그런데 그걸 또 종교개혁을 했으니까 얼마나 가상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네가 너무 가상하구나" 이렇게 하지 않으셨어요. 요시야의 감정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백성의 생명이고, 그보다도 더더욱 중요한 게 구원이기 때문이에요. 응답은 하나님의 뜻 그대로 알려주시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답이 응답이 아니에요. 많은 경우, 아니 대부분의 경우에 내가 원하는 답은 오답이에요. 사실과 달라요. 구원과 반대예요.
우리는 합격을 응답으로 받기를 바라요. 성공의 소식을 듣기를 바라요. 그런데 그다음이 뭐예요? 하나님 없이 합격하고 성공하면 결국 내가 하나님 되는 거예요. 구원의 길을 멀리 멀리 떠나고 말아요. 예외가 거의 없다고 보면 돼요. 하지만 반대로 내가 원치 않던 불합격과 실패의 소식을 들으면 어떻습니까? 이 땅에서 기댈 것이 없어질수록 하나님을 찾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돼요. 그렇다고 목사님 그렇게 합격을 그렇게 얘기하시면 되겠어요? 그러니까 합격하기 전에 우리는 말씀을 넣어줘야 되는 거예요. 합격하기 전에 진짜 말씀도 없는데 붙었으면 여러분은 3일 금식하셔야 돼요. 붙었다고 이루고 환호하지 마시고, 얘가 믿음도 하나도 없고 교회도 안 갔는데 글쎄 학교를 붙었어요, 이렇게 슬퍼하셔야 돼요. 어떻게 하죠? 우리 아이의 장래를 생각하니까 이게 큰일 났어요. 우리 언어가 이게 구속사 언어예요.
그렇다면 뭐가 진짜 응답입니까?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뜻하시는 구원이 진짜 응답인 거예요. 구원을 위해서 지금 불합격이 필요하면 불합격이 응답이고요. 실패가 지금 나를 구원으로 이끄는 끈이라면 실패가 응답이에요. 지난주 선거도 그렇죠. 당선된 사람보다 낙선한 사람이 훨씬 많아요. 당선이 상 같아요? 교만해지면 그 당선이 벌이에요. 낙선이 벌 같아요? 하나님께 돌아오면 그 낙선이 상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듣기 싫은 말씀, 무서운 말씀도 "아멘!" 하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장차 내릴 재앙을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해요.
여러분, 복음이 뭐예요? 장차 받을 환란을 미리 듣는 거예요. 데살로니가전서 3장 4절을 보면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미리 들었으니까 환란이 와도 요동치 않는 거예요. 여러분, 미리 미리 큐티하는 게 얼마나 파워풀한 건지 아세요? 예방주사예요. 예방주사를 맞는 것과 안 맞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잖아요. 조금 아프죠. 예방주사. 이게 큐티예요. Question Time. 장차의 환란을 미리 듣는 것 자체가 복음이에요.
요시야가 지금 딱 이래요. 재앙을 미리 들었어요. 들으면 그 재앙이 와도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그 말씀 앞에서 옷을 찢으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개혁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 어떤 말씀도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특히 장차의 말, 재앙의 말씀도 주님의 응답으로 들으시기를 축복해요. 왜냐하면 바로 이런 사람의 기도를 주님이 들으신다고 그러시잖아요. 재앙의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의 기도를,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이러시잖아요. 재앙의 말씀을 잘 들어야 돼요.
적용 질문이에요.
장차 내릴 재앙이 듣기 싫어 주님을 멀리했던 적이 있습니까?
그것을 회개하고 돌이켰나요, 후회만 하고 있나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까?
하나님만이 100프로 옳으시다는 고백에 얼마나 아멘 할 수 있습니까?
40년 큐티 사역을 하면서 제 설교가 어렵다고, 왜 맨날 십자가만 얘기하냐, 목사님은 위로 좀 안 해주냐, 그래서 떠나는 사람은 다 그렇게 해서 떠나요. 안 들리니까. 꼭 어린아이한테 "사탕 줘" 그러는데 안 돼요. 이빨 썩어요. 떠날 거야. 이러는 거예요. 이혼하지 말라 그러는데 딴 목사님이 이혼하라고 그러시대요. 이렇게 해서 또 이혼을 또 하라는 데를 가고. 그래서 많이 많이 많이 슬픈 일이 너무 많았어요.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혼 말리는 것만 해도 이 정치 싸움보다 더 어려운 게 이혼 말리는 거예요. 양편으로 갈라져가지고. 찬성 반대. 생명이잖아요. 그죠?
정말 이게 모두,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그럼 하나님이 그 말을 들으시는 사람이 있다고 그랬잖아요. 그 사람은 첫째 하나님께 묻는다고 그랬어요. 오늘 기현이가 자기가 말씀이 들리니까 그렇게 목사님이 그냥 반복 반복해서 이 중요한 거는 또 중요해서 그렇게 설명해 주시니까 그때부터 알아듣잖아요. 청년들이 저렇게 알아듣는다는데 근데 여러분은 왜 이렇게 안 들린다고 그래요? 아직 때가 안 돼가지고. 두 번째, 함께 물으면 장차 내릴 재앙을 잘 들어요. 이 재앙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게 실력이에요. 이게 영성이에요.
그러면 세 번째는, 하나님이 들으셨잖아요. 그죠? 나도 네 말을 들었다. 들으시면 평안한 거예요. 인생이. 평안한 거예요. 그런데 이런 과정 없이 성공하고 합격하면 평안이 없어요. 평안이. 그러니까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를 하면 내가 평안한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평안하지 못하면 세상 것만 바라고 있기 때문에 평안하지 못한 거예요. 세상 기도 제목만 바라고 있기 때문에 평안하지 못한 거예요.
셋째, 하나님이 들으시니 평안합니다.
18절, 19절입니다.
너희를 보내 여호와께 묻게 한 유다 왕에게는 너희가 이렇게 말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들은 말들에 대하여는 내가 이곳과 그 주민에게 대하여 빈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여호와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옷을 찢었다 해서 통곡이 더 들어갔죠. 통곡에 의해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이런 과정으로 하나님도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요시야를 뭐라고 부르십니까? 유다 왕이라고 부르세요. 앞서 15절에서는 그냥 훌다가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요시야를, 요시야 왕을 훌다가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 앞에서 하신 말씀은 유다 전체에 내리실 재앙의 말씀이기 때문에 요시야도 백성 중에 한 사람, 원 오브 뎀인 거예요. 특별할 게 없어요.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요시야를 유다 왕이라고 하세요. 그를 높이세요. 그리고 특별한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무슨 말씀이세요? 제일 먼저 말씀하시는 게 놀랍게도 네가 들었다는 거예요. 이곳과 그 주민에 대하여 빈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 이 재앙의 말을, 이 듣기 힘든 말, 듣기 싫은 말을 네가 듣고. 요시야가 잘 들었다는 거예요. 이것을 하나님이 인정하신 거예요. 내가 잘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하나님이 다 아세요. 그러니까 내가 암이 걸려서 죽을 것 같고, 그게 아니고 이게 있어야 될 일이 왔어요. 하나님은 100% 옳으시잖아요. 이거 잘 듣고 내가 들었다는 걸 하나님이 인정하셨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 재앙의 말을 잘 듣고 인정하면 여러분들에게 직분이 주어지는 거예요. 우린 딴 게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승진하고 잘 살고 합격했다고 주어지는 게 아니고, 이 재앙을 어떻게 여러분들이 해석하고 해결하는 이게 실력이에요. 이게 영적 실력이에요. 그래서 저분이 힘들 때 어떻게 저걸 해석하나, 하나님이 인정하셨잖아요.
그리고 들었으니까 마음이 부드러워졌어요. 마음이 부드러워진 걸 또 인정하셨어요. 딱딱하게 굳어있던 마음이 저주의 얘기를 듣고 말씀 앞에서 녹았어요. 강한 마음이 아니라 약한 마음이에요. 힘 빠진 마음이에요. 똑같은 말씀을 듣고도 어떤 사람은 돌처럼 튕겨내고 요시야는 스펀지처럼 빨아들였어요. 같은 말씀인데 마음이 다른 거예요.
다윗도 사울이 그렇게도 괴롭히니까 사울을 죽여야 할 것 같지만 기름 부음 받은 왕이기 때문에 죽이지 않았잖아요. 근데 이때 내 편인 요압이 너무 잘하는데 야망으로 가득 차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도 죽이니까, 요압은 내 편이잖아요. 사울은 나의 원수예요. 그런데 내 편 같지만 요압과 구속사의 가치관이 끝이 다른 거예요. 지금. 이거 여러분들 어떻게 해석하겠어요. 그러니까 사무엘하 3장 39절에 보면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자기 편인데 이렇게 기도를 해요. 그러니까 소위 내 편인 요압을 설득할 수가 없는 거예요. 다윗이. 왜냐하면 너무 일을 잘하니까. 그리고 다윗의 약점을 쥐게 되잖아요. 그렇죠? 그냥 우리아의 아내를 이렇게, 우리아를 죽임으로써 이제 다윗은 요압에게 끌려다니는 거예요. 일평생 끌려다녀요. 살아있을 때 요압을 못 죽였어요.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우리 인생에도 다 있어요. 그 한 사람이 다윗을 또 다윗되게 했다고 볼 수가 있는데. 그럼 사울이 기름 부음 받았다는 게 뭔가, 그게 바로 예수 믿는 걸 말하며 즉 구원을 위해 참기도 하고 나가기도 해야 하는데, 이제 믿음의 분량이 다 다르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근데 요압은 자기가 야망이 있다는 걸 자기도 몰라요. 그냥 그 사람은 야망 자체이기 때문에 너무 일 잘하는 임원이잖아요. 지금 요압은. 회사의 유익을 구하기 위해서 그냥 불철주야 나가는데 하나님만 몰라요. 근데 다윗에게 너무 도움이 돼요. 그러니까 이제 우리가 일평생 이 다윗이 암몬의 도움을 받으면 안 되지만 사울이 너무 죽이려고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도움을 받았잖아요. 그래서 그걸 조문객을 보냈더니만 그냥 완전히 엉덩이까지 옷을 다 찢어버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게 아니고 다윗이 암몬의 도움을 받으면 안 되는데 받았어요. 왜냐하면 하나님, 내가 사울이 날 죽이려고 그러니까 이 도움을 좀 받아야 되겠어, 이렇게 우리가 그냥 타협하는 게 너무 많은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건 하나님 100% 옳으시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사무엘을 읽어가니까 우리만 이거 알아들을 수 있어요. 그죠? 몰라요? 그러니까 내 설교가 어렵지. 그죠? 한 사람만 알아들으면 그 사람이 다 해석해 줄 거예요. 할렐루야.
그러니까 다윗도 내가 약하다고 했어요. 내가 약하여서 저들을 제어하기가 어렵다고. 요압을 제어하기가 어렵다고. 오늘 요시야도 그냥 어떻게 합니까? 여호와 앞에서 겸비합니다. 낮은 자리에 서는 거예요. 자신이 지금까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서려 했는지, 얼마나 자기 주제를 파악하지 못했었는지 깨닫고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고백하는 거예요. 이 마음으로 옷을 찢는 거예요. 오늘 이런 회개로 통곡까지 하는 거예요, 요시야가. 마음이 약해지고 스스로 낮아지고 옷을 찢으며 통곡하는 거. 세상에선 이런 것을 실패자, 루저라고 해요. 이렇게 안 되려고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 몰라요. 내 자식이 이렇게 되지 않게 하려고 내 모든 걸 불사르면서 아이들을 몰아세웁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은 오히려 이런 루저 같은 모습을 칭찬하세요. 요시야의 업적, 성품 이런 거 칭찬하시지 않아요. 하나님의 칭찬은 말씀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있어요. 말씀을 들은 거 칭찬하세요. 말씀을 듣고 '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빈털터리구나. 빈터구나. 내세울 게 하나도 없구나' 를 깨달은 거 그걸 칭찬하세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거를 칭찬하세요. 하나님이 높이시는 사람은 회개하지 않는 승리자가 아니고요. 회개하는 패배자인 거예요. 세상에선 승리와 패배가 전부잖아요. 그러나 하나님께는 패배도 승리도 중요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승리는 회개인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요시야에게 하나님이 엄청난 상을 내리시는데요. 무엇입니까?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인 줄 믿습니다.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잘 보세요. 과거에 들었었다도 아니고 미래에 들어갈 것이다도 아니에요. 이미 들어서 지금 다 알고 있다는 거예요. 한 번 들으신 분이 앞으로도 또 들으실 거예요. 이미 들으셨고 또 들으십니다. 누가요? 하나님이. 하나님이 내 말을, 내 생각을, 내 형편과 상황을, 내 마음을, 내 슬픔과 눈물을, 내 회개를 이미 들어서 알고 계시다고 해요. 여러분, 이런 위로가 또 있겠습니까?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도 하나님 한 분이 들으셨으면 되는 거예요.
시편 116편 1-2절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심으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사랑과 기도, 이것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붙들고 의지하는 마음이에요. 왜 이런 마음이 생겼어요? 하나님이 들으시기 때문에, 귀 기울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게 된 거예요. 세상에 내 말 들어주는 사람, 내게 귀 기울여주는 사람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의지할 거예요. 근데 남편이 나를 너무 사랑해주고 아내가 나를 너무 아껴주면 우리 눈은 하나님을 향할 필요가 없을 거예요. 세상에서 상을 다 받으면 하늘에서 받을 상을 기대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럴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러나 이 땅에서 오직 주님만이 내 말을 들어주시고 주님만이 내 편으로 귀를 기울여 주시기 때문에 오늘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기도할 수 있는 거예요. 하루를 살아낼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 주님이 우리 말을 들어주신 줄 믿습니다.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천국 가는 그날까지 주님이 우리 말을 들어주신 줄 믿어요.
결론이 뭡니까? 20절에.
그러므로 보라 내가 너로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 눈이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사자들이 왕에게 보고하니라.
하나님이 말을 들으셨어요. 그러므로 봐야 할 게 뭐예요? 평안이에요. 참으로 재앙이 장차 임하기로 작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평안하리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이예요. 히스기야도 요시야도 내가 사는 날 동안에 태평이 있고 평안이 있다고 하는 말이 이 말 아닐까요?
평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힌트를 주시는데요. 모든 재앙을 내 눈이 보지 못하리라. 재앙을 보게 하시는 분도 보지 못하게 하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이세요. 그러니까 평안은 상황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상황만 보여서 힘들지만요. 상황이 아무리 좋아도 하나님이 재앙을 보게 하시면 평안이 없어요. 상황이 아무리 나빠도 하나님이 재앙을 보지 못하게 하시면 평안한 거예요. 문제 없는 게 평안이 아니에요. 오히려 많은 문제 때문에 하나님께 피하면 그게 평안인 거예요. 반대로 문제가 하나도 없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평안이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진정한 평안, 샬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통하는 거예요. 하나님께 물을 수 있는 것,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 그리고 하나님도 내 말을 들어주시는 것. 바로 이렇게 하나님과 통하는 것, 막힘없이 교통하는 것이 샬롬입니다. 막힘없이 교통하는 것이 샬롬입니다. 이 통함을 열어주신 분이 누구세요? 우리는 아니에요. 우리는 오히려 통하지 못하게 막은 죄인, 장본인이에요. 유다 백성처럼 택자 하면서 하나님을 등지고 귀를 막고 듣지 않는 게 바로 우리 자신인 거예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통하게 해주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세요. 주님이 우리의 화평, 우리의 샬롬이십니다. 주님이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로 만드셨어요. 원수 된 것,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무너뜨리셨어요.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면 하나님께 물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그 화평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이 샬롬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다시 한번 임하길 축복합니다.
적용 질문이에요.
말씀 앞에서 내 마음은 부드럽습니까, 딱딱합니까?
요즘 내가 구하는 평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얼마나 통합니까?
기도로 주님과 교제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까?
23살 청년이 저에게 메일을 보냈어요. 목사님 안녕하세요, 저는요 우선 저는 8살 때 우리들 교회에 왔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쭉 붙어만 있었더니 말씀이 들리게 하심에 감사해가지고요. 어젯밤 늦은 시간까지 속으로 투덜대다 '이게 맞나?' 싶어서 나라와 이번 선거를 놓고 본문을 봤는데 본문 제목이 <주께서 선히 여기시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큐티하며 깨달은 바에 감사해요, 이제 목사님께 올려 드려요. 묵상하기 굉장히 길게 썼어요. 줄이느라고 혼났네요. 친구랑 선거 관련 얘기를 하던 중 논쟁을 하게 됐어요. 상대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나는 화를 내며 동성애와 예배를 지키기 위한 이유 때문이라는 것을 들먹이며 내 주장의 힘을 실었다. 그러면서 싸우다가 그러던 중 내가 이 문제 앞에서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진짜 이유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 이유는 앞서 말했던 거룩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 속에는, '얘가 23살인데, 우리 동네 재개발 안 되면 어떡하지? 공산당 돼서 우리 집 뺏기면 어떡하지? 열심히 일해서 중간만큼 사는 사람 세금 폭탄 먹이고 잘 사는 사람은 더 잘 살고 노력도 안 하고 혜택만 받기 원하는 한심하고 재수없게 사는 사람들만 더 생기면 짜증날 것 같은데 어떡하지?' 였다. 나라도 결국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망해가는 건데 나도 똑같았다. 이런 내 모습이 회개가 된다. 목사님이 좌우로 치우치는 것이 아닌 한 사람의 회개가 나라를 살린다고 하셨는데 난 좌우로 치우쳐 상대의 잘못이 그르기에 눈이 멀어있었다. 요즘 목사님은 늘 회개를 그렇게 부르짖는데 뭐 이렇게 회개를 하다 못해 나라를 위해서까지 회개하라고 하시는가, 기승전 모든 게 회개, 회개,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닌가 하며 불편하게 들리기도 했는데, 나 같은 한 사람을 보며 참으로 애통하게 짝이 없으실 목사님의 말씀에 해석이 되니 너무나 회개가 된다. 이제는 승리의 주권이 오직 주께 있음을 믿는다. 기도하기. 거룩한 가면 뒤에 숨어있는 제 안에 이기심을 보며 더 이상 상대방을 탓하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묵상하기 끝내고 저한테. 저는 지금까지 친구들이 볼 수 있는 SNS 계정에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기사를 열심히 공유하며 갈라치기를 했어요. 또 정치색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친구는 정지하고 속으로 욕했어요. 이러한 저의 모습이 이 나라의 정치인들과 별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아요. 말씀이 들리지 않은 거냐면 정말 많이 정지했는데, 제가 말씀이 들리지 않아 좌우로 갈라서 외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저를 찍고 친구에게 판단하듯 대화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말씀으로 바로 서는 적용을 해나가겠습니다. 나라에 대한 걱정이 많이 돼요. 그리고 집회에 가서는 거룩하고 정의로운 척하지만 집에 와서는 부모님께 툴툴거리며 예의없게 말하고 짜증을 내고, 제 안에 이중성을 볼 때면 괴리감이 느껴져서 괴롭기도 합니다. 오늘 집회를 다녀온 뒤 첫 번째 줄에 앞장서서 9시간 동안 태극기만 흔들었어요. 그리고 그 결과가 잘 싸웠다가 아니라 허무함만 남았어요. 집회를 다녀온 뒤 저는 서울시장도 대통령도 그 누구도 지금의 사태를 해결해 줄 수는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외침은 하나님께 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정말 애통하면 금식기도부터 하라고 하신 목사님 말씀처럼 기도의 힘을 믿고 앞으로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이러한 제 모습을 보고 돌이켜 회개할 수 있도록 항상 부족사의 말씀을 전해주시는 목사님 감사합니다.
얼마나 감사하면 편지를 다 보내겠어요. 여러분, 다음 세대가 왜 중요한지 아시겠죠? 부부 목장에서는 이 목원님의 나눔에 목자님도 반응하시고 밥을 이제 안 하셨는데요. 예, 40, 50대는 진짜 말씀을 들어도, 이 지난주 나눔이라는 게 너무 기가 막히지 않아요. 우리 차별금지법을 교회 개정할 때부터 기도해오고 낙태와 동성애, 생명이 끊어지니까. 그런데 청년은 이렇게 자기 죄를 보며 구체적으로 회개를 하니, 제가 바로 다음 세대를 외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거예요.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얘기를 얘가 제대로 알아들었잖아요. 그래서 우리 청년들 소망이 있지 않아요? 그래서 다음 주일에 전도를 해야 돼요 오늘 청년이 기현이도 나와서 저렇게 그러니까 제가 진짜 눈물이 막 날 지경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정말 부름 때문에 살아가야 되고, 투표로 우리의 의견을 얘기를 하면 되는 거고. 하여튼 항상 본인이 돼야 되는데.
📝 쉽게 풀어보는 말씀 해설
일반 성도님이 위 설교를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도록 풀어 쓴 해설입니다.
한눈에 보는 핵심
하나님은 말씀 앞에서 겸손히 무릎 꿇고, 함께 묻고, 듣기 싫은 말씀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는 하나님의 이 한마디가, 세상 어떤 위로보다 크고 깊은 평안의 근거입니다. 우리의 평안은 상황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막힘없이 통하는 것에서 옵니다.
---
오늘 본문 이야기 (쉽게)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2,600년 전, 남유다 왕국의 요시야 왕 시절입니다.
요시야 왕은 성전을 수리하다가 오랫동안 잊혀졌던 하나님의 율법책(성경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말씀을 직접 듣는 순간, 요시야는 그 자리에서 옷을 찢었어요. 옷을 찢는 것은 당시 가장 강렬한 슬픔과 회개의 표현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며 살았구나. 이 진노를 어찌해야 하나!" 하는 마음이었던 거죠.
요시야는 곧바로 가장 신임하는 다섯 명(오인방이라고 부릅니다)을 불러 명령을 내립니다.
왕이 내리는 명령치고는 참 특이하죠? 보통 왕은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해라" 명령하지, "가서 물어봐라"라고 하지 않잖아요. 요시야는 자신에게 답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여쭤보라고 한 것입니다.
이 다섯 명은 당시 예루살렘의 변두리 난민촌 같은 '둘째 구역'에 사는 여선지자 훌다를 찾아갑니다. 당시 예레미야, 스바냐 같은 유명한 선지자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는 것이 이들의 자세였습니다.
훌다는 화려하거나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두더지'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왕실 예복 담당자의 아내였습니다. 평범한 가정주부였죠.
그런데 훌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 가지로 전합니다.
첫 번째 메시지(15~17절): "이 나라에 재앙이 반드시 임할 것이다.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겼기 때문이다. 이 진노는 꺼지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메시지(18~20절): "그러나 요시야 왕, 너는 내 말을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졌고, 겸손히 옷을 찢고 통곡했다. 그러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너는 이 재앙을 눈으로 보지 않고 평안히 잠들게 될 것이다."
---
구속사로 보면 — 예수님과 어떻게 연결될까
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막혀있다"는 문제입니다.
유다 백성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겼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두꺼운 벽이 생겼어요.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입니다. 그 벽 때문에 재앙이 오는 것이고요.
그런데 요시야는 회개함으로써 그 막힌 담을 허물고 하나님께 다가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도 네 말을 들었다"고 응답하십니다. 막혔던 관계가 다시 통하게 된 것이에요.
이것이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 하나님과의 사이가 막혀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그 벽을 절대 허물 수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막힌 담"을 자기 몸으로 무너뜨리셨습니다(에베소서 2:14).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평화(샬롬)이십니다.
요시야의 회개가 막힌 담을 열었다면, 그것은 언젠가 예수님이 완전히 그 담을 허무실 것을 미리 보여주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요시야처럼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또한 평범한 가정주부 훌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통로가 된 것처럼, 예수님 안에서는 누구든—남녀노소, 화려하든 초라하든—하나님의 일에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복음 앞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
목사님이 강조하신 메시지
1️⃣ 함께 하나님께 묻는 사람이 되세요
요시야는 왕이면서도 "내가 다 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섯 명을 보내어 함께 하나님께 물었어요.
진짜로 묻는 것은 이미 내 답을 정해두고 확인받으러 가는 게 아닙니다. "제가 틀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답을 주십시오"라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혼자 있으면 자기가 옳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함께 말씀을 나누는 공동체(목장, 예배 공동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함께 물을 때 비로소 진짜 묻는 마음이 생깁니다.
또 하나, 요시야는 "나만을 위해" 물으라 하지 않았습니다.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해" 물으라 했어요. 회개한 사람은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 공동체, 나라를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2️⃣ 듣기 싫은 말씀도 하나님의 응답으로 받으세요
요시야가 그렇게 간절히 물었는데, 돌아온 답은 "재앙이 반드시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원하던 답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목사님은 이것이 오히려 진짜 응답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답(합격, 성공, 건강 회복)이 항상 우리에게 좋은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없이 합격하고 성공하면,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실패와 어려움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데려올 수 있어요.
장차 올 환란을 미리 말씀으로 듣는 것, 이것이 복음이고 예방주사입니다. 미리 들었기에 막상 어려움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지요.
하나님만이 100% 옳으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어떤 말씀도 응답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이 들으실 때 진짜 평안이 옵니다
하나님은 요시야의 세 가지 모습을 칭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시야의 업적이나 능력을 칭찬하신 게 아닙니다. 말씀에 대한 반응을 칭찬하셨어요.
그리고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평안의 근거입니다.
평안은 문제가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문제가 많아도 하나님께 피하면 평안이고, 문제가 없어도 하나님을 잊으면 평안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막힘없이 통하는 것, 그것이 진짜 평안(샬롬)입니다.
---
오늘 내 삶에 적용하기
🔹 나는 요즘 누구에게 가장 많이 묻고 있나요?
인터넷, AI, 유튜브… 우리는 세상 모든 곳에 묻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언제 마지막으로 물었나요? 오늘 큐티나 기도 시간에 "하나님, 저는 모릅니다. 답을 주세요"라고 솔직하게 여쭤보세요.
🔹 함께 말씀을 나누는 지체가 있나요?
혼자 있으면 자기가 옳다는 생각에서 빠져나오기 어렵습니다. 목장이나 소그룹, 혹은 믿음의 친구와 함께 말씀을 나누는 자리를 소중히 여기세요. 그 자리가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 됩니다.
🔹 듣기 싫은 말씀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시나요?
"이혼하지 말라", "회개하라", "낮아지라"… 내 귀에 불편한 말씀이 들릴 때 튕겨냈던 적이 있다면, 오늘 그 말씀을 다시 열어보세요. 그 말씀이 혹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응답일 수 있습니다.
🔹 내 기도 제목을 살펴보세요
오늘 내 기도 목록이 온통 "나를 위한 것"뿐이라면, 가족, 교회 공동체, 나라를 위한 기도도 한 줄 추가해 보세요. 회개한 사람은 저절로 이웃을 위한 기도가 나옵니다.
🔹 평안을 어디서 찾고 있나요?
상황이 해결되기를 기다리며 불안해하고 있다면, 오늘 잠깐 멈추고 하나님께 말을 걸어보세요. "하나님, 저 지금 힘들어요. 들어주세요." 그 기도가 평안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들으셨고, 지금도 들으십니다.
---
한 줄 정리